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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극복과 미국-3(분단극복 노력)

자유게시판
작성자
덕진
작성일
2020-07-08 14:09
조회
780

분단극복과 미국-3(분단극복 노력)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분단국가가 된 지 75 년이 훌쩍 넘었다.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지 않고 있어 언제라도 선전포고 없이 열전으로 바뀔 수도 있는 상태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여행할 수 없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북한이다.
오늘은 정전협정 이후 남북이 펼쳐온 분단극복 노력을 되돌아보자. 75년 동안의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자연히 분단극복의 장애물이 드러나고 그에 대한 대책이 보일 것이다. 본인은 전문가가 아니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따뜻한 지적을 기대한다.


 


가. 휴전협정 이후 6.15공동선언까지


 


1. 제네바 정치회담
   1953년 7월27일, UN군 측 대표와 북한군과 중공군 측 대표가 맺은 휴전협정 제4조 60항에는 “한반도에서 외국군 철수와 평화적 해결을 위해 고위정치회담을 열기로 건의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에 따라 1954년 4월26일 제네바에서 정치회담이 열리는데, 제1주제는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종료하는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이었고, 제2주제는 베트남 통일이었다.


제1주제 참가국은 한국 외에 UN참전국 15개국 대표와 북한, 중국, 소련의 19개국이었다. 한국 대표 변영태 외무장관은 ‘대한민국은 UN이 인정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다. 그러니 UN 감시 하에 북한에서만 자유선거를 해야 한다. 이때 UN군은 남고 중공군은 북한 땅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북한 대표는 “중립국 감시 아래 한반도 전체 자유선거를 하자”고 대응한다. 한·미 대 북·중·러 안이 접점을 찾지 못하고 대결하자 UN 참전국 대표들이 중재를 시도한다.

회담이 결렬되려 하자, 중국 외교부장 저우언라이가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에게 협상을 요구했으나 덜레스는 논의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회의는 종결된다.


 


2. 휴전협정에 따라 미군은 한반도에서 철군하게 되고 군사적 공백을 우려한 한국의 요청으로 1953년 10월1일 한미 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한다. 조약문은 전문과 6개 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속서류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가 있다.
* 조약문 제4조를 보면, 상호 합의에 의하여 결정된 바에 따라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주변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3. 1960년 대 이후 북한은 남한에 대하여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해오다가, 1980년 대 이후에는 평화협정 체결 요구 상대를 미국으로 바꾼다. 또한 남한에 대해 쌍방 군사력을 10만 명으로 감축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필요한 조치이면서 북한의 경제규모로 남한과 같은 국방비 예산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4. 1969년 7월, 미국은 Nixon Doctrine을 채택하고, 한국에 남북화해를 종용하며 주한미군 2만 명을 철수한다.
남북한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통해 자주 · 평화 · 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 원칙에 합의했다. 이후 남북 간에는 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 등 대화가 처음으로 성사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유신체제성립과 김대중 납치사건을 빌미로 대화를 단절하고, 곧바로 미뤄왔던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여 체제를 강화한다.


 


5. 1975년 11월18일, 제30차 UN총회에서 한반도평화통일 관련 결의안이 통과된다. 내용은 ① UN군 사령부 해체, ② 주한 외국군 철수, ③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 ④ 남북한 동등한 수준으로 군비 축소.
이 결의안은 아직도 이행된 게 하나도 없다.


 


6. 1984년 북한은 남한의 수해복구를 위한 원조불자를 보낸다.


 


7. 민정이양과 한반도비핵화 선언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를 쟁취한 결과로 1988년 2월 노태우 정부가 공식 출범한다.

1985년 소련의 개혁개방 선언 이후, 1989년 12월 몰타에서 레이건 미 대통령과 고르바쵸프 소련 수상이 냉전 종식선언을 한 영향으로, 1988년 7월7일, 노태우 대통령이 ‘7.7선언’을 발표한다. 이의 정식명칭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이후 남북관계는 크게 변화한다.

1991년 9월17일, 남북한이 동시에 UN가입.

1991년 12월18일, 노태우 남한에 비핵화 선언. (북한은 미국이 1957년 남한에 핵무기를 반입한 이래 줄기차게 한반도의 비핵화를 주장했다)

1991년 12월31일, 남북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합의.


 


8. 1994년 7월8일, 스위스 Geneve에서 북한의 핵동결을 위한 북미회담이 개최되어 성사된다.
이는 북한이 IAEA의 핵사찰을 거부하고 미국계 한국인 2명을 체포하여 간첩혐의로 중형을 과하자, 북미관계가 악화되고, 전쟁 위험이 다가왔다. 이에 재미 학자 박한식의 중재로 미국의 전 대통령 카터가 평양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과 만난 결과다.

1994년 10월21일, 북한의 핵무기 포기를 위한 ‘북·미간 제네바 합의문’ 조인된다. 합의문은 북한의 핵무기 포기에 대한 보상으로 북·미 관계 개선과 북한에 경수로 2기와 중유 등을 제공하기로 한다.

카터와 김일성 회담에서는 Geneve 북미회담 성사 외에 남북한 정상회담이 합의된다.


● 2002년 1월29일, 미국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축’으로 지목하고, 선전포고 없이 핵타격도 가능하다고 언급하고, 1994년 북미 제네바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한다.


 


9. 1994년 7월9일, 북한주석 김일성이 사망한다. 7월25일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기대에 부풀었던 김영삼 대통령은 실망이 컸는지, 대북 조문사절도 거부한다. 이에 비해 미국은 조문사절을 보내 미국 대통령의 조문편지를 전한다.


 


나. 6.15공동선언 이후


 


1. 1998년 10월, 대규모 소떼를 몰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북한을 방문하고 김정일을 만나, 남북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한다.


 


2. 금강산관광은 1998년 11월16일, 현대아산그룹의 주도로 해로를 통하여 시작하여, 2003년 9월 육로관광이 시작되고, 이후 2007년 내금강까지 확대하고 개성관광이 시작된다.
2008년 7월11일, 관광객 1명이 북한 경비병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명박 정권은 사업 전체를 중단시킨다.


 


3. 2000년 6월15일,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분단 55년 만에 처음 만나 회담을 하고, 6.15공동선언을 발표한다. 내용은 통일의 3대 원칙으로 자주통일, 경제협력, 남과 북의 통일 방안이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선언한다. 이 선언의 결과로 대규모 비료와 식량 대북지원이 성사되는 등 햇볕정책이 시행된다.
북한은 이 협정을 최고인민회의의 비준 동의를 거쳐 국가정책으로 확정했으나, 남한은 아직도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4. 개성공단은 2004년 6월 착공식을 갖고, 2004년 12월15일에 첫 제품을 생산했다. 2007년 100만 평부지 1단계사업이 마무리 되어 125개 기업이 가동 중이었다. 개성공단 교역액은 2004년에 4천만 달러에 불과하던 것이 2012년에는 19억5천만 달러에 이르러 2013년 현재 남북교역액에서 99.7%를 차지했다.


2008년 ‘비핵개방3000’을 정책으로 내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개성공단의 시련이 시작된다. 기숙사문제를 비롯해 시급히 풀어야 할 현안들이 방치되더니, 2010년 5.24조치를 발표하여 남북관계를 전면 중단시켰다.
2016년 2월10일,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 전면 폐쇄를 명령한다. 이유는 1월6일 4차 핵실험과 2월7일 장거리 미사일 발사였다. 개성공단에서 북한 노무자들에 지급되는 임금이 북한의 국방비로 전용되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당시 개성공단 근로자의 월평균임금은 60시간 근로에 129달러(15만 원)였다(JTBC뉴스).


 


5. 2005년 9월19일, 베이징의 제4차 <6자회담공동선언>에서 북한은 미국이 체제를 인정하고 무력으로 침공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해주면 ‘핵 포기’를 하겠다고 명확히 선언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위조지폐 발행‘ 등 석연치 않은 이유로 북한의 BDA은행 계좌를 동결하는 등 제재를 강화하여 이 선언을 파기한다.


 


6. 2007년 평양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3일 간의 정상회담 끝에 ‘10.4남북공동선언’을 한다. 주요 내용은 6.15공동선언의 적극 구현, 상호존중과 신뢰의 남북관계로의 전환, 군사적 적대관계 종식, 한반도 핵문제 해결을 위한 3자,4자회담 추진, 남북경제협력사업의 활성화, 사회문화 분야 교류와 협력, 이산가족 상봉 확대 등이다.


 


7.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하므로 얼어붙었던 남북관계가 대화로 전환된다.
2018년 4월27일 판문점회담과 9월19평양회담 2차례 남북이 정상회담을 가졌고, 문재인 대통령의 주선으로 북미정상회담도 3차례나 열렸다; 제1차 싱가포르회담(2018. 6.12), 제2차 하노이회담(201


9. 2.27), 제3차 판문점회담(2019. 6.29).
그러나 북미정상회담은 아직 성과가 없다. 단계적 대북제재 완화와 종전선언을 요구하는 북한에 대해, 리비아식 선비핵화 이후 제재완화를 주장하는 미국 측이 접점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노이회담의 경우 북한은 싱가포르회담 때 미국과 한 약속한 대로 핵포기의 증거로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하고, 영변 핵시설을 무력화시키고, 동창리 미사일발사장도 제거했다. 그 위에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을 요구하는 대신, 미국이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5가지만이라도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 마저도 거부하여 공동선언문도 채택하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8.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에 대한 법적 근거는 한미 SOFA 제5조에 근거하는데, 이 규정은 ‘한국정부가 제공하는 시설과 구역 외 모든 비용은 미국이 부담한다 ’라고 되어있다.  따라서 문제의 방위비 분담금은 예외적 조치에 해당한다.
이 예외적인 조치, 특별협정이 체결되기 전 초기에는 1989년 한미연례안보회의에서 4,500만 달러를 지불하기 시작했고, 1991년 1차 특별회의에서 1,073억 원에서 그 액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2019년에 1조389억 원에 이르렀다.

그런데 올해 미국 측은 50억 달러를 요구하다가 40억 달러(4조9,500억 원)로 깍아 주고 요지부동이다. 1년 만에 380% 인상을 요구하는 꼴이다.


 


9.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때 북한은 OCA회원국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당시 북한의 미녀 응원단과 국기계양 및 국가연주는 국민들에게 신선한 변화를 느끼게 했다.


 


10. 2019년 1월23일, 북한에 독감치료제 타미플루를 싣고가는 인도적 지원차량을 미국이 통과하지 못하게 막는 사태가 발생했다. 2019년 6월에는 금강산에서 열리는 6.15기념 남북공동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금강산을 가는 남측대표들의 카메라와 노트북을 압수하는 일이 벌어진다. 전략물자 반출금지가 목적이라는데, 의도적인 남북교류를 방지한다는 비판도 있다.


 


11. 한미연합훈련이란 매년 8~9월에 하는 을지프리덤가이던스(UFG), 키리졸브(KR), 독수리연습(FE) 등이 있다. 북한은 이를 매우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이를 빌미로 괌이나 일본에서 핵폭격기, 핵항모, 핵잠수함 등이 한반도로 오기 때문이다. 아직 종전선언도 못한 상태에서 이들 핵공격 무기들이 접근하는 터라 두렵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휴전협정 위반이기 이전에 UN헌장 위반이다.


 


다. 마치는 말


 


1. 도올 김용옥이나 재미학자 박한식은 북한은 공산국가가 아니라 주체사상국가라고 한다. 주체사상이란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군사 등의 모든 분야를 규정 지배하는 통치이념이다. 쉽게 말하면 자주적 입장을 견지하기 위한 지도적 지침으로 정치에서 자주(自主), 경제에서 자립(自立), 국방에서 자위(自衛), 사상에서 주체(主體)를 일컫는다. 다시 말하면 원리가 사람중심철학이고, 사회, 역사 원리로서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니 이들이 주인다운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원리다.


 


2. 북한 핵폐기의 수단으로 등장하는 CVID(Complete Verifiable and Irreversible Dismantlement)는 우리말로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의 준말이다.
이는 2003년 8월27일 제6차회담에서 미국이 제안했으나, 북한이 반발하여 철회하고 2004년부터는 포괄적비핵화(Comprehensive Denuclearization)로 대체되었다.


 


3. 2020년 6월16일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다. 2018년 4월27일 남북정상회담의 판문점 선언에 따라 그해 9월에 문을 연 상징적 건물이 사라진 것이다.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이 담화문을 통해 남한이 “한미 실무그룹이라는 것을 덥석 받아 물고  사사건건 북남관계의 모든 문제를 백악관에 섬겨 받쳐왔다”고 주장한 바 있다고 비난한지 12 일만이다.


이에 앞서 자난 1월, 경실련통일협의회는 남북관계 전환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어 “남북관계 복원을 가로 막는 한-미워킹그룹을 즉각 폐쇄하고,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워킹그룹을 설치하라”고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4.27판문점 선언 2주년을 맞아 “한반도 운명의 주인은 우리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않으면 길이 열리기 마련”이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7월2일 최근 폐지론이 일고 있는 한-미워킹그룹과 관련해 “한-미가 최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어떻게 운영방식을 개선할지 논의했다”고 밝혔다.


 


4. 요즘 ‘죤 볼턴의 회고록’이 화제다. 나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으나, 읽어본 사람들의 얘기는 분노를 넘어 참혹함을 느낀단다. 미국 네오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계전략, 한반도 8천만 동포들의 생존권을 무시하는 비도덕성, 거짓으로 비하하는 남북한 지도자 폄하하기 등. 그런데 이 나라 보수언론과 제1야당을 이 책을 근거로 문재인 대통령을 공격하는데 활용한단다.


5. 남북관계의 목표는 현재 평화정착이다. 북한의 ‘핵 폐기’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면 북한의 ‘핵 폐기’는 어떻게 이룰 것인가? 이는 북한이 핵보유를 안 해도 될 때 가능하다. 그러려면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핵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종전선언을 하고, 북한을 나라로 인정하고 수교가 이루어지면 될 것이다.
2020. 07. 08,    맹   행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