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3월 2000-03-01   1128

16대총선 감상법 ㅣ 유권자운동이 넘어야 할 세가지 장벽

16대 총선의 가장 큰 변수는 유권자의 시민불복종운동이다. ‘바꿔! 바꿔! 모든 것을 다 바꿔!’ 새 천년의 한국 정치는 유권자의 반란으로 문을 열었다. 낡고 썩은 정치를 더 이상 참지 못한다며 시민단체들이 낙천 낙선운동을 시작했다. 정치에 부대끼다 못해 정치를 경멸하던 국민이 부패 정치인 무능 정치인의 퇴출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정치권이 요지부동이던 의석 수를 줄이는 등 부랴부랴 야합했던 정치관계법의 일부를 고친 것은 국민의 기세에 눌렸기 때문이다.

사실 16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 사이에 정치적 대립점이 뚜렷하게 형성되지 않았다. 종래의 독재타도나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호소력 있는 구호를 내세우기 어려운 상황이다. 여당은 안정론을, 야당은 중간평가론을 내세우고 있지만 유권자들의 지지를 확실하게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허무주의나 정치적 환멸에 빠진 유권자들이 늘어나 사상 유례 없이 낮은 투표율이 전망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같이 일어난 낙천 낙선운동은 유권자들에게 정치적 희망을 주었고, 선거혁명에 대한 기대까지도 나오게 되었다.

정치권, 낙선운동 악용해 ‘미운 놈쫓기’

그러나 16대 총선의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밑으로부터의 참여민주주의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는 증명되었다. 이 열기를 조직화시켜서 선거날 올바른 투표로 이끌 수 있다면 이른바 유권자에 의한 ‘무혈 선거혁명’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최근의 몇 가지 흐름을 보면 상황이 반드시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먼저 여야 3당의 공천이 이 같은 기대를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근거 없는 ‘음모론’을 내세우면서 처음부터 낙천 낙선운동을 거부했던 자민련은 논외로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시민단체 의견에 대한 수용의사를 밝혔던, 그래서 야당과 공동여당인 자민련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민주당조차도 ‘공천부적격자’들이 무더기로 구제되었다. 여야는 시민의 열기를 ‘미운 놈’ 쫓아내기에 써먹었을 뿐이다. 공천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또 공천심사위원회에 외부인사를 영입하기도 하는 등 민주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끝내 기존 공천 관행의 두터운 벽을 깨뜨리지 못했다. 반개혁적 반민주적 밀실공천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시민단체들은 여기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총선시민연대는 공천받은 낙천대상자를 대상으로 공천철회운동을 벌이고, 이어서 낙선운동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문제는 정치권이 제한해 놓은 낙선운동의 범위를 넘어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유권자운동을 벌일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있다. 앞으로 총선시민연대는 불법 시비에 맞서 낙선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정치권과 대부분의 언론은 낙천 낙선운동을 불법이라고 비판하면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낙천 낙선운동에 지지를 보내면서도 불법이라는 주장 때문에 마음 한 구석이 개운치 않은 국민들도 많았다.

16대 총선의 또 하나의 변수는 지역주의이다. 정당이 이념이나 정책, 노선이 아니라 지역에 의해서 차별화되는 현실이다. 온 나라의 절반이 넘는 지역에서 특정한 정당의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 거의 확실했다. 지금까지의 선거에서 각 정당의 선거전략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바로 지역감정의 이용이었다. 여야가 시민단체의 강력한 요구와 국민의 압력을 뻔뻔하게 거부할 수 있었던 것도 지역할거주의라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을 ‘음모론’이라 몰아부친 것도 지역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선거전략의 일환이었다. 지역주의 바람이 강하게 분다면 오히려 부동층의 정치적 냉소주의가 강화되어 투표율도 낮아지고, 지역주의적 투표성향은 여전히 기승을 벌일 것이다.

지역감정과 더불어 유권자운동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언론이다. 아주 짧은 기간에 국민의 지지를 폭발적으로 끌어내자 언론은 낙천 낙선운동에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낙천 낙선운동이 정치에 대한 공세로 비쳐지자 정치권력의 약화가 언론권력의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도 낙천 낙선운동에 대한 적극적 보도태도를 갖게 했다. 그러나 유권자운동의 다음 목표가 언론개혁이 될 것이라고 느끼면서 언론은 낙천 낙선운동에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무책임한 권력인 언론의 비우호적 장벽을 뚫고 나가는 것은 시민단체들의 과제인 동시에 16대 총선의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진보정당의 정치진입장벽 여전히 높아

16대 총선에서 눈여겨 지켜볼 대목 가운데 하나가 진보정당의 정치권 진입 여부이다.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이 사형당한 이래 진보 세력의 정치세력화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어 왔다. 6월 항쟁 이전에는 진보세력은 철저한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었다.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햇빛 속으로 나온 진보진영은 줄곧 정치세력화를 꾀했지만 줄곧 실패했다. 민중의 당-민중당-한겨레민주당 등 모두 정치세력화에 실패했다. 정치권 진입은 고사하고 정당법상의 정당존속요건조차도 충족시키지 못해 선거가 끝나면 해산되는 비운을 되풀이했다. 기존 보수정당에 의탁하고 나서야 겨우 정치권 진입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같은 개인적 성공(이 성공은 그 뒤의 행적으로 말미암아 변절의 혐의를 강하게 받고 있다)의 그늘에는 집단적 좌절의 아픔이 깔려 있는 것이다.

지난 97년 대통령 선거 당시의 국민승리 21에 이어 민주노동당이 탄생했다. 민주노동당은 진보당 이후 가장 조직적으로 정치권 진입을 노리고 있다. 기성 정치에 대한 환멸과 새로운 정치 세력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민주노동당에게 유리한 조건이다. 그러나 선거법을 고치는 과정에서 1인2표제 도입에 실패하고, 비례대표 의석 수가 늘지 않았으며 진입장벽을 높여놓는 등 정치적 환경은 민주노동당에게 유리하지 않다. 울산 동구청장 보궐선거 승리를 재현하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세기말의 우리 정치는 낡은 정치의 추악한 모습만 보여주었다. 국회는 일년 내내 헛돌았고 여야는 사사건건 팽팽하게 맞서기만 했다. 6.4 지방선거를 비롯해서 몇 차례의 재·보궐선거에서는 지역감정과 흑색선전이 기승을 부렸다. 국민의 정치불신은 냉소주의나 무관심에 머물지 않고 정치를 경멸하는 상황이 되었다. 정치에 대한 증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천년의 정치 패러다임은 새로운 내용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정치가 갈등과 대립의 정치였다면 새천년의 정치는 화합과 조화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 국민을 평소에는 소외시키고 배제시켰다가 필요할 때만 동원했던 동원의 정치에서 참여의 정치로 바꾸어야 한다. 밀실에서 패거리 중심으로 행해지던 돈 정치는 열린 광장으로 나와 햇빛 아래서 투명하게 이뤄지는 깨끗한 정치가 되어야 한다. 유권자가 잃어버린 주권을 찾아서 움직이기 시작한 16대 총선은 우리 정치발전의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 우리 정치의 앞길, 오로지 유권자만이 희망이다.

손혁재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