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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역사적 상황과 세월호, 삼풍백화점참사

자유게시판
작성자
유동훈
작성일
2017-07-21 14:39
조회
297

-촌평- 역사적 상황과 세월호, 삼풍백화점참사


 


 


우리사회의 커다란 사건이자 참사인 세월호참사와 삼풍백화점참사를


한번 돌이켜 보았다.


 


일본은 건축학과 지진학 등 건물붕괴에 관련된 기술이 매우 발달 되었다.


 


먼저 삼풍백화점참사다.


때는 김영삼 문민정부시절이다.


1993년 2월 문민정부출범 직후에 김영삼정부는 일제잔재청산과 군부독재청산이란


커다란 역사적 혁명을 내걸었다.


 


93년6월 친일세력 박정희육군소장의 ‘5.16군사정변’을 ‘군사쿠데타’라 정의를 내렸고


95년 8월엔 일제의 잔재인 국민학교란 명칭을 순수한 우리말인 초등학교라 명명 하였다.


96년 5월엔 일본에게 치명타인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와 오키섬 중간부분을 EEZ


경계선포를 한다.


96년 일제총독부건물 중앙청 철거작업이 있었으며


문민정부시절 내내 우리나라 금수강산 곳곳에 박혀 있는 일제쇠말뚝을 뽑아내는 큰 일도


해낸다.


 


문민정부시절엔 큰 사건이 유독 많았다.


94년 성수대교붕괴, 아현동도시가스폭발, 95년 삼풍백화점붕괴,대구지하철가스폭발,


시프린스침몰 등등....


 


이러한 많은 사건들중에 삼풍백화점참사를 살펴보면 세월호참사와 아주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삼풍백화점은 95년 6월29일 붕괴되었지만 이미 한참 수개월 전부터 건물붕괴의


전조짐과 징후가 있어왔다. 이미 한참 오래전에 충분히 예견된 참사였던 것이다.


 


세월호 역시 배의 안전생명인 선박균형평형수를 대폭 축소하고 일본으로 수입한 낡은 배를 무리하게 마구 증축하고 정원을 초과했으며 무리한 운항을 거듭해 왔다.


이런 면에서 충분히 예견 된 참사이다.


 


삼풍백화점과 세월호 두 참사 역시 사고 당시 상황도 아주 유사하다.


 


삼풍백화점붕괴 당시 백화점경영진만 유유히 빠져 나올뿐, 수십여 명의 경영진과 관계자들은 어느 누구도 백화점손님들과 종업원의 피신을 지시하거나 유도 하질 않는다.


백화점손님들과 종업원은 죽든지 말든지 알게 아니란 식으로 경영진 그들만 건물붕괴가


일어나는 조짐이 분명한 가운데 붕괴직전 유유히 건물에서 빠져 나온다.


 


세월호참사 역시 배의 승무원들은 배가 침몰해 나가는데 승객들에겐


가만히 그 자리에 있으란 지시를 남겨 놓고 배의 승무원들만 유유히 빠져 나온다.


더구나 그들중엔 배가 침몰하고 있는 긴박한 와중에도 승객들은 내버려 둔 채


선실의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까지 꺼내 마시는 여유까지 있었다.


 


세월호참사는 박근혜정권이 출범직후부터 친중국정책을 펴면서 6.25중국군전사자유해송환,


한중자유무역협정실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B)가입, 한중간 문화공동위원회 설치운영


중국전승절행사참석 등등의 친중국정책이 사드도입배치 이전까지 진행된 환경하에서


벌어진 참사였다.


 


일제청산의 주역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일본제국에겐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 였을 것이다


친중국정책을 펴는 박근혜는 역시 일본제국은 당연히 싫어 했을 것이다.


 


삼풍백화점참사는 1440여명이 죽거나 다쳤고 세월호참사의 희생자 수는 304명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