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기타(od) 2007-07-09   2419

<안국동窓> 사학법 개악과 열린우리당의 죽음

열린우리당은 2003년 11월 11일 창당했다. 민주당의 소수파였던 ‘친노세력’이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민주당을 박차고 나와서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민주당의 다수파에 의해 계속 ‘왕따’를 당했다. 박상천, 한화갑 등으로 대표되는 호남세력이 자신들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후계자로 자처하며 부산 출신의 노무현 대통령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른바 ‘노풍’을 일으키며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뒤에도 민주당의 다수파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이러한 ‘왕따’를 중단하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열린우리당의 창당은 필연적이었다.

2002년 12월 19일의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됨으로써 민주당의 ‘소수파’는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들은 16대 총선을 앞두고 지역주의의 타파를 내걸고 민주당에서 나와서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여기에는 이부영과 같은 한나라당의 일부 ‘개혁파’도 가세했다. 그리고 2004년 3월, ‘배신감’에 사로잡힌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손을 잡고 ‘대통령 탄핵’이라는 ‘의회 쿠데타’를 획책했다. 이에 맞서서 국민적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뒤이은 4월 15일의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소수 여당’에서 ‘최다 여당’으로 비약적 성장을 이루었다. 이로써 개혁에 대한 기대는 그야말로 끓어오르게 되었다. 가장 개혁적인 대통령에 가장 개혁적인 ‘최다 여당’까지 이루었으니 친일, 독재, 재벌, 부패, 파괴 등의 문제가 모두 크게 개혁되어 한국 사회의 비약적 발전이 이루어지리라는 당연한 기대가 커졌던 것이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다분히 기형적이었다. 기존의 보수정당들에 비해 훨씬 개혁적인 정당을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전체 의원 152명 중에서 절반 이상이 사실은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추구하는 ‘정치꾼’일 뿐이었다. 의원직만 보장된다면, 한나라당이고 자민련이고 어디든 뛰어가서 무슨 짓이든 할 자들이 권력이 흘러가는 낌새를 보고는 열린우리당으로 갔던 것이다. 이 때문에 17대 국회의 초기부터 열린우리당에 대한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열린우리당’이 아니라 ‘돼지우리당’이라는 식의 비아냥은 이런 실질적 우려의 소산이었다. 그리고 이런 우려는 결국 이른바 ‘개혁파’와 ‘실용파’의 대립이라는 형태로 세력화해서 나타나고 말았다.

실용파라는 것은 말이 좋아 실용파지 실제로는 기존의 보수정당에 맞서서 개혁을 추진하지 말자는 세력이었다. 다시 말해서 실용파의 실체는 ‘반개혁파’였다. 실용파의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재선’에 대한 정략적 계산이었다. 그들은 개혁을 추진하다가는 보수적 역풍을 맞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다음의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리라는 계산을 무엇보다 우선했던 것이다. 그 결과 실용파는 개혁을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결국 열린우리당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말았다. 실용파가 득세하면서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과 차별성을 잃고 오히려 한나라당과 ‘보수화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예가 바로 국가보안법 폐지 거부와 혼미를 거듭한 부동산 정책이었다.

2004년 12월 30일, 국회의 폐회를 앞두고 수천명의 시민들이 여의도에 모여서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요구했다. 다시 말할 것도 없이 국가보안법은 하루빨리 사라져야 할 독재시대의 족쇄이다. 개혁을 표방한 열린우리당이 ‘최다 여당’인 상황에서 국가보안법은 당연히 폐지될 것으로 다수의 시민들이 기대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보란듯이 ‘배신’을 저질렀다. 열린우리당의 실용파는 우습게도 한나라당을 ‘알리바이’로 삼아서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거부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스승’이라는 김원기 당시 국회의장은 그 대표역을 맡았다. 부동산 정책의 경우는 더 황당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6월에 당시 강력히 제기되고 있던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제도에 대해 시장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거부했다. 거래에 필요한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시장원리에 어긋난다는 주장 자체가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 결과는 더욱 더 황당했다. 이것은 대통령이 나서서 부당한 아파트 분양가를 공개적으로 비호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따라서 아파트 분양가는 계속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그만큼 투기꾼들의 발호도 극성을 부렸다.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투기꾼의 대통령’이 되었다.

열린우리당은 특권층과 부유층이 아니라 중산층과 서민층을 위한 정당을 내걸었으나 이런 식으로 중산층과 서민층을 죽이는 정당의 길을 걸었다. 약간의 반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중에서 ‘혹시’ 하는 기대를 키웠던 것은 2005년 12월에 민주노동당과 힘을 합쳐 이룬 ‘사학법 개정’이었다. 시민사회에서 요청했던 것에 비하면 크게 모자라는 것이었지만 개방형 이사제의 도입을 핵심으로 하는 개정 사학법은 썩고, 썩고, 또 썩은 한국 사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적 길을 연 것이었다. 그런데 1년 반만에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민주당과 결탁해서 ‘개정 사학법’을 결국 무효화해 버렸다. 개방형 이사제는 사실상 폐기되었고, 더욱이 ‘사학분쟁조정위원회’라는 것을 신설해서 사학의 개혁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사학개혁의 과제가 부패세력 대 개혁세력, 특권세력 대 민주세력의 대격전장이 된 상황에서, 임시이사의 파견이나 신규 정이사의 선임에 대한 부패재단의 개입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것이다.

임종인 의원의 탈당을 시작으로 이미 많은 의원들이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다. 김근태, 정동영, 천정배 등 열린우리당의 실질적 지도자들조차 이미 모두 탈당했다. 지금 열린우리당은 ‘열린강시당’과 비슷한 상태이다. 그리고 결국 열린우리당의 죽음을 위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실 열린우리당의 죽음은 ‘개정 사학법’의 무효화를 통해 이미 이루어졌다. 앞으로 할 일은 개혁에 대한 열망으로 탄생하고 성장했던 이 당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에 대한 기억과 심판이다. ‘사학법에는 반대하지만 당론이라서 따랐다’는 말장난으로 문제를 피해가려는 유시민 의원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아무튼 열린우리당은 죽었다. 여기에는 실용파의 책임이 가장 크지만 그것을 통제하지 못했던 개혁파의 무능에 대해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능력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본인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노무현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의 파행과 종말은 노무현 대통령이 ‘싸움은 9단’일지 몰라도 ‘정치는 초단’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생생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홍성태 (상지대 교수, 부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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