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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 날

자유게시판
작성자
김수길
작성일
2001-10-27 05:36
조회
4775
아침부터 새침하게 흐린 날이다.

거리는 희부연 안개, 혹은 매연 속에 묻혔는데, 노란 은행나무가 불켜진 가로등처럼 훤하고, 감나무 붉게 익은 감들이 역시 붉게 물든 이파리 사이로 수줍은 듯 드러났다.

가을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시월 마지막 금요일이다.

안국동 가는 길이 수월했다.

타야 할 전철은 기다릴 필요도 없이 내 앞에 서 주었고, 붐비지 않은 차안에서는 자리 찾느라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되었다.

사무실 도착 시간도 여유 있었다.

마침 깨끗하게 빤 걸레를 건네 받아 책상과 의자를 말끔하게 닦으니 상쾌하다.

동료와 나란히 앉아 나누는 차 향이 그윽하게 퍼진다.

전화소리, 찾아오는 사람들, 오가는 간사들, 여느 날과 똑같은 정경이지만 무심해지지 않는다.

그간에 있었던 크고 작은 부대낌도 잠깐씩 스쳐 간다. 기쁜 일은 무엇이었던가.

계단을 오르면서도, 길을 건너면서도, 차를 타고서도 그칠 줄 모르는 이야기는 생각의 실타래 풀기이다. 낯선 만큼 열중한 일이다.

오전 시간은 짧았다. 요란스러운 일없이 평탄했다.

지난밤에 모기 때문에 잠을 설쳤다는 동료는 손바닥에 지압 효과 반창고를 붙이고서 피곤하다는 몇 사람에게도 즉석 조치를 해주었다.

그때에 가방에서 꺼내 놓은 비단 주머니, 그 안에는 또 무엇이 들어 있을까.

다른 사람의 손을 다루는 솜씨가 꽤 익숙해 보였다. 그녀에게는 무언가 남다른 데가 많이 있을 것 같다.

새 주방장을 맞은 '느티나무'에서 점심으로 먹은 생선가스, 일본 음식처럼 깔끔하고 모양 좋게 담아준다.

오늘따라 집에 지갑을 빠트리고 나와 수중에 달랑 전철표 한 장 있고,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 신세였다,

누구에게 사정 이야기도 못하고 외상 그을 생각하는데 대신 밥값 내주는 사람이 있다. 역시 수호천사가 옆에 있는 날이다.

덥수룩한 머리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셔츠를 입고 주전자 하나 들고 황량한 벌판을 걸어가는 아프가니스탄 어린이 뒷모습을 찍은 사진.

말없는 사진 한 장을 두고 이야기를 하다 밥상머리에서 모두 눈물을 훔쳤다.

회원 게시판에도 올려진 그 사진을 보면서 한 마음임을 읽는다.

집에 오는 길에는 육교가 사라진 큰길을 건너 인사동 '노화랑'으로 갔다.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장욱진의 그림 전시회가 열렸다.

각 화가의 작품 몇 점씩을 볼 수 있는 작은 전시회이다.

그러나 전시회 '한국인의 꿈과 낭만'에서 느끼는 감동이 진하다.

"대상을 정확히 묘사하려는 집착도 자신의 울분을 토해내려는 격렬함도 없다. 또 남에게 과시하려는 욕심도 계몽하려는 구호도 보이지 않는다. 선이 있으나 기교가 없고, 색이 있으나 튀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저 무심히 무언가를 할 뿐이다."

노점에서 생선을 살 때, 한 사람에게서 사지 못하고 여러 사람에게 한 마리씩 샀다는 박수근 화백의 그림에 대한 해설이다.

화백의 따뜻한 마음이 그의 정감 있는 그림에서 그대로 전해와 마음에 잔잔한 물결이 된다.

전시회장에 들어올 때 문득, 반으로 접어 수첩에 끼워둔 만 원짜리 지폐가 생각났다.

인사동 어디에 가서 분위기 있게 저녁 시간을 보내며 마감할 수 있을까.

잠시 망설이다가 전시회 그림이 실린 책을 두 권 샀다.

화랑 직원은 책을 건네주면서 "비상금을 크게 쓰시네요." 한다.

'어머, 내 이야기 들었어요?" 하고 놀라 물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말 거드는 것이 기분 좋았다.

돈 없이도 굶지 않고 지냈고, 나중에는 나누어 쓰고도 남기기까지 했으니 어느 날보다도 부자 같다.

벌써 불밝힌 거리를 걸으며 가까워도 자주 한가롭게 찾지 못했던 시간들을 아쉬워했다.

2001.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