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11월 2002-10-30   806

“개혁과 통합” 어떻게?

바야흐로 대선의 계절을 맞은 한국 사회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정몽준 씨의 신당은 ‘국민통합21’로 이름지었다고 한다. 유시민 씨 등이 참여하는 신당은 “정치혁명과 국민통합을 위한 개혁적 국민정당”을 표방하고 있다. 노무현 이회창 등 대선주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개혁과 통합’을 외친다. 아예 ‘개혁통합당’이란 간판을 들고나서면 이번 대선을 휩쓸 듯한 분위기다.

‘개혁과 통합’.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다. 그만큼 어려운 과제다. 김영삼정부와 현 정부에서도 ‘개혁과 통합’은 비슷하게 강조됐다. 그러나 갈등만 첨예화시키며 좌초된 경우가 많았다. 왜 그런가? 개혁과 통합의 의지가 부족해서? 아니다. 개혁추진세력의 힘이 약해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개혁을 추진하는 방식이 잘못되거나 효과적이지 못해서였다. 개혁추진방식이 효과적이면 추진측이 힘이 열세여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개혁과 통합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것일까.

참여-합의형 개혁

우선, 개혁은 혁명과 다른 것이란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혁명은 비정상적 특수 상황이다. 혁명주체들은 미리 준비한 프로그램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 된다. 저항하는 세력은 힘으로 눌러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개혁은 그럴 수 없다. 정상적 민주사회에는 다양한 사회집단이 있고 그들의 신념과 이해관계는 존중돼야 하기 때문이다. 각 사회집단들은 명시적-묵시적 협약을 통해 서로간 이해관계의 균형을 모색한다. 그렇게 균형잡힌 이익의 총합이 바로 공익이다. 기존의 틀에 문제가 있어서 공익을 다시 정의하고 새로운 틀을 짜려고 하는 것이 개혁이다. 그 새로운 틀은 누가 짜는가. 이른바 ‘개혁주체세력’ 그리고 그 주변의 일부 전문가그룹? 아니다. 초벌 밑그림 정도야 그들이 그려볼 수 있겠지만, 모양과 색깔까지 그들 마음대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개혁조치에 영향을 받는 집단들이 직접 참여해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오랜 협의와 지루한 협상을 통해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을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개혁은 혁명보다 몇배 어렵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리 어렵고 더디더라도 그래야만 개혁이 원만하게 이뤄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개혁으로 피해를 보는 집단이 반발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개혁을 추진하는 측에선 여론을 앞세워 그런 반발을 누르려 한다. 그러나 어떤 조치로 인해 이득을 보는 다수집단이 그렇지 않은 소수집단에게 일방적으로 손해를 감수하라고 하는 것은 다분히 파쇼적이다.

김영삼정부나 김대중정부는 여러 가지 개혁조치를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그런데 그 추진방식은 ‘개혁적’이라기보다는 ‘혁명적’인 경우가 많았다. 개혁주체와 개혁대상이 따로 있었다. 정부 핵심부의 극히 소수가 프로그램을 짜고 일방통행 식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다 보니, 추진 과정에서 소위 ‘개혁대상세력’ 또는 ‘기득권세력’의 반발과 저항에 부딪치며 좌초하고 만 것이다. 더디고 힘들더라도 ‘참여-합의형 개혁’이 올바른 길임을 웅변해주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참여형 개혁이라고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집단의 참여는 개혁 성공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얘기다. 김영삼정부의 경우 노사관계 개혁, 김대중정부의 경우 의약분업을 추진하면서 해당 이해집단 대표들을 논의과정에 참여시켰다. 오랜 협상과정도 거쳤다. 참여형 개혁의 드문 모델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원만하게 마무리되지 못했다. 그런 전철을 밟지 않고 참여-합의형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개혁을 추진하는 측에게 꼭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합의형 개혁에 대한 정부의 분명한 의지다. 김영삼정부가 추진했던 노동관계 개혁이 결국 실패로 매듭된 것도 그런 의지 부족 탓이 컸다. 노동계와 경영계 대표간 오랜 협상 끝에 대부분의 사안이 타결되고 마지막 주요쟁점 몇 가지가 남았었다. 일각에서는 조심스럽게 막판 대타협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 어렵다는 노동관계개혁을 이해집단의 참여와 합의를 통해 성공적으로 이뤄낼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선례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96년 12월말 ‘여의도 쿠데타’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마치 군사작전을 펼치듯 여당 의원들만이 새벽녘에 의사당에 모여들어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것이다. 노사합의로 법개정을 추진한다는 당초의 약속이 배신당하자 노동계는 총파업으로 맞섰다. 합의형 개혁에 대한 최고의사결정권자(대통령)의 의지가 강했다면 좀더 기다리며 어떻게든 당사자간 합의를 이루도록 노력했을 것이다.

둘째는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문제해결능력이다. 정치란 원래 엇갈리는 의견이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기술이다. 특히 국가적인 차원의 개혁과제를 추진할 때 그런 조정력은 필수적이다. 걸려 있는 이해관계가 크고 복잡하기 때문에 당사자간 협상은 늘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갈등해결에 대한 깊이 있는 안목을 가지고 개혁을 입안-추진할 필요가 있다. 또 경우에 따라 직접 중재를 할 수도 있어야 한다.

공정 사회 그리고 국민통합

‘국민통합’ 혹은 사회통합을 이루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통합이란 무엇인가? 지역 혹은 집단 간 갈등과 반목을 해소하고 함께 잘 어우러져 지낼 수 있도록 한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국민통합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최소한 두 가지다. 첫째, 현재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과 대립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대선 후보 또는 정당으로서 ‘국민통합’을 외치려면 앞으로 어떻게 지역간, 집단단 갈등을 해결할 것인지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또한 과거 정부의 잘못(차별, 억압, 불공정, 가혹행위 등)으로 상처와 피해를 당한 지역이나 집단에게는 이를 회복하고 바로잡을 수 있도록 정책적-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둘째, 국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갈등과 대립의 소지를 사전에 최소화시키고 통합적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사회통합의 가장 큰 저해요인은 불공정이다. 게임의 룰이 공정치 못하면 패자는 승복하지 않고 장외 투쟁으로 치닫는 법이다. 특히 정부 정책이나 법 집행, 인사 및 자원분배 등의 공정성은 사회통합의 필수요건이다. 문제는 공정한지 안 한지의 판단기준이 처지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이다. 정책 입안자 또는 그 정책으로 득을 보는 측의 입장에선 공정하다고 하겠지만 피해를 보는 집단에겐 불공정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정부 정책에 대해 대다수가 공정하다고 해도 어느 한쪽에서 불공정하다고 하면 그건 공정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개혁 추진방식과 마찬가지로 ‘참여와 합의’다. 대통령 또는 정부에서 아무리 공정하게 정책을 결정하고 일을 추진한다고 해도 해당 당사자 눈엔 다르게 비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예 처음부터 논의과정에 해당 지역 또는 집단 대표들을 참여시켜 함께 의사결정을 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거기에 참여한 모두가 원칙과 기준을 함께 만들면 그것이 바로 모두에게 공정한 것이 되고 그에 따른 결과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강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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