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청년사업 2015-01-12   1328

[인턴후기] 초일상의 정치와 시민불복종

 참여연대 15기 인턴프로그램은 세상을 뒤흔들 상상력으로 가득 찬, 20대 청년친구들 24명과 함께 2015년 1월 2일(월)부터 2월 12일(목)까지 6주동안 진행하게 됩니다. 이 6주 동안 우리 인턴 친구들은 인권과 참여민주주의, 애드보커시 방법론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슈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하며, 직접행동을 스스로 기획하고 진행함으로써 미래의 시민운동가로 커나가게 됩니다. 이번 후기는 장경환 인턴이 작성해주셨습니다.

 

 지난 수요일(1/7) 마지막 순서로 김만권 선생님께서 ‘초일상의 정치와 시민불복종’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해주셨다. 지난 2014년 느티나무 아카데미에서 1년 동안 선생님의 정치철학 강의를 들었기에 조금은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후기를 쓰겠다고 지원했지만 막상 빠르게 진행되는 강의를 듣고 보니 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번 강의에서는 초일상이란 무엇인지, 시민불복종이란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그리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등에 대해 살펴봤다.

 

 강의를 시작하시면서 선생님께선 우리들에게 ‘정치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셨다. 이에 ‘한정된 자원을 분배하는 것’이라는 분배의 측면에서의 대답과 ‘사회적인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라는 갈등조정 측면에서의 대답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정치란 서로 다른 의견 사이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치의 개념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어서, 선생님께선 곧바로 ‘너 정치적이야’라는 말이 왜 부정적으로 쓰이는 것이라 생각하는가라는 두 번째 질문을 던지시고 답을 주셨다. 정치(Politics)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것이라 여겨지지만 정치적(Political)이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사람들이 ‘정치적’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정치의 속성 중에 정치와 정치꾼을 동일시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영역(Sphere)의 개념이고 정치꾼은 행위자(Actor)라는 개념이다. 선생님께선 이 둘을 구분하게 되면 정치로 들어갈 이유가 된다고 하셨고,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정치로부터 도망갈 이유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영역과 행위자가 구분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우리들의 정치체제가 ‘대표자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선 ‘대의제 민주주의(Delegation Democracy)’와 ‘대표제 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의 차이점을 설명해주셨다. 전자는 대표자들이 말 그대로 ‘전달자’의 측면을 가지고 후자는 대표자들이 임기동안 유권자의 의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측면을 가진다. 이렇게 대표자들이 유권자들의 의견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유권자들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선생님께선 루소가 “영국인들은 선거때만 자유롭다”라고 꼬집었던 명언을 인용해서 설명해주셨다.

 

20150105-0212_참여연대 인턴 15기_(15)

 

다음은 루소의 말을 포함한 사회계약론 내용이다.

“영국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잘못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곳은 오직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되어 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짧은 기간에 영국 사람들이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면, 그들이 자유를 상실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대표라는 개념은 근대에 와서 생긴 것이다. 그것은 봉건정치, 다시 말하면 그토록 간악하고 불합리하며 인간을 타락시키고 인간이라는 이름을 모독하는 봉건정치에서 유래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사회계약론 3장]”

 

우리시대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강의를 들으면서 지울 수 없는 생각은 ‘선거 기간에마저도 자유롭기는 한가’라는 것이다. 사실은 선거기간에도 자유로운 게 아니라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일 뿐이라는 것 말이다. 분열통치로 양당제 국가를 향해 국민들을 몰아가는 정치권과 그와 결탁한 기업들, 그리고 한정된 아젠다 만을 생산하는 언론이 지정해준 프레임 안에서만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자유롭다고 표현할 수 있는가. 그래서 자발적인 것을 강조하는 시민운동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어쨌든!

 

 다음으로, 선생님께선 현실에서의 민주주의에서의 참여가 사라지는 현실을 다양한 표현으로 설명해주셨다. 먼저, 정치철학자인 셸든 월린(Sheldon wolin)의 ‘도망자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말씀하셨다. ‘도망자 민주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의민주주의엔 민주주의가 본질적으로 의도했던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제 민주정체에서 시민의 참여란 혁명 혹은 저항이라는 일시적인 순간에만 존재할 뿐이고 정치가 일상으로 접어들면 참여는 모습을 감춘다. 웰린은 이러한 현실을 도망자(fugitive)라고 표현했다. 선생님께선 이렇게 민주주의가 도망쳐 버린 자리에 시민들은 정치에 대해 무지할 뿐 아니라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청중(Audience) 혹은 구경꾼(Spectator)으로 존재한다고 하셨다. 현실 정치에선 민주적인 순간(Democratic Moment)은 있지만 민주주의(Democracy)는 없다. 즉, 주인이 없는 민주주의이기에 참여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정치체제에 들어가 원리를 만들고 그 원리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정치적 인간이 되지 않는다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말이다. 앞서 말했던 민주적인 순간이 시민불복종이고 일상의 순간과는 다른 형태의 혁명의 시간은 법이나 제도가 그 자체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이다. 공적영역(합법)과 사적영역(불법)의 경계선이 혁명의 순간에, 즉 초일상의 순간에 일그러지게 되고 그 일그러진 빈틈에서 초법적 영역이 발생한다. 이는 일반적인 법개념(합법과 불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혁명과 시민불복종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보통 두 개념은 비슷한 개념으로 인식되고 특히 시민불복종은 불복종이라는 말에만 집중해서 혁명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둘은 다른 개념이다. 선생님께선 혁명은 시스템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것이고 시민불복종은 시스템의 왜곡을 막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합법과 불법은 기존의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어서, 헌법은 단순히 쓰여진 문서가 아니라 우리가 시스템을 구성한 흔적이며 앞으로의 시스템을 구성하려는 약속인 만큼 중요하다고 하셧다. 그렇기 때문에 원칙을 위반하는 사람들이 나왔을 때, 시민들은 깨어나게 되고 불가피하게 사소한 법률(ex 교통법..) 등을 어긴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것이 시민불복종으로 이어진다. 일상의 정치와 초일상의 정치는 단어의 의미만큼이나 그 이면의 의미도 다르다. 일상의 정치는 정치엘리트가 독점하고 초일상의 정치는 의식 있는 시민이 독점한다. 선생님께선 초일상의 정치가 잦아지면 시스템이 그만큼 불안정하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가끔씩 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야 더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잠깐 세월호에 관한 얘기를 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이익’에 관한 말씀을 해주셨다. 이익은 영어로 ‘interest’다. 이 단어는 ’사이에 있다‘는 뜻으로, 이익이란 ’사이에 있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즉, 이익은 내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누리는 자유는 누군가 흘린 피의 대가”라는 말처럼, 내가 얻는 이익도 누군가의 손해를 포함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선생님께선 ’1%:99%‘의 사회에서 왜 1%의 부와 권력의 남용을 제지하지 못하는가 물으셨다. 유시민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하위 계층은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에 혁신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고 말했지만, 나는 오히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에 더 공감했다. 선생님께선 “내가 지금은 99%지만 언제든지 1%가 돼서 99%를 배신할 것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러분들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셨다. 나는 이 말이 자기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고 그 이익을 얻어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살아가는 대한민국을 포함한 자본주의 시대의 많은 사람들을 꼬집는 말이라고 느꼈다. 이런 얘기들을 들으면서 루소의 말을 떠올렸다.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배자를 향하는 비굴한 행동이 현재보다 조금 더 높은 단계의 신분 상승을 약속하는 만큼 사람들은 더 굽실거린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지배할 차례를 기다리고 그날을 위해 노예처럼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하면서 비굴하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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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으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은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51:49라는 비율의 의견차이가 100:0의 비율의 권력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볼 때,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는가? 이것을 다수결의 힘이라고 볼 수 있는가? 민주주의는 전체 구성원의 것인데 마치 다수의 것인 것처럼 돼버렸다. 밀은 『자유론』에서 “다수의 횡포(the tyranny of the majority)라는 것은 이제는 일반적으로 사회가 경계할 필요가 있는 해악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다수의 의견을 견제할 수단이 없다. 그래서 다수결로 바꿀 수 없는 가치인 헌법적 권리로 보호해야 한다. 이 헌법적 가치의 연장선상에서 법치주의의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다. 법의 지배가 왜 중요한가? 고대 그리스에선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을 ‘야만’이라고 여겼다. 그렇기에 그들은 법이 인간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의지에 의존하지 않게 하기 위해 법의 지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시민불복종은 이 합의된 법을 지키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민불복종이 일어나는 조건은 무엇인가. 선생님께선 두 가지 조건을 말씀하셨다. 첫 번째로, 주제는 항상 공공사여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일이나, 특정 집단에 관한 문제는 시민불복종으로 이어질 수 없다. 두 번째로, 소수자들이 시민들의 일반적 정의감을 향한 호소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불복종은 원래 다수자운동이 아니다. 항상 소수가 다수에게 정의감을 호소함으로 시작하는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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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선 참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강의를 마치셨다. “우리는 잠자는 권력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너무 깊이 잠들면 누가 가져갈지 모르니 깨어서 주위를 보고 권력을 보고 스스로 행위하십시오.” 행동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서 밀은 『자유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전혀 행동하지 않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느 경우에도 그 위해에 대해서 당연히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인턴 1주를 마치는 시점에서 한 주 동안의 강의들을 두 단어로 표현하자면, ‘권리’와 ‘행동’이다. 민주사회의 시민은 자신의 권리를 자각하고 있어야 하고 그 권리를 지키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참여연대와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내가 배운 것이고 평생 가지고 가야할 시민의식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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