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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청계천의 역사문화를 찾아서

참여연대365
작성자
활기차 차장
작성일
2013-10-15 17:13
조회
3307

 


[후기] 청계천의 역사문화를 찾아서



작성 시민참여팀 박효주



가을 햇살이 따사로이 비치던 지난 주말, 문화유산전문가 황평우 회원과 청계천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 떠났습니다.



청계천은 서울의 명소로 가족, 친구들과 나들이를 즐기는 공간이지만 실상 청계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청계천문화재위원으로 청계천 복원과정에 참여한 문화유산전문가 황평우 회원과 청계천을 거닐며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았습니다. 청계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개천에서 청계천으로 바뀌다


청계천은 일제 초(1910년대)까지 개천(開川)으로 불렸다. 실개천이던 것이 태종11년(1411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행한 준설공사로 직선화가 되었고 조선 최초의 석교인 광통교가 세워지며 개천에는 22개의 다리가 세워졌다. 도성에 86개의 다리 중 22개가 개천에 있었으니 개천의 중요도를 알 수 있다. 개천은 서울 도성의 배수기능을 한 내천이었던 것이다. 청계천이란 지명은 일제에 의해 "조선하천령"이 제정되면서 인왕산의 청풍계에서 흐르는 청풍계천(淸風溪川)을 줄여서 지어진 이름이다. 조선시대는 도성문화의 중심지로 답교놀이, 편싸움, 연등행사, 연날리기 등이 행해졌고, 서민과 거지들의 생활터전이었던 청계천을 단지 더럽다는 이유로 박정희 정권은 44년 전 환경에 대한 고민 없이 일방적인 지시로 청계천을 복개하고 만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행정이 50년 앞을 내다보지 못함을 증명하고 있는 큰 증거가 된다.


 

청계천의 그림자


청계천 주변에 높이 솟은 고층 빌딩은 부동산 이권 사업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청계천은 600년 도시의 배수구였으며 600년 도시생활사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곳이다. 600여 년을 인간들의 온갖 모습들의 잔류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 바로 청계천이다. 청계천에서 다양한 생활상들이 발굴되는 것에 가치를 알지 못했다. 더욱이 청계천 복원공사는 서울의 역사와 문화유산의 복원과 활용에 염두에 두지도 체계적인 문화재 지표조사나 장기적인 발굴조사도 선행되지 못한 채 이루어졌다.

 


청계천은 다시 복원되어야 한다


청계천의 22개 다리 중에 본래의 자리, 본래의 모습으로 역사가 복원된 것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이 청계천의 진실이다. 광통교는 제자리를 떠나버린 외로운 섬이 되어버렸고, 광통교 중건 공사 중에는 콘크리트 하수관로 때문에 몇 백 년 전해온 광통교의 바닥돌을 무단으로 깎아버렸고, 서울시는 호된 질책을 맞고는 하수관로를 이동시켰다. 중건한 광통교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화강암 조각의 기법을 다양하게 연구하고 소개할 수 있는 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미술사적 가치는 상실되어있다. 또한 조선시대 다리공사의 토목기법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있으며 800년경 확장된 광통교의 흔적을 살리지 못해 역사성마저 상실한 광통교가 되고 말았다.


청계천의 여러 다리 중에 가장 유명한 수표교는 조선시대 선왕들의 어진(御眞. 초상화)를 모신 영희전으로 가는 통로였다고 합니다. 설, 한식, 단오 등 명절 때마다 임금은 수표교를 건너 영희전으로 참배를 다녔습니다. 숙종이 영희전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어느 날, 수표교를 건너다가 여염집 문밖으로 왕의 행차를 바라보던 여인을 보고 한 눈에 반해 왕궁으로 들였는데, 바로 그 여인이 장희빈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수표교는 조선왕조 500년의 삶이요, 역사 그 자체입니다. 수표교 아래 돌기둥에는 '庚辰地平(경진지평)'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영조36년(1760)에 청계천을 준설한 후, 돌기둥에 세로로 庚(경)·辰(진)·地(지)·平(평)을 새겨 이후 개천을 준설할 때 표준으로 삼도록 한 것입니다. 특히 수표교 돌기둥은 마름모 모양으로, 다리에 전달되는 물의 압력을 최소화하고 홍수도 예방하려는 선조들의 놀라운 지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표교는 청계천이 아닌 장충단공원에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수표교는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와 시민과 호흡해야 한다고 황평우 소장은 강조합니다. 오간수문 역시 문화재위원회에서 발굴된 기초석들을 후대에 도성을 중건하는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원위치에 놓으라고 결정했으나 서울시가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우리가 역사탐방을 한 청계천은 조선의 중심인 한양의 도성궁궐과 함께 600년의 역사가 흐른 곳이었다. 그러나 청계천의 복원의 이면에는 개발이라는 진실이 숨겨졌다. 청계천이 고층빌딩의 인공어항으로 흐르고 있다는 현실을 인식하니 씁쓸해졌다.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