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06월 2005-06-01   753

6·15 vs 9·11

우리는 어떤 사건을 달력의 날짜로 기억하곤 한다. 무색무취의 날짜로 사건을 기억하려는 습성은 한반도 남쪽에서 두드러진 것처럼 보인다. 정치사회세력들이 그 의미에 대해 합의를 이루지 못한 사건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4·19가 의거에서 혁명으로, 5·18이 사태에서 항쟁을 거쳐 민주화운동으로 재해석돼 온 것이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날짜로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 정치사회세력들에게는 편리한 방식일 수 있다. 날짜로 남은 사건은 보다 폭 넓은 해석의 공간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도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역동적인 ‘달력정치’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한반도판 달력정치의 ‘세계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2000년 6월 15일 최초의 남북한 정상회담 이후, 6·15는 지구적 수준의 탈냉전에도 불구하고 냉전이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에서 냉전의 평화적 종언을 의미할 수도 있는 세계적 숫자로 부상하고 있다.

다른 한편, 한반도 ‘밖’의 날짜가 한반도의 운명과 관련된 우리의 기억 속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2001년 9월 11일 세계자본주의의 상징인 세계무역센터와 탈냉전시대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 군사력의 상징인 펜타곤이 누군가의 공격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시간 이후, 단순한 날짜이자 숫자인 9·11은, 20세기 세계사의 사라예보나 쿠바, 베트남처럼 되어버렸고, 세계사적 위기를 상징하는 담론으로까지 성장했다. 9·11 전과 후로 세계사의 시기구분이 이루어질 정도다.

9·11에 묻혀버린 6·15

6·15 이후 한반도와 세계는, 남북한의 평화공존과 그를 매개로 한 동북아의 평화를 상상할 수 있었다. 이른바 2(남북한)+4(주변국) 방식으로 진행되는 한반도 및 동북아 평화과정이었다. 그러나 9·11은 이 경로에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 9·11 이후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자국 영토의 안보를 고민하게 되었고, ‘악(?)의 세력’을 미리 제거하는 예방전쟁과 테러와의 전쟁을 선택했다. 북한은 미국이 규정한 악의 세력의 하나였다. 2002년 10월 미국 특사는 북한을 방문해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핵 개발 의혹을 제기했고, 그 사건을 계기로 1994년 북미관계의 정상화를 약속했던 제네바합의는 파기됐다. 2002년 7월 북한의 7·1 개선조치, 2002년 9월 북한과 일본의 평양선언, 2002년 10월 유엔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의 대북지원 발표 등은 핵 개발 의혹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6·15 평화과정마저 무력해졌다.

6·15를 계기로 한반도문제의 한반도화가 이루어졌지만, 9·11을 계기로 제2차 북핵위기가 발생하면서 한반도문제는 다시금 국제화되었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 활동을 재개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 협력을 기준으로 한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의 재편 및 동북아 주둔 미군의 군사혁신과 분쟁에 신속 대응할 수 있는 기동군화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9·11이 6·15를 압도하게 되면서, 한반도 평화과정은 북핵 문제와 미국의 동북아 질서 재편과 연계된 다원다차방정식으로 변모된 것이다.

한반도 평화과정은 한반도를 떠나 북핵 문제를 다루는 6자회담의 공간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세 차례의 6자회담에도 불구하고, 또는 6자회담 덕택에, 북한은 2005년 2월 핵무기 보유선언을 할 수 있게 됐다. 북한이 핵무기 보유선언을 할 때 남북한의 협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6·15 5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민족끼리’를 뛰어넘어 ‘세계시간’ 선도해야

이제 우리는 6·15를 어떻게 되살려야 하는가. 6·15는 2+4의 평화과정을 지시하고 있지만, 6·15를 통한 남북한 평화과정에는 현실과의 어긋남이 있을 수 있다. 6·15에서 ‘우리민족끼리’를 읽으려는 시도가 있다. 그러나 9·11 이후 한반도문제의 전개과정은, 국제적 변수와 마주할 때 ‘우리민족끼리’가 한계에 직면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9·11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의 핵무기 보유선언은 6·15를 이탈하는 사건이다. 6·15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했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와 ‘우리민족끼리’는 양립할 수 없는 논리다.

2005년 5월, 현재 우리는 6·15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6·15는 남북한이 서로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고 평화공존을 약속한 사건으로 기억될 필요가 있다. 세계에서 군사적 밀집도가 가장 높은 지역에 있는 남북한이 평화공존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6·15가 기억될 수 있다면, 6·15는 ‘우리민족끼리’의 시간을 넘어서서 세계사의 새 지평을 여는 ‘세계시간’으로 매겨질 수 있을 것이다. ‘달력정치’는 불안정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그 불안정은 한반도가 ‘세계시간’을 선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세계시간’을 선도할 때, 비로소 ‘우리민족끼리’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9·11에 맞서서 한반도 평화과정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은 9·11의 기억을 폭력과 전쟁을 통해 강요하고 있다. 9·11의 결과만을 바라보고 있는 미국 시민들이 9·11의 원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을 때, 9·11의 비극은 미국 밖의 세계와 공유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런 상황이 곧 찾아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미국의 장기적 몰락을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우리에게 시간이 충분한 것은 아니다. 동북아가 격동의 재편기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 윤리로의 인식 전환이 세계평화 이루는 길

우리의 눈 앞에는 여러 갈래 길이 있다.

첫째, 힘의 정치에 순응하면서 미국이 조종하고 있는 9·11의 폭주기차에 동승하는 것이다. ‘군비증강’에 기초한 협력적 자주국방과 동북아 균형자론은 6·15에 반하는 9·11의 논리다. 그렇다면, 북한은 값싼 비용으로 안보를 사기 위해 핵무기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반세기 넘게 한반도에서 반복됐던 안보딜레마의 지속이다.

둘째, 6·15의 평화공존 약속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사회경제적 기능망의 구축은 물론 군비통제와 군축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남북한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동북아와 세계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만약 이 길이 가능하다면, 9·11의 힘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셋째, 북미관계가 9·11의 논리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때 남한 정부와 시민사회는 매우 어려운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북핵 문제가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한반도 평화과정을 실천하는 문제다.

9·11의 길로 가지 않는다면 거의 유일한 대안처럼 보이는 것은, 남한이 북미대결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및 동북아 시민사회의 동의를 기반으로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의 안보협력을 촉진할 수 있는 ‘평화국가’정책을 실천하는 것이다. 평화의 윤리야말로 힘이고 이익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북한과 미국, 동북아와 세계를 설득하는 것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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