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기타(od) 2004-01-31   1705

<개나리의 씨네 지지배배> 외줄에서 내려와 설원을 달려!

최초의 에스키모어 영화 <아타나주아>

주의! : 개나리는 영화를 잘 몰라요. 그냥 영화 보는 걸 좋아할 뿐이에요. 이 글은 폼잡고 쓰는 영화평이 아니에요. 말 그대로 주절거리는 ‘지지배배’일 뿐이에요. 그러니 실망하지 마세요.

아타나주아

(ATANARJUAT,

THE FAST RUNNER)

감독 : 자카리아스 쿠눅

출연 : 나타르 웅갈락

실비아 이발루

피터-헨리 아나치악

루시 툴루가죽

곰돌이 인형≠곰

바둥바둥.

물구나무선 곰의 두 다리가 바둥거렸어요. 외줄 위에서 재롱을 떨었어요. 떨어질 듯 말 듯 하면서도요. 그 날 곰은요…, 슬퍼 보였어요.

공짜표를 얻어 난생 처음 서커스를 보러 갔어요. 세계 최고의 서커스단이랬어요. 거기서 봤어요. 커다란 곰이 사람처럼 바닥을 구르는 걸요. 재주를 넘는 걸요. 막 돌 지난 아기처럼 아장아장 걷는 걸요. 물구나무선 채 줄타기를 하는 걸요.

자꾸 곰돌이 인형 생각이 났어요. 진열장 안에 갇힌, 꼼짝달싹 못하는, 절대 곰일 수 없는, 곰돌이 인형이요.

개나리는 촌놈이었어요. 동네에 차도 안 들어오고, 가게도 하나 없었던, 구비구비 산길을 돌아 올라가야 닿는 깡촌에서 개나리는 닭싸움, 돌싸움, 칼싸움하며 자랐어요. 소똥싸움도 했어요. 8살 한평생 싸움으로 단련된, 야생 개나리였죠.

광주가 시체로 뒤덮였던 그 해 겨울, 초등학교 1학년인 개나리는 서울 변두리로 전학을 왔어요. 하얗게 눈 내린 학교 운동장을 처음 봤을 때, 그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그건 운동장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그것은, 아∼ 차라리 눈덮인 광야였어요. 개나리의 눈은 너무 시렸어요. (개나리가 다녔던 학교는 전교생이 12명인 분교였어요. 운동장이 동네 큰 집 마당만했어요. 그래도 개나리가 달리기엔 숨이 찼는데….)

전학 온 학교는 한 반이 60명이나 됐어요. 이사오기 전 다니던 학교 5개를 한 반에 꾸겨 넣은 셈이에요. 개나리는 학교 가는 게 너무 싫었어요. 쉬는 시간만 되면 아이들이 개나리 주위에 몰려들었어요. 그리고는 올망졸망한 손들을 꼬옥 쥐고는 검지손가락 하나만 조심스레 펴요. 그런 다음에 손가락으로 개나리 몸 여기저기를 콕콕 찔러요. 한 마디씩 하면서요. “야, 말 좀 해봐 응. 한 마디만 해 줘” 개나리의 경상도 사투리가 너무 신기했던 아이들은 개나리가 입만 열면 까르르 웃었어요. 그때마다 개나리는 자신이 얼마 전 창경원에서 봤던 곰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 속에 갇혀 무기력하게 널브러져 있던 곰이요. 설원의 기억을 빼앗긴 채 구경거리가 된, 슬픈 두 눈만 껌뻑거렸던 북극곰이요.

전학 후 첫 번째 토요일이었어요. 종례 시간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으셨어요. “다음 주는 무슨 반?” “오후반이요∼(넘치는 학생, 비좁아터진 학교, 교육의 질을 운운하는 게 이상했던 그 때, 그 학교도 2부제 수업을 했어요.).” 머리가 어지러웠어요. 오후반이라니…. 생전 처음 들어보는, 개나리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단어였어요. 한참을 끙끙거리다 짝에게 물어봤어요. “응, 다음주엔 오후 1시까지 학교에 오면 돼.” 개나리의 몸에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어요. 개나리 8살 평생에 오후 1시에 등교하는 학교란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주말 동안 개나리는 고뇌의 시간을 보냈어요.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어요. 다음주 월요일 아침이 밝았을 때, 개나리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어요. “그래, 11시에 가자.” 1시까지 오라는 말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개나리는 11시에 가보기로 했어요. ‘도대체 이 학교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인가’, 개나리의 혼란은 극으로 치닫고 있었어요. 학교 정문에 들어서면서부터 개나리의 작고 여린 가슴은 콩콩 뛰었어요. 그리고 교실 앞에 섰어요.

순간 개나리의 눈앞이 노래졌어요. 교실 안에서 수업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극심한 배신감으로 개나리는 치를 떨었어요. ‘이.거.뜨.리, 이.거.뜨.리 나를 속였어. 내가 촌에서 전학왔다고 나한테는 오후 1시까지 오라고 해 놓고, 지네들끼리만 벌써 와서 공부하고 있어.’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어요. 한참 후, 입을 앙 다물고 교실 앞문을 조심스럽게 열었어요.

수많은 시선들이 개나리의 얼굴에 와 박혔어요. 깜짝이야!! 개나리는 놀랐어요. 모르는 아이들, 모르는 선생님인 거예요. 선생님이 물으셨어요. “너 누구니?” 개나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저 이 반인데예.” 아이들이 와하고 웃으며 놀리듯 말했어요. “너 오후반이지. 우린 오전반이야. 쟤는 자기가 오전반인지 오후반인지도 모른대∼요.” 개나리는 학교가 무서워지기 시작했어요. ‘오전반은 또 뭐꼬?’

너무 컸던 그 학교에서 개나리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은 죄다 웃음거리였어요. 정신 없이 뛰어다닐 공간도, 빨가벗고 뛰어들 개울도, 칼싸움할 대나무도, 아무 것도 없는 동네에서 개나리는 점점 시들어갔어요. 촌놈 개나리는 우리 속에 갇힌 곰, 진열장 안에 갇힌 곰돌이 인형이 된 거예요.

자유를 향한 질주

영화 <아타나주아>는 곰에 관한 영화예요(아, 그렇다고 곰이 나오는 건 아녜요. -_-;;). 곰돌이 인형이 아닌, 야성이 펄펄 살아 있는 곰말이에요. 설원을 질주하는, 좁은 우리로는 결코 가둘 수 없는 생명말이에요.

에스키모 감독이 에스키모어로 만든 최초의 영화, <아타나주아>는 아주 소박해요. 원시신화를 이야기하는 영화는 촬영기법 자체가 원시적이에요. 현란한 CG와 특수효과에 익숙한 사람에겐 아주 고리타분할 지도 몰라요. 장식 없는 북극의 만년설, 아마추어 연기자들의 어눌한 연기 등, 온통 날것들로 가득한 영화는 관객의 눈에 낀 문명의 잔상들을 걷어내요.

언젤 지 모를 아득한 옛날, 악령의 힘을 빈 ‘사우리’는 경쟁자 ‘툴리막’을 누르고 부족의 지도자가 돼요.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요. 툴리막의 큰아들 ‘아막주아'(힘센 사나이)와 작은아들 ‘아타나주아'(빠른 사나이)는 군계일학으로 부족에서도 인기 짱인 청년들로 자라요. 반면 이 두 형제에 비해 뭔가 처져 보이는 사우리의 아들 ‘오키’는 맘속으로 형제를 시기해요. 게다가 약혼녀인 ‘아투아’마저 아타나주아를 좋아하니, 약오를 수 밖에요. 결국 아타나주아와 오키는 아투아를 두고 결투를 벌이고, 승자인 아타나주아가 아투아와 결혼해요.

<아타나주아>엔 에스키모인들의 전통악기 연주에서부터 이글루 짓기, 바다표범 사냥 등 ‘신기한’ 것들이 많이 등장해요. 때문에 이 ‘신기함’을 바라보는 문명화된 관객들에겐 문명과는 거리가 먼 원시적 장면들이 훌륭한 구경거리일 수 있어요.

그래서였을 거예요. 영화를 보면서 자꾸 로버트 플레허티의 <북극의 나누크>(1922)가 떠오른 건요. ‘미지의 원시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찬 서구 탐험가의 시선이 전편에 줄줄 흐르는 그 영화 말예요. 감독의 눈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를 한 입 가득 베어물고 헤벌쭉 웃는 나누크 족이 그야말로 동물원에 갇힌 곰에 지나지 않았어요. 다큐멘터리 영화의 효시라는 이 영화사적 걸작을 보면서 개나리는 너무 불쾌했어요. 감독은 좁디좁은 자신의 두 동공 속에 넓디넓은 북극의 살아 숨쉬는 생명들을 한낱 웃음거리로 만든 채 가둬 버린 거예요.

<아타나주아>를 보는 관객들 역시 2시간 48분이란 런닝타임 동안 ‘보편’과 ‘문명’이란 서구적 잣대에 자신을 내맡기고 싶은 유혹을 받을 지 몰라요. 하지만 영화는 ‘오리엔트’에 사는 관객들이 스스로 ‘오리엔탈리즘’의 포로가 되는 걸 허락지 않아요. 내부자인 감독 자카리아스 크눅은 오히려 무당, 주술, 엑조티즘 등 외부자의 시선에 포획된 요소들을 여보란 듯이 사용, 편견으로 똘똘 뭉친 외부자들을 비웃고 있어요.

외부자의 시선에 갇힌 다큐멘터리 <북극의 나누크>엔 온통 신기한 구경거리로만 가득차 있지만, 에스키모인의 서사로 외부자의 시선을 극복한 <아타나주아>엔 그들의 역사와 이야기, 그들의 삶과 사랑이 있어요. 결과적으론 다큐영화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현재적인 픽션영화가 탄생한 거예요. 드넓은 설원에 살아도 우리 안에 갇힌 북극곰을 만들 것인가, 6mm 카메라로 찍어도 광활한 북극조차 비좁은 펄떡이는 생명을 만들어낼 것인가가 감독의 시선 하나에 달린 거예요.

개나리는 문득문득 개나리의 참모습, 본질은 외면하고 엉뚱한 잣대, 기준으로 규정하려는 수많은 시선들 속에 살고 있음을 느껴요.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은 비단 서구가 아시아를, 미국이 아랍을,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만은 아니니까요. 장애인, 여성, 동성애자, 외국인 이주노동자에 대한 시선, 가짓수도 많은 온갖 차별적 시선들. 이중 어느 하나, 혹은 그 이상에 묶여 있을 개나리도 분명 갇힌 곰돌이 인형이에요.

질투와 증오에 온몸을 내맡긴 오키는 아타나주아 형제가 곤히 자고 있는 텐트를 덮쳐요. 결국 형 아막주아는 피투성이가 된 채 살해되고요. 영화의 최대 명장면인 아타나주아의 달음박질이 시작되는 순간이에요. 아타나주아는 오키 일당의 창을 피해 벌거벗은 채 눈 위를 달려요. 살기 위한 도피이자,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을 자유를 향한 질주가요.

2004년 올해는요. 우리를 날고기 먹는 야만인으로, 재주넘는 곰으로, 오전오후반 구별 못하는 촌놈으로 몰아세우는 것들,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질주를 시작했으면 해요. 특히 2000년 총선 때 시민사회를 정권의 홍위병으로 낙인찍으려 했던 사람들은 올해엔 무엇으로 우리를 가두려 할까요? 무엇이든 그 눈병 든 시선들 안에 갇히지 않을 질주를 해요. 외줄 위에서 바둥거리기만 했던 개나리도, 조련사의 채찍을 무서워하지 않고 줄에서 내려올 거예요. 더 이상 곰돌이 인형노릇은 싫어요. 설원을 질주하는 곰이 될 거예요. 달려요 다같이!

개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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