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1월 2002-01-01   5653

일하는 빈곤-공무원도, 노동자도 아닌 집배원의 서글픔

우편물의 주인을 찾아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헤매는 집배원, 똑같은 제복을 입고 똑같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우편물을 배달한다. 하지만 똑같은 제복을 입은 집배원도 정규직 집배원, 상시위탁집배원(이하 상시집배원)으로 나뉘어 있다. 아파트 우편함에 수북이 쌓여 있는 우편물 가운데 절반 정도는 비정규직 집배원의 시름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것들이다.

상시집배원은 정규직 집배원과 동일한 업무를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시집배원은 정규직 집배원이 될 수 있는 징검다리 같은 자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시집배원이 정규직 집배원이 되는 일은 먼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난 9월 정규직 특별 채용이 있기는 했지만, 3800명이 넘는 상시집배원 가운데 178명만 정규직으로 채용되었다. 정규직 전환을 늘리겠다고 약속했던 정보통신부는 이번에도 상시집배원을 200명이나 뽑았다. 정규직이 된다고 해도 열악한 근무조건은 마찬가지지만 날마다 우체국의 눈치를 보는 신세라도 면할 수 있어 상시집배원들은 정규직 전환을 고대한다.

집배원의 하루는 고달프기 짝이 없다. 대부분의 집배원들이 우체국에 출근하는 시간은 오전 7시. 적어도 9시까지는 전날 끝내지 못한 우편물 분류를 끝마쳐야 한다. 그래야 10시 이전에 맡은 구역으로 배달을 나갈 수 있다. 하루종일 바쁘게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며 배달을 마치면 어느 새 저녁 6시가 훌쩍 넘는다. 우체국에 돌아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우편물을 정리하다 보면 밤 9시.

올해로 4년째인 상시집배원 이창원 씨(33세)는 가족들과 따뜻한 저녁 한번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이라며 한숨을 내쉰다. “우편물이 급증하는 연말에는 당연히 휴일도 없죠. 잠자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집에 가지 않고 우체국 소파에서 새우잠을 청하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하루 15시간 가까운 노동 속에 나이는 들고 어느덧 천직이 되어버린 집배원. 그러나 희망이 없다. 언제 그만 둬야 할지 모르는 불안한 신분이지만 이 일을 그만두면 새로 무얼 할 수 있겠나 자신이 없어 그냥 머물러 있을 뿐이다.

시간당 2800원짜리 5년차 상시집배원

공무원 10급 5호봉인 정규직 집배원의 연봉은 2100만 원이다. 기본급여에 가족수당, 급식비 등 각종 수당을 더한 금액이다. 자녀 학자금도 고등학교까지는 나온다. 반면 상시집배원의 경우, 기본급여와 출장여비, 상여금, 연장근로수당, 장기근속보로금을 포함해 대략 1600만 원의 연봉을 받는다.

5년 경력의 상시집배원이 시간당 2800원 정도의 임금을 받고 있는 셈이다. 커피숍 아르바이트보다 시간당 임금이 더 낮다. 정현구 집배원노동자협의회(이하 집노협) 조직부장(28세)은 “상시집배원들은 언제든 좋은 일자리만 있으면 우체국을 떠날 생각을 한다”면서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집배원은 드물고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는 배달원이란 생각을 스스로 갖고 있다”고 말했다.

계약기간도 문제다. 대부분의 상시 집배원들은 1년으로 정해진 계약기간 때문에 아무리 심한 불이익을 당해도 참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서울 금천우체국에 근무하는 김종화 씨(가명·36세)는 얼마 전 교통사고를 당했다. 우편물 배달을 하다가 택시에 부딪힌 것이다. 오른쪽 손가락 하나가 부러져 일을 쉬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최씨는 산재보험으로 처리하려고 했지만, 우체국에서는 업무경영평가 점수가 낮아진다는 이유로 김씨의 돈으로 병원비를 내도록 종용했다. 우체국에서는 ‘업무 미숙’으로 당장 해고할 수 있다며 협박까지 했다. 김씨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자기 돈으로 병원비를 냈다.

일한 만큼이라도 월급을 달라

박석기 씨(44세)는 서광주우체국에 근무하는 상시집배원이다. 하지만 이곳으로 출근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 11월 28일 우체국측에서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통보했기 때문이다. 서광주 우체국은 박씨가 ‘상시집배원 운영지침’을 어기고 우체국의 이미지를 훼손했으므로 계약을 해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씨는 이 문제와 관련해 이미 3개월 감봉 처분을 받았으므로 계약해지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다. 그는 “제대로 지급되지 않은 시간외수당을 달라는 진정서를 내고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한 것이 왜 우체국의 품위를 손상시킨 것이냐”며 출근투쟁 뿐 아니라 소송이라도 해서 반드시 복직하겠다고 말했다.

박씨를 포함해 광주지역 집배원 21명은 지난 5월 광주지방노동사무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진정서에서 대부분의 상시집배원이 한 달 평균 120시간 이상 시간외근무를 하고 있는데도 규정상 75시간까지만 수당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했다. 얼마 전 이들의 호소가 받아들여져 광주지역 집배원들은 출근기록부에 기록돼 있는 시간외수당을 모두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박씨와 우체국의 싸움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박씨의 주장은 이렇다. “저는 1998년 6월 11일 우체국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는데 2000년 11월 15일까지는 출근기록부라는 게 없었습니다. 출근 기록이 없던 이 기간에 시간외 수당을 제대로 못 받았기 때문에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 소송에서 이기면 수당도 없이 밤늦게까지 일하는 전국의 상시집배원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비정규직의 힘으로 체신노조 민주화를

하루 15시간이라는 긴 노동시간은 물론 비정규직만의 문제는 아니다. 비정규직보다 조금 나은 임금을 받고 있는 정규직 집배원도 업무가 과중한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집배원의 편에 서 있어야 할 체신노조는 이와 관련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고 있지 않다. “2000년 6월, 몇몇 상시집배원들이 체신노조에 가입원서를 제출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올해 5월에야 받아주더군요. 체신노조 입장에서는 비정규직 투쟁이 더 이상 거세지기 전에 비정규직을 끌어안고 가야 한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 정현구 집노협 조직부장은 정부 입장을 대변하기에 급급한 체신노조가 비정규직의 힘으로 하루 빨리 민주화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체신노조 위원장 선출방식에 대해서도 뼈있는 지적을 했다. “조합원들이 지부장을 선출하고 그 지부장들이 전국 대의원대회를 거쳐 노조위원장을 선출합니다. 체신노조도 한국 철도노조처럼 3중 간선제를 조합원 직선제로 바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집배원은 영원히 우편물 배달하는 기계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우체국 밖 사람들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갖가지 모임으로 흥청대는 연말 저녁. 우체국 안에는 늦은 밤까지 불을 밝히고 우편물을 정리하는 손길들이 있다. 그들이 입은 집배원 제복 위에 상시집배원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삶에서도 비정규직이란 차별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올해에는 함박 웃는 얼굴로 우편물을 건네주는 집배원 아저씨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박정선영(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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