월간참여사회 2006년 06월 2006-06-01   549

‘탁시노믹스’의 추락과 태국 시민사회의 부활

태국 사회가 계속해서 요동치고 있다. 지난 4월 탁신 총리가 올해 초부터 격화된 반 탁신 투쟁에 굴복하고 사임을 선언했다. 하지만 새로 있을 총선에서 탁신이 재기할 것이라는 예측이 흘러나오면서 반 탁신 진영이 다시 긴장하고 있다.

2001년 2월 태국 최대의 부호 탁신 친나왓이 총리에 취임하자 해외 언론들은 그를 ‘민중주의자’라고 명명하였다. 탁신의 타이락타이당은 2001년 1월 선거에서 총 500석 중 248석을 차지하였고, 연정을 이루어 한 때는 364석까지 차지하는 강력한 정부를 구축하였다. 2005년 2월 총선에서도 타이락타이당은 재차 압승을 거두고 2기 집권에 성공한 첫 번째 ‘민주정부’가 되었다.

이로써 자유화가 시작된 1988년부터 97년까지 9년 동안 정부가 8번이나 바뀔 정도로 태국 정치의 고질적인 취약점이었던 지도력 부재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가 흘러나왔다. 아울러 탁신은 자신의 내각에 전례 없이 많은 운동권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여 권력엘리트의 분포를 민주적으로 포장하였다.

이보다 주목할 것은 탁신이 자신의 공약사항이었던 농가부채 상환 유예, 모든 면 단위에 ‘한 마을 한 특산품 운동’ 지원을 위한 100만 바트 씩의 농촌개발기금 지원, 30바트(약 900원)만으로 기본진료를 받을 수 있는 의료복지 도입 등과 같은 전례 없는 서민지원 정책을 집권과 함께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기업들과 주식시장까지 활기를 찾으면서 2003년 태국의 국내총생산 성장률은 예상을 뛰어 넘어 6.7%를 기록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뿐만 아니라 국제사회까지 이른바 ‘탁시노믹스(Thaksinomics)’를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경제민족주의를 배경으로 떠오른 탁시노믹스

탁시노믹스의 등장은 태국 국내통화 바트화의 폭락으로부터 시작된 1997년 경제위기를 그 배경으로 한다. 97년 경제위기의 최초 진원지가 된 태국은 충격에 빠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으로부터 172억 달러에 이르는 구제금융을 약정 받았다. IMF는 구제금융 이행조건으로서 고금리, 세금인상, 공공지출 삭감 등과 같은 강력한 긴축정책을 요구하였다. 그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국이 2020년이면 세계경제대국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찬사를 한 바 있는 IMF가 이제는 ‘모든 것이 잘못되었으며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

경제위기를 계기로 재계에서는 금융자본 주도의 지구화로 인한 파산을 피하기 위해 정치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가 조성되었다. 당시 대표적인 대기업 짜런 폭판조차 여러 자회사를 매각한 상태였고, 최대 금융회사인 방콕은행의 외국인 소유지분도 25%에서 49%로 늘어나 있었다. 당시 IMF는 위기의 원인을 정실자본주의를 속성으로 하는 ‘아시아 모델’에서 찾았고, 채무기업의 파산과 전격적인 해외매각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태국의 많은 기업인들은 IMF의 조처가 정부와 국내 자본의 우호적 관계를 위협한다고 보았다. 일각에서는 근대화, 산업화, 지구화를 거부하고 전통, 농촌, 지방으로 돌아가자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IMF와 추언 민주당정부에 반대하는 국가구제동맹, 국가구제협회와 같은 단체들이 등장하였다. 야당들 역시 정부 여당이 실물경제를 회생시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IMF와 외국자본의 눈치만 보고 있다면서 불신임 결의안을 추진하였다.

이렇듯 98년 7월 탁신은 고조되고 있던 민족주의 감정을 반영하여 ‘타이 사랑’이라는 의미의 타이락타이당을 출범시켰다. 타이락타이당은 민중헌법이라고까지 불린 신헌법 제정 이후 탄생한 첫 번째 정당이 되었다. 하지만 탁신이 자신의 친나왓 그룹의 정치적 인맥을 넓히고 정부로부터의 특혜를 겨냥하여 당을 만들었다는 여론이 일자 타이락타이당은 당사를 친나왓 빌딩에서 이전하였다. 그룹 이름도 ‘친나왓’에서 ‘친’으로 바꾸었다.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행동하자’는 구호로 진행된 탁신의 정치마케팅은 가히 위력적이었다. 탁신은 민주당 정권이 IMF와 외국 기업들에 대해 지나치게 복종적이었다고 비난하면서 중소기업인들의 구세주로 자처했다. 또한 자신을 경직된 관료와 대비되는 유연한 CEO형 정치지도자로 부각시키는데 주력하였다.

민주주의 후퇴시킨 탁신의 ‘강한 국가’ 만들기

집권과 동시에 탁신은 ‘강한 국가’ 만들기 작업에 들어갔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비자유주의적 정치모델을 추켜세우면서 정부와 집권세력에 대한 반대를 국민에 대한 배신으로 몰아갔다. 탁신의 시민사회 길들이기는 언론통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 진영은 탁신정부가 여러 언론매체의 보도, 인사, 방송위원 선정 등에 개입하고 그가 소유한 친그룹의 광고물량을 지렛대로 언론보도를 조종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특히 탁신정부는 돈세탁방지청을 통해 반정부 성향으로 판단되는 언론인들의 금융활동을 내사하도록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독립기관인 헌법재판소, 선거관리위원회, 반부패위원회 등에 대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였다. 주요 시민사회단체들에 대한 해외원조를 차단하려고 시도한 비밀서류가 폭로되기도 하였다.

2004년 1월 치앙마이에서 열린 비공식 워크숍에 참가한 비판적 지식인,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언론인들은 탁신의 민중주의 프로그램이 소비주의를 넘어 국가의 사유화로 나아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미 민중민주주의연맹은 2003년 초 마약과의 전쟁 캠페인 기간에 무고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에 대한 진상조사와 이에 연루된 경찰에 대한 처벌과 정부의 책임을 요구한 터였다.

이렇듯 기대되었던 새로운 헌법에서의 자유의 퇴보 현상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역설 그 자체였다.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은 탁신정부의 단호함과 공격성을 과거 군부독재자 싸릿의 정치행태에 비유했다.

금권을 동원한 민중주의의 파국

케인즈주의 경제정책을 연상시키던 탁시노믹스는 초기부터 부정과 부패 추문에 휘말렸다. 집권 초기부터 탁신은 재산은닉 혐의로 헌법재판소의 심리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진짜 위기는 올 1월 탁신이 친그룹의 지분 49%를 싱가포르의 국영투자기관 테마섹에 매각하여 총 733억 바트의 수익을, 그리고 ‘합법적으로’ 260억 바트에 이르는 엄청난 면세혜택을 받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친그룹의 주식매각이 통신관련법상 외국인이 소유할 수 있는 주식의 비율을 25%에서 49%로 개정한 이틀 뒤에 이루어짐에 따라 ‘타이 사랑’을 기치로 했던 그의 정치마케팅의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자신들이 꼬박꼬박 낸 세금을 농촌에 쏟아 붓고 있다고 불만스럽게 생각하던 방콕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국내외의 이목을 끌었던 탁시노믹스는 금권을 동원한 민중주의로서의 한계를 드러낸 채 막을 내렸다. 반면 반 탁신 투쟁을 계기로 시민사회는 부활하였다. 하지만 태국 시민사회는 구태를 못 벗어나고 있는 금권 및 관권에 맞서 효과적으로 싸워나갈 수 있는 정치적 대안세력의 조직화와 여전히 탁신의 지지기반이 되고 있는 농촌 지역을 끌어안을 수 있는 도시 농촌 간 화합의 로드맵을 마련해야 하는 큰 숙제를 떠안고 있다.

박은홍 성공회대 아시아NGO정보센터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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