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기타(od) 2004-07-30   5438

<안국동 窓> 야스쿠니 신사란 무엇인가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2차대전을 일으킨 전범 7명을 합장하고, 역대 일본수상들의 참배 문제로 늘 외교문제가 되어온 바로 그 신사다. 야스쿠니 신사참배는 일본이 과연 일련의 침략전쟁, 그 중에서도 2차대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이웃 국가를 침공한 것에 대하여 과연 반성과 사죄의 뜻을 갖고 있는가, 그리고 일본의 재무장화에 대해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상징적 의미를 띤 곳이 야스쿠니 신사다. 우리도 방문하면 마치 신사참배라도 한 양 찜찜한 느낌이 들어, 아예 가기를 기피하는 곳이기도 하다.

누가 야스쿠니 신사에 묻혀 있는가. 야스쿠니 신사의 유래는 명치유신기의 막부타도전쟁 중에 죽은 국가의 원혼들을 추모하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명치유신 시작기의 전몰자수가 4751주, 서남전쟁 기타 내란에서 죽은 자 6971주다. 이것이 국가통합과 근대화를 치달리는 과정에서 치러진 일본내의 천황측의 희생자에 해당한다. 일청전쟁에서의 전몰자가 13619주, 일로전쟁에서의 전몰자가 88429주, 더 범위를 넓혀 1차대전에서의 전몰자는 4850주이다. 직접 전쟁을 일으켰던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의 희생자가 2,342,236주이다. 그리하여 총 2,466,427주의 전몰자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合祀)되고 있다.

합사된 자들이 국가 차원에서의 전쟁에 참전하여 희생한 자를 모신 것이라면 다른 나라의 국립묘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문제는 A급 전범으로 처형된 자들이 1970년대 초에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것이다. 도오죠오 히데키를 비롯한 14인이다. 그 가운데는 육군대신, 외무대신, 남만주철도회사총재, 그리고 법률가 출신으로 치안유지법의 제정과 악화에 앞장섰던 히라누마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의 합사를 둘러싼 국제적 논쟁 때문에, 이들을 다른 장소로 분리 합사하자는 주장도 없는 것은 아니나, 이들의 합사 자체를 우익은 매우 중시하고 있다고 한다.

야스쿠니 신사의 규모는 장대했다. 위치부터 황궁의 옆에 있으며, 천황이 직접 야스쿠니 신사를 위한 기부를 했다. 다른 신사보다 정문도 크고, 외정문 속에 내정문이 있다. 가판대가 죽 늘어섰고 도처에 일본우익들의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요지는 총리대신이 8월 15일 패전일, 그 날에 직접 참배하라는 주장이다. 외국을 의식하여 참배하면서도 8월 15일 날짜는 피해간 역대 총리에 대해 더더욱 직설적인 주문을 내거는 것이다.

신사 앞에는 여러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명치기 막부세력을 깨는 데 앞장선 大村益次郞이 칼과 망원경을 들고 강렬하게 노려보는 동상,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의 승리의 부조들, 그리고 러일전쟁의 영웅들의 동상이 여기저기 있다. 동상의 대부분은 미군정(GHQ)에 의해, 탈군국주의화의 일환으로 파괴되었고 남아있는 것은 몇 안된다고 한다. 신사 건물의 좌측으로 돌아가니 임진왜란 때 함경도 길주 쪽에서 의병장 정문부 측이 가또오 군대를 쳐부수고 세웠던 북관대첩비를 약탈해와서 전시해놓았다. 자기들이 졌던 전쟁기억을 한국인으로부터 빼앗아버리고 그것을 노획해옴으로써 또다른 승리의 과시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오른쪽에는 군견, 전몰마, 심지어 비둘기 위령상까지 세워놓았다.

가장 압권은 신사 옆에 세워진 전시관, 이름하여 <유취관(遊就館)>이다. 일본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꽉 차 있다. 한국병합에 대한 설명. “익 43년(1910년) 신임의 테라우찌 통감이 이완용 총리와 회견, 조약안이 협의되었다. 한국정부에는 22일에 각료를 포함한 어전회의에서 조약안을 승인·재가하고, 그 날 한국합병의 조약이 조인되었다”. 그야말로 평화조약이나 체결된 듯한 뉘앙스로 쓰고 있고, 조약의 당사자로서 테라우찌와 이완용의 사진을 나란히 전시해놓았다. 만주를 침략하여 일본의 괴뢰국을 건설한 “만주국 건국”사실은 “만주민족의 故地 만주에 五族協和의 신국가 건설”로 서술한다. A Confederation of five ethnic groups establishes a new state in Manchuria라 한 것을 보면, 마치 여러 나라들이 마음을 합하여 U.N.이라도 만든 듯한 설명이다.

남경침략과 대학살에 대한 설명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우선 ‘침략’이란 말을 쓰지 않고 ‘남경공략작전’이라 명명한다. “중국의 전쟁의지를 좌절시킬 목적으로 수도 남경을 포위공략한 작전. 일본군의 開城 권고를 거부한 방위사령관 당생지가, 부대에 고수를 명하고 스스로는 도주했기에 전투가 시작되어도 지휘관을 상실한 장병은 궤주 또는 투항하여 괴멸. 남경성은 12월 13일에 함락했다”고 한다. 마치 중국인의 ‘전쟁의지’가 문제있는 양, 일본군의 개성‘권고’를 거부한 것이 문제인 양 묘사한데다, 중국군 사령관의 비겁함을 부각시켜 자신들의 침략책임을 하나의 작전처럼 중립화시키고 있다. 남경학살 역시 중립화시켜 ‘남경사건’으로 명명한다. ”남경을 포위한 松井 사령관은, 예하부대에 외국권익 및 난민구를 朱書한 要圖를 배포하여 「엄정한 軍規, 불법행위의 絶無」를 시달했다. 패배한 중국군 장병은 퇴로의 下關에 쇄도하여 섬멸되었다. 시내에는 사복으로 입은 편의대로 된 패잔병의 적발이 행해졌지만, 남경성내에는 일반시민의 생활에 평화가 도래했다.“ 희한한 설명이다. 시민들이 도륙당한 게 거의 100만에 이른다는 남경학살을 이렇게 엄정한 군규에 따라 불법행위가 없었고, 시민생활은 평화로왔다고 묘사하고 있다니. 『새로운 일본사』에도 이 부분을 학살자 수에 대해 논란이 있다고 쓰고 있는 정도이니, 우익사가들의 입장을 알 만하다.

동남아 침략에 대하여는 대동아공동선언(Great East Asian Joint Declaration)을 하고 유럽제국주의를 물리쳤으며, 그로 인해 동남아 각국의 독립에 이바지했다는 설명으로 채워져 있다. 전쟁책임에 대하여는 일본의 전쟁책임을 부인한 소수의견만 전시해놓고 있다. 마지막 전시장에는 전몰자들의 영정사진들이 죽 나열되어 있는데, 마지막 부분은 비워두고 있다. 국가를 위한 새로운 전몰자를 위한 자리인 듯 했다.

기념품 점에는 그런 목적에 맞는 책 이름이 잔뜩 있다. 일부 본 것으로는 <침략의 세계사>(‘지난 500년, 백인은 세계에 무엇을 했던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팔 판사의 일본무죄론>(전중정명저), <야스쿠니신사에의 저주스런 속박(呪縛)을 풀어라> 등이 있다. 가장 자극적인 제목으로 <친일파를 위한 변명>도 있었다. 일본 우익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야스쿠니 신사이며, 여기서 전전의 침략의 미화작업들이 유취관이란 전시관과 저작들을 통해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잘 디자인된 전시관에서의 전시를 보고난 뒤 관객의 반응은 어떨까. 일부 방명록을 들춰봤다. Miller라는 작자의 글이 들어왔다. 일본어로 쓰여져 있다.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역사를 이해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일본에는 일본의 역사가 있다. 나에겐 이 역사와 야스쿠니 신사를 지켜야 한다.” 이렇게 오늘도 침략정당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으며, 야스쿠니신사는 그 정신적 대본영인 셈이다. 국가주의, 침략주의의 저지를 위해 한·일은 물론 동아시아 지식인의 연대가 절실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사법감시센터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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