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

우리네 인생 유혹하는 드라마

밤늦게 작업을 할 경우가 많은 나에게 아침은 8시 반을 훌쩍 넘기고서 열린다. 그 아침을 먼저 반겨주는 것은 눈부신 햇살이 아니라 텔레비전 화면이다.

주부를 주시청자로 하는 아침 연속극은 언제나 그랬듯이 멜로물이 주류를 이룬다. 요즘에는 30대, 40대 부부의 세칭 ‘황홀한 반란’이 연속극의 주된 줄거리를 구성한다. 왜 그것을 보고 있을까, 생각하니 겸연쩍다 싶으면서도 정작 더 겸연쩍은 일은 7살짜리 아이마저 내 옆에서 연속극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념도 잠깐, 밥상과 더불어 아내의 무력이 개입한다. “아니, 창피하지도 않아요, 둘이 똑같애, 부자가 바쁜 아침부터 쓰잘 데 없는 드라마나 보고 있으니 말야!” 비아냥거리며 텔레비전을 ‘팍’ 끈다. 그 순간, 나는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다, 그냥 켜져 있었을 뿐이다는 식의 변명을 내세우기에 급급하지만, 꼭 변명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눈을 떴다, 화면이 보였다, 아니 보임을 당했다, 왜, 텔레비전 영상은 정지된 사물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전자 영상이 아닌가, 정지된 사물보다는 움직이는 것에 더 집착하는 것이 사람의 눈인지라 그 영상이 나를 보게 만들었다, 게다가 낯익은 스타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이 갈등하고 대립하면서 파국적 사건에 휩싸여 있다, 그래 호기심이 발동했다 등등. 대충 이런 식으로 나의 시청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으리라.

드라마는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역사이고 거울이며 자유시간이다. “얘, 이승연이 좀 어색하더라”, “그래도 봐줄만 하던 걸!” <첫사랑>을 안 본 사람은 이런 시중의 화제에 끼여들지 못한다. 그 드라마는 풋풋하고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를 그려보인다. 각박한 세태 속에서 잃어버린 옛 추억의 그림자를 다시금 눈으로 되씹게 하는 것이다. 보는 이는 그런 그림자 앞뒤를 넘나들면서 스스로를 탈현실화하기도 하고, 탈현실화된 세계를 탐색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시간은 응축하며 부서지고, 역사가 증발한다.

한편, 드라마는 우리가 그냥 스치곤 하던 일상의 현상마저 새 눈으로 보게 해준다. 그런데 그 새 눈은 한쪽만 비추고 나머지는 가리는 외눈이기 쉽다. 한껏 게으른 자세를 취한 시청자는 스스로에게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고 느끼며, 그럴수록 드라마 속의 스타들은 어쩌면 늘 그렇게도 잘났고 진보적인가 하고 경탄하게 마련이다. 이래저래 느끼게 된 열등감은 바로 그 사각형의 외눈이 보여주는 것 때문이다.

자유시간 계획표까지 짜주는 드라마

그뿐인가 하면, 드라마는 사사로운 자유시간의 계획표까지 짜준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나, 오늘 <첫사랑> 볼 꺼야” 하고 동료에게 말을 건네면, “유치하게 그걸 보냐, <사랑한다면>은 어때?”라는 응답이 나온다. 드라마 시청 행위를 중심으로 자유시간이 편성된다. 이같은 드라마의 기능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으며 ‘엥겔 지수가 높은’ 집안에서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와 <여로>를 보았고 지금 내 아들이 나와 사이좋게 <첫사랑>을 보고 있다면, 30년 뒤에 아들은 자기 자식과 무슨 드라마를 보게 될 것인가.

‘사랑의 게임’이라 부를 만한 드라마의 기본틀은 앞으로도 크게 바뀌지는 않으리라. 남녀간 사랑이 이즈음 ‘동성애 권하는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여러 색다른 사랑 게임으로 변주되고 분열될지언정 사랑과 갈등이라는 주제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줄거리 또한 연민을 자아내는 주인공이 일련의 사건을 통해 운명의 반전을 겪어나가는 과정으로 수렴되며, 대립과 위기, 그리고 갈등의 해소가 자주 반복될수록 드라마는 그만큼 생생하고 활력있게 전개된다는 인상을 줄 터이다.

요컨대 드라마는 사랑과 갈등을 기본 주제로 삼고 그 주제를 되풀이 반복하는 플롯을 갖는다. 이런 드라마를 시청하는 행위는 담배를 피우거나 아니면 교회에 예배보러 가는 것마냥 관습적, 의례적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매번 같은 플롯을 대하면서도 새 드라마에 울고 웃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청자는 그저 매주마다 제공되는 이야기의 현기증 나는 흐름에 몸을 내맡긴 채 그것이 마치 현재진행형인 사건인 양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뒤쫓는다. 이런 정황 속에 진실의 일부가 숨어 있긴 하지만 정작 드라마 중독의 동인은 좀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많은 시간 동안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것을 묘사하는 데 쓰이는 말이 ‘중독’이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일컬어 ‘전원에 연결된 마약(Plug-In Drug)’이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제 손으로 텔레비전을 끄지 못하거나 마지못해 끄는 나, 신문을 사들고 즉시 텔레비전 프로그램란을 보며 저녁 시청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직장인, 친구가 놀러왔을 때 “잠깐만 기다려, 보던 것 마저 보고”라고 말하는 아이, 이 모두가 텔레비전 증독 증세를 보이는 환자들이다. 이 환자들은 대개 혼자이고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몇 시간이고 끝날 때까지 특정 프로그램이 아닌 텔레비전 그 자체를 본다.

방금 ‘특정 프로그램이 아닌’이라는 지적에 유의하자. 드라마 시청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대개는 “아, 그 드라마는 주제가 신선하고 색달라!”하면서 시청 소감을 피력하지만 실은 어느 드라마든 상관이 없다. 물론 특정 드라마는 높은 반향을 얻으며 그렇지 못한 드라마도 있다. 하지만 같은 시간대 드라마의 전체 시청률이 그리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 그대로다.

그래서 텔레비전은 ‘드라마 상자’라고 불린다. 드라마는 방송사에게 안정된 시청률을 보장하고 시청자에게는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철마다 프로그램 개편이 드라마 편수의 가감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드라마가 ‘텔레비전의 꽃’이라는 인식에 시청자나 방송사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다. 그런데 책이나 잡지의 소비자가 무엇을 읽을까 선택하고 영화 관객이 어느 영화를 볼까 선택하는 데 반해 텔레비전 드라마 시청자가 특정한 프로그램을 골라 보는 경우는 예상과는 달리 많지 않은 편이다.

드라마 중독, 그냥 습관적으로 볼 뿐…

드라마 시청이 전적으로 자유로운 활동이 아니라고 말한 셈이다. 비슷한 규모의 시청자들이 늘 드라마를 습관적으로 볼 따름이라고. 그러니까 드라마 중독은 텔레비전 중독의 하위 범주로 보아야 하며, 드라마 시청에서 중요한 변수는 각기 드라마의 질이나 내용이 아니라 연중 주중 중 어느 시간대냐 하는 점이다. 가장 시청률이 높은 때는 아무래도 겨울철 주말의 ‘황금 시간대’(프라임 타임)이다. 방송사마다 드라마의 편성 전략을 놓고 온 힘을 기울이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인데, 이는 시청자가 특정한 채널을 보기 시작하면 특별히 채널을 돌릴 이유가 없는 한 계속해서 같은 채널의 프로를 볼 것이라는 논리에 근거한다. 시청자는 자유 선택보다는 일종의 ‘관성의 법칙’을 따른다는 말이다.

이처럼 드라마 내용에 관계 없이 시청자 규모는 놀라운 정도로 고정되어 있다고 할 때,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는 진짜 이유는 ‘그게 거기 있기 때문’이다. 다만 최소한의 고통과 불쾌감으로 견딜만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지만 말이다. 때문에 드라마는 쟁점있는 내용물을 회피함으로써 최대 다수의 시청자들에게 먹혀 들어가도록 제작된다. 이에 수반되는 유명한 명제가 바로 ‘13세 정신력’이다. 즉, 13세 아동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면 누구에게나 이해된다는 가정이다. 그리고 이런 시청자를 중심으로 드라마 중독의 모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오랜 만에 가족이 용산가족공원에 나들이를 하고 밤늦게 돌아왔다. “아이고 <첫사랑> 못봐서 어쩌나?” 예의 냉소를 머금고 아내가 나에게 묻는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그래, 적어도 주말에는 집에 쳐박혀 텔레비전만 보지 말고 산책이나 합시다.” 짐짓 진지하게 응대한다. 텔레비전은 따뜻하고 친밀하게 느껴지지만 실은 스크린이 일으키는 환각에 불과하다, 그것은 시청자를 개인화 내지 내밀화시킨다, 그리하여 가족의 접촉에 장애가 되고 가족을 격리시킨다, 등등.

모처럼 부부가 교양 넘치는(?) 대화를 나누던 중 안방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왔다. 수신 상태가 나빠 어른거리는 화면인데도 그것을 아이는 턱까지 괴고 바라보고 있었다. “맙소사, 이런 걸 어떻게 보니? 고쳐 줄께” 하는 순간에 아이는 “손대지 마!” 하는, 단발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이는 가족의 비극인가, 아니면 가족 풍자극인가. 결국 내 아이는 엄마한테 실컷 얻어터지고 말았다. 그날 밤, 아이의 울음소리와 겹쳐 어느 젊은 시인의 싯귀가 떠올랐다.

저를 이렇게 길러주신 테레비님께 감사하며/어머니 테레비를 갖다 버릴까요 독서가 잘 안 되서 그러는데요/나는 요따위로 싸가지 없이 불효막심하게 말할 수도 없다/이제 나는 어버이날 테레비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련다/아버지처럼 소중한 나의 친구 테레비여.(함민복의 시

「텔레비전:오우가」 중에서)

김성기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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