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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의 배경

자유게시판
작성자
덕진
작성일
2013-05-05 14:01
조회
3979

제주4.3사건

영화 지슬(감자)의 시대적 배경

 

제주 4.3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 ‘지슬’이 관객 13만 명을 넘어섰단다. 이제까지 이 나라의 역사책에서 철저히 감춰지고 지워진 부분이라 대부분의 국민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건이다. 관심 있는 분들에게 이 사건의 배경을 참고로 전해주고자 한다.

 

 

제주도의 슬픈 역사와 저항의식

 

1271.5;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도에서 패퇴한 삼별초군은 탐라로 근거지를 옮겨 2년간 원에 저항하다가, 1273.5;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에 완전히 진압된다. 원은 탐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직접 지배함.

 

1898.2.7(방성칠의 난); 동학농민전쟁 때 제주도로 피신하여 화전민으로 살던 방성칠과 남학교(南學敎)도 들이 과도한 세금에 항의하다가 일으킨 사건.

민란 초기 제주도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30일 만에 실패.

1901. 5.6(이재수의 난); 천주교의 교세 확장과 이에 따른 폐단, 정부의 조세수탈에 대한 불만 등에 의해 촉발된 사건. 1900년을 전후하여 특권세력화한 천주교는 조선의 고유한 가치체계나 토착종교 등을 교리에 위배된다고 전면 부정하는데, 제주에서 천주교 입교자 대부분이 1898년 농민항쟁 당시 농민군을 토벌하던 토착양반 세력이나 제주도에 귀양 온 사람들이라는 게 갈등의 주요 요인. 프랑스제국을 등에 업은 신부는 성전을 선포하고 싸움은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프랑스 전함 2척이 현지로 출동하는 시태에 이름.

지도부 40여 명이 사울로 압송되고, 3 명이 서대문 밖에서 교수형이 처해짐.

반외세‧반봉건 민중항쟁이었다.

 

1926년; 중국침략을 준비하던 일제는 서해안에 알뜨르 비행장 등 군사시설을 건설. 난징 폭격 때 폭격기가 이곳에서 발진.

1943년 이후;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어려워지자 일본군은 제주도를 본토 방어기지로 삼아 해안선 및 오름에 대규모 땅굴 100여 곳을 판다. 가마오름 진지 동굴 같은 곳은 길이가 2000M, 출입구 33곳, 견고한 3층 구조.

제주도민이 무차별 동원되어 노동력을 착취당함.

 

사건의 전개

 

1945. 9.6; 건국준비(위)는 서울에서 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

1945. 9.10; 제주 건국준비(위)를 발족하고, 22일 인민위원회로 개명. 도인민원회 간부는 항일독립운동가와 신망 있는 사람이 많음.

1945. 11.10; 제주도 도청건물에 미군정청 설립. 미군정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와 경찰을 다시 그 자리에 앉혀 민중을 크게 실망시킴.

 

1947. 3.1 ; 3.1절 기념행사식장 관덕정에서 총격사고 발생하여,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음.

* 기마경관인 탄 말에 어린 아이가 채었는데 경관이 그냥 지나가자 옆에 있던 군중이 기마경관에 돌을 던짐으로 촉발. 그리고 경찰의 조준사격으로 사상자 발생.

미군정은 제주도에 야간통행금지 조치를 내리고, 3.1절 기념대회준비위원을 검거. 이에 맞서 도민은 민간 총파업으로 맞섬. 이에 따라 미군정과 도인민위원회가 갈등.

* 이들은 기념식장에서 “3.1정신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건설하자”라고 역설했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육지에서 응원경찰이 증파되고, 이승만 대통령은 ‘서북청년단’을 보냄. 경찰이 체포한 사람들이 고문으로 잇따라 즉음에 이르자 민심이 크게 흔들리고 일부는 산으로 들어가 무장항쟁을 준비함.

 

1948. 4. 3 ; 무장대가 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

이들의 구호는 “탄압하면 일어선다” 또한 요구사항은 ‘남한 단독 선거 반대’ ‘구속된 애국지사 석방’ ‘주한미군 철수’였음.

1948. 4. 28; 김익렬 9연대장은 현장조사결과 현 사태는 경찰지원을 받은 서북청년단 등 우익청년단체들의 잘못된 행동의 결과라고 판단하고, 평화협상을 주도하였으나, 미군정이 김익렬은 해임하고, 후임에 연대장 송요찬, 부연대장 서종철을 임명하고, 무장단체를 강경진압함.

1948. 10.19; 여수-순천사건 발발. 제주도에 투입되기 위해 여수에서 대기하던 14연대가 반란.

이들은 후에 지리산 빨지산의 주력이 됨.

 

* 제주도에 투입된 군경은 초토화 작전을 펼침; 이는 일본군이 중국과 만주에서 항일유격대를 토벌하면서 쓴 작전으로 악명이 높은데, 만일 유격대가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묵인하거나 그들을 숨겨주고 몰래 지원하면 남녀노소 기릴 것 없이 주민을 모두 죽이고 집을 불태워 말 그대로 마을을 ‘초토화’ 시키는 것이다. 이 작전은 근대전에서 국제법상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어 이런 명령을 한 지휘관은 비전투원을 학살했다는 죄목으로 전범으로 처벌받게 되어있다.

 

1948. 5.10; 남한 단독 선거를 제주도민은 거부(미국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한다는 안을 내놓아 UN총회에서 통과시킴)

 

1950. 6.25; 전쟁이 터지자.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입산자 가족과 보도연맹에 들어간 마을 주민들을 집단 학살함(총살 또는 정방폭포 같은 바다에 수장)

 

1960. 4. 19 이후; 4.19혁명 후에 정권이 바뀌자, 살아남은 후손들이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를 마을 마다 세움. 이는 ‘여러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 묻힌 무덤’이라는 뜻. 어느 것이 자기 조상의 무덤인지 모르므로, 후손들은 마땅히 이 모두를 자기 조상의 묘처럼 받들라‘는 뜻이 담겨있다.

1961. 5. 16 이후; 군사정부는 ‘백조일손지묘’를 없애고 비석을 파괴해 버림. 나아가 공동묘역 해체명령을 내리는 등 초강수로 역사를 가리려 함.

 

2000. 1월; 김대중 정부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공포,

2002. 4월 이후; 주민들이 백조일손지묘를 다시 세워 현재 132개소에 이름. 한 비문의 예 “132 뼈가 엉켜 한 자손이 됩니다”

2003. 10; 정부는 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국가 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

2006. 4. 3; 노무현 대통령이 위령제에 직접 참석하고, 재차 사과함.

2012. 12. 11; 박근혜 대통령 후보는 제주도를 방문해 “4.3은 제주도민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가슴 아파하는 사건이므로 그동안 정부의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부족했다. 국가 추모 기념일 제정을 비롯해 제주도민들의 아픔이 가실 때까지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약속.

 

참고사항

* 피살자 수 제주도민의 1/10인 약 30,000명으로 추산.

현재 파악된 자료에 의하면 이들 중 10세 이하 어린이와 부녀자가 각각 약 6~7%.

* 마을 주민들이 집단 학살을 피해 살던 동굴들.

^ 다랑쉬굴; 육군 9연대 2대대가 피신해 있던 마을 주민들의 인적을 발견하고, 야생 오소리나 너구리를 잡을 때 쓰는 방법으로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로 모두 질식사 시킨 현장임.

노태우 정권은 다랑쉬굴에서 수습한 유골을 유족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화장한 후 바다에 뿌리고, 나아가 당랑쉬굴 입구를 중장비로 밀어버려 흔적을 없애버림. 이는 다랑쉬굴이 역사의 흔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 때문으로 풀이됨.

^ 큰넓게; 영화 지슬의 배경

 

* 당시 9연대장 송요찬(후에 국무총리), 9연대 부연대장 서종철(후에 국방장관)을 비롯해 경찰간부와 서북청년단 요원의 공통점은 일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거나 친일한 경력의 소유자이고 후에 정권에 의해 출세한 자들임.

* 여수-순천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숙군작업에서 박정희는 남로당 비밀 당원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구속되었다가, 남로당 가입 군인들의 비밀 명단을 넘겨주고 혼자 살아남아 석방됨.

* 2009년 이명박 정부에서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이 된 이영조는 2010년 미국에서 발표한 ‘한국 과거사 정리 성과와 의의’라는 영어논문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a popular revolt'(민중반란)으로 표기하고, ‘제주 4.3항쟁’을 ‘communist-led rebellion'(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으로 표기하므로 기존 과거사를 부정함.

* 타이완 총통부 건너를 비롯해 타이완의 주요 도시 주변 여러 곳에는 ‘2.28사건의 희생자를 기리는 ’백색공포정치 수난자 기념비‘가 서있다.

1947년 2월27일 전매품인 담배를 팔던 여성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이 사건은 ’외성인‘이 원주민인 ’내성인‘을 과잉진압하면서 28일에는 타이페이시 전역으로, 그 이후에는 타이완 섬 전역으로 확대되어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987년까지 40년간 이어진 ’백색공포‘로 희생된 사람은 최대 2만8천명으로 추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