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3월 2002-03-01   597

“게이트”형 정권의 도덕성

“게이트”형 정권의 도덕성


미국 샌프란시스코 들머리에 골든게이트란 다리가 있다. 과거에 이 다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투신자살을 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풍요와 기회의 나라 미국에서 골든게이트 아래로 사람들이 뛰어내린 것은 미국의 자존심이 게이트 아래로 추락한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우리나라에는 골든게이트와 같은 유명한 구조물은 없지만 4대 게이트와 같은 부패사건은 있다. 이용호, 정현준, 진승현, 윤태식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4대 게이트가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식 정권 말기를 실감한다. 과거 문민정부 시절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건과 사고가 줄줄이 현실화되어 정권을 흔들더니, 현 정부 들어서는 국가권력의 중추를 구성하는 청와대, 국가정보원, 검찰이 깊이 연루된 온갖 추문들이 정권을 흔들고 있다.

지앤지그룹 이용호 회장이 연출한 ‘이용호게이트’, 엠시코리아 진승현 부회장이 연출한 ‘진승현게이트’, 한국디지탈라인 정현준 사장의 ‘정현준게이트’가 모두 1000∼2000억 원대의 불법대출과 횡령 등이 문제가 된 사건인데, 이를 덮으려 정겙喚瓦 로비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으로 부각되었다. 청와대에서는 경제수석, 민정수석, 공보수석 등이 개입했고, 국정원에서도 차장과 경제단장이 개입했으며, 대통령의 처조카와 검찰총장의 동생까지 관련되어 있다.

반면 ‘윤태식게이트’는 단순 벤처비리가 아니라 살인사건과 정보기관의 납북조작이 복잡하게 얽힌 엽기적인 사건이다. 아내를 살해한 후 월북을 기도한 윤태식이 안기부와 짜고 사건을 북한의 납치미수 사건으로 조작하면서 시작된 사건이 벤처사업을 매개로 한 광범한 정겙喚 로비사건으로 확대되어 물 위로 떠오르면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이 사건에도 청와대 공보수석을 포함해 수많은 인사들이 연루되었으며, 부패방지위원장 내정자가 낙마하고 언론인 25명이 연루되는 등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주었다.

이 사건들을 보면서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 노릇 한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된다. 불과 몇 년 전에 우리는 전두환과 노태우 등 군사독재의 최고권력자와 재벌회장들이 직접 연출한 한국판 토박이 권력형 부정부패를 관람한 바 있다.

거래액수가 기본적으로 수천억 원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의 블록버스터급 정경유착에 익숙한 우리가 대통령과 재벌회장급 주연들이 빠진 대신 얼치기 벤처사업가들과 권력기관의 몇몇 철없는 인사들이 저지른 ‘웃기고 자빠진’ 부패사건을 보자니 한심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한심함을 우리는 민주화의 결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또 하나, 5공 전두환정권의 안기부가 ‘윤태식 게이트’의 씨앗을 뿌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광주항쟁의 악몽에 시달리던 5공 군사정권이 양 김씨와 민주화운동세력이 주도한 직선제 개헌운동으로 형성된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단순 살인사건을 북풍사건으로 조작한 불씨가 꺼지지 않고 살아남아 있었던 셈이다.

그 불씨가 15년 동안 보존되고 키워져서 오늘 김대중정권의 발목을 태워 버렸으니, 안기부의 공작은 정권을 초월하고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삼국지에 제갈량의 모습을 한 나무인형을 수레에 앉혀 사마중달을 물리침으로써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물리쳤다”는 유명한 고사가 있다.

‘윤태식게이트’는 ‘죽은 5공이 산 김대중을 잡은’ 경우가 되어버렸다. 군사독재정권의 악령이 김대중정부의 도덕성을 게이트 아래로 끌어내린 것이다.

정대화 상지대 정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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