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4월 2003-03-25   953

“님”의 남발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대통령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국민의 정부가 시작되면서 김대중 대통령은 ‘각하’라는 호칭이 권위주의적이라며 ‘대통령님’으로 불러달라고 당부했다. 대통령님이라… 한 번도 불러 본 일이 없는 말인데…. 그러나 대통령님(?)의 말씀인지라 ‘대통령님’은 어느새 여기저기에서 쉽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엊그제 ‘대통령과 평검사들과의 대화’에서도 ‘대통령님’이 사용되었다. 부르는 호칭어가 아니라 대통령을 가리키는 지칭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는 ‘대통령님’뿐 아니라 ‘장관님, 검찰총장님, 검사님’이라는 말이 쉴새없이 나왔다. 아이고! 참 ‘님’도 많구나. 높은 분들이 많이 모인 자리라 그런지 ‘님’이 많이도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분들은 ‘님’을 쓰는 것이 자연스러웠을지 모르지만 지켜보는 국민들은 아마 거북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중에 어느 누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자신 있게 ‘대통령께서, 장관께서, 검찰총장께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리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한국말이 우리 스스로 지향한다고 생각하는 평등사회의 모습에 어긋나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옛날에는 제자가 스승에게 “선생께서 어디 가십니까”처럼 ‘선생’에도 ‘님’을 붙이지 않았으며, 1970년대 어느 무렵 신입생들이 ‘교수’라는 직책 뒤에 ‘님’을 붙여 ‘교수님’이라고 불렀을 때 정말 어색했노라고 한다. 직책 뿐 아니라 직업 뒤에도 ‘님’을 붙여 ‘의사님, 작가님, 기자님’이라는 말까지 나도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님’이 남발되고 있는 것일까? 먼저 말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님’을 사용하지 않음으로 해서 상대가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염려한다. 긍정적으로 보면 상대를 배려한 처사이다. 그러나 그 말속에는 나는 당신을 진정으로 존경하며 당신에게 도전하겠다는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음을 분명히 하려는 뜻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상대가 ‘님’을 사용하지 않을 때 상대가 나를 맞먹거나 무시한다는 생각을 자기도 모르게 하게 된다. 우리는 말로는 평등 사회를 지향한다고 하나 속으로는 ‘영감마님’이나 ‘마님’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님’의 사용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우리나라가 원체 서양처럼 이름을 부르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물론 서양에도 존칭어는 있다. 오해가 없기를) 존칭하는 말은 필요하다. 다만 쓰지 말아야 할 자리에, 쓰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님’을 쓸 수밖에 없게 만드는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님’은 점점 활개를 칠 모양이다. ‘장관님실’이라 말하고 결재란에 ‘사장님란’이라고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리고 그런 말을 써 주면 기분 좋아 허허거리는 사람이 있는 한 ‘님’은 앞으로도 계속 활개를 칠 것이다. 이렇게 ‘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이 어린 여직원의 이름을 ‘씨’도 붙이지 않고 마구 부르고,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는 큰 소리로 ‘아줌마’ 하고 소리 질러 부르는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의 인격님(?)이 어디로 갔나 싶다.

양명희 국립국어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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