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배 칼럼

‘순간’의 시간과 ‘영원’의 시간

어느덧 세밑이 바뀌어 새해가 열리는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거듭 ‘시간’을 생각하게 된다. 시간은 매듭없이 흘러가건만, 인간은 거기에 매듭을 새기고, 묵은 해와 새해를 거른다. 달과 날을 가르고 하루의 시간들마저 조각낸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인간의 지혜라고 말한다. 또다른 어떤 이들은 그것을 미개와 문명의 차이로 가름하기도 한다. 미개의 시대에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을 터이지만, 인간의 깨달음이 미치지 못했다는 뜻인 듯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시간은 깨달음의 함수인가.

역시 시간의 길이, 시간의 밀도는 절대가 아닌가 보다. 시간을 사는 이에 따라 길이와 밀도가 상대적으로 달라지게 마련인 게 시간이 아닌가도 싶다. 그 함수를 엄청난 상상력으로 그려낸 한 사람이 바로 H.G 웰즈다.

요즘엔 ‘타임머신’이라는 말이 다른 뜻으로도 쓰이고 있지만, 그가 창안하고 그가 그려낸 『타임머신』은 온갖 시간을 제멋대로 날아다니는 시간비행기이다. 그의 시간비행기는 머나먼 과거의 시간으로도 날아가고, 수십만 년 앞의 미래로도 날아간다. 어쩌면 터무니없는 상상력의 유희쯤으로 폄하될만한 장난끼가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참뜻은 장난이 아니다. 전혀 갇혀지지 않은 해방의 시간여행을 통해서 시간과 삶과 역사의 뜻을 새겨보고자 한다. 그의 참뜻은 마침내 ‘신가속제’라는 약품의 상상적 발명으로 구체성을 획득하기에 이른다. ‘신가속제’란 시간을 줄이기도 하고 늘이기도 하는 자유자재의 묘약이다.

그 ‘신가속제’를 먹으면 시간의 감각이 천 배 이상으로 뛰어오른다. 이를테면 손에 들었던 컵을 떨어트려도 땅에 떨어지지 않은 채 공간에 머문다. 길거리를 달리던 자전거도 멈추어 선 듯이 보인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것은 멈춤이 아니라, 시간의 압축인 셈이다.

조금은 흥미 위주의 이야기거리들만을 들추어보았지만, 진지하기 짝이 없는 시간의 철학들은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무성하다. 시간의 철학에는 이른바 철학자들만이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과학자와 예술가들도 시간을 생각하고 시간을 말한다. 조잡하게 간추린다면 그들은 우주와 역사를 시간의 운동으로 파악한다. 한정한다면 삶과 그 역사도 시간의 운동이다. 인간과 공간이 시간과 더불어, 아니 시간의 역동 속에서, 엮어내는 드라마가 삶이며 역사라는 생각일 터이다.

엉뚱하다면 엉뚱하게 시간의 철학을 들먹이는 것은 세밑과 새해의 탓만은 아니다. 이 땅의 삶과 역사, 그리고 이 땅의 운동을 생각할 때마다 시간의 숨결이 나의 머리와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 탓이다. 그 가운데서 얼마 전에 읽은 송두율 교수의 ‘속도에 대한 단상’은 단상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명상’을 요구한다.

그는 『역사는 끝났는가』를 묻는 최근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소재는 윤이상 선생의 음악이다. 서울을 비롯한 이 땅의 몇몇 도시에서 열렸던 ‘윤이상 음악제’에 참여했던 독일인 음악평론가 한 사람은 그에게 이런 전화를 걸어왔다고 한다(물론 다 아는 대로 그 ‘윤이상 음악제’에는 윤이상 선생이 참여할 수 없었고, 송두율 교수도 참관할 수 없었다).

“윤 선생 음악을 서양사람들이 연주하는 것보다 한국사람들은 처음부터 너무나 빨리 그리고 시끄럽게 연주했다. 지휘자도 그렇고 연주자들도 흡사 무엇에 쫓기듯이 연주했는데 윤 선생 음악 속에 들어 있는 동양적 정서가 재생되지 못했고 휴식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는 바쁜 연주였다.”

시간의 예술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음악의 시간 역시 절대의 길이와 밀도 속에 갇힐 수만은 없는가보다. 문화라고 해도 무방하고 풍토라고 해도 무방하다. 인간과 공간에 따라서는 음악의 시간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나 다를까, 요즘의 음악론은 시간의 예술론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더구나 영상매체의 ‘발전’은 일련의 음악론 속에 인간과 공간의 무게를 가중해가는 추세이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당연히 그렇게도 오묘한 음악론에 쏠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숨을 헐떡이며 질주하는 이 땅의 삶과 역사, 그리고 이 땅의 운동에 집중된다. 물론 그 숨가쁜 질주가 그나마 이 땅의 삶과 역사를 풍요로 이끌어올렸다는 진단도 큰 목소리로 울려온다. 이 땅의 운동에도 비슷한 평가가 안겨진다.

그렇다. 그 양지가 남긴 응달에도 불구하고 단칼에 물리쳐 버릴 수만은 없는 진단이다. 그러나 삶과 역사와 운동의 시간은, 무산소의 100미터 경주에만 갇혀야 하는가. 삶과 역사와 운동의 시간이, 숨가쁜 종목에만 한정되어야 하는가. 그것이 정작 이 땅의 시간일 뿐인가.

그 응답을 망서릴 겨를도 없이, 송두율 교수는 하나의 화두를 던져준다. “베를린에 돌아와서야 동양적 정적을 찾을 수 있었다는 그 독일인 음악평론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제는 휴지 없이 바삐 돌아가는 남한사회와 독일의 정적을 결합하는 작업이 하나의 과제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화두는 한 마디로 ‘윤이상 음악제’에 붙이는 감회가 아니다. 오히려 이 땅의 삶과 역사와 운동에 붙이는 메시지이다.

‘순간’이 곧 ‘영원’, ‘영원’이 곧 ‘순간’

육상경기만 하더라도 그러하다. 단거리 경주의 종목만으로는 인간을 두루 반영하지 못한다. 중장거리 경주까지가 어울려야만 비로소 인간의 세계를 두루 반영하게 된다. 숨가쁨과 정적의 조화라는 그의 화두를, 이렇게 번역한다면 오역이 될 것인가.

아니다. 아니라고 믿는다. 그는 친절하게도 그 뒤의 글에서 “빨리 가기 위한 자동차가 이제는 빨리 가지 못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보드리야르의 말을 소개한다. 그리고 전기를 뜻하는 ‘에포크’(Epoche)라는 그리스 말은 원래 ‘주저’라는 뜻이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나는 이 대목에 이르러 ‘카라’라는 산스크리트어를 떠올린다. ‘카라’는 물론 시간의 이름이다. 따라서 ‘순간’을 가리키기도 하며, 시간의 주기와 시간의 무한한 지속 끝에 자리하는 ‘영원’을 지시하기도 한다. 새겨보면 ‘순간’과 ‘영원’이 따로 떨어진 단절의 시간일 수 없다는 뜻이리라. ‘순간’이 곧 ‘영원’이며, ‘영원’이 곧 ‘순간’이라는 경탄할 만한 아포리즘도 ‘카라’의 소산이다.

그렇다면 순간의 이야기는 영원의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확대해석이 가능하다. 영원의 이야기도 순간의 이야기와 맞물려져야 한다는 경구를 거부할 수 없다. 그 시간의 철학을 운동의 마당에 부연한다면, 순간의 이야기는 이른바 ‘작은 이야기’일 수 있으며, 영원의 이야기는 곧 ‘큰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카라’의 지시는 이미 순간과 영원의 경우처럼, ‘작은 이야기’와 ‘큰 이야기’의 구분이나 단절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진정한 민주와 민족과 민중의 새로운 질서를 찾아가는 ‘역사는 끝났다’는 단정에 섣불리 동의하지 못한다. 그것이 설령 현상의 일부를 지적하는데 적중하는 대목이 있다고 할지라도, 음악보다도 오히려 시간의 예술인 운동의 세계에 적중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더구나 천민자본주의가 발호하고 민족의 문제가 아픔을 확산하는 이 땅의 현실에는 걸맞을 수가 없다.

‘거대 담론’이라는 표현에 친화적이지 못한 나는, ‘큰 이야기’라는 표현에도 선뜻 찬성하지 못한다. ‘카라’가 일러주듯 순간은 순간만이 아니다. 따라서 순간의 이야기를 ‘작은 이야기’로 돌려버리는 담론에도 친화적일 수 없다. 순간과 영원이 맞물리는 이야기가 바로 시간의 예술인 운동을 말하기에 적합하다.

세밑과 새해의 바뀜은 우리를 다시 한번 ‘주저’하게 한다. ‘주저’는 멈춤이 아니다. 새로운 뜀뛰기를 위한 움츠림이다. 그 움츠림은 필경 명상을 위한 몸짓일 터이다. 새해를 맞으면서 운동의 지렛대인 시간이라는 무엇인가를 거듭 생각한다.

김중배 언론인·참여연대 공동대표 겸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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