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기타(od) 1998-11-19   935

[제9호 쓴소리] 한 동네의사가 대통령에게 드리는 편지

저는 서울 변두리에서 조그만 의원을 개원하고 있습니다. 감기 걸린 밤톨 같은 애들을 진료한 후 몰라보게 좋아져서 '안녕하세요'라고 꾸벅 인사받는 일에서 삶의 보람을 찾는 한낱 동네의사입니다. 몇 개월 전 대통령님께서 "인술을 베풀어야 할 의사가 의약품을 둘러싼 비리를 통해 이익을 챙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하시면서 의약품 비리를 뿌리뽑도록 하라고 지시하셨다는 신문기사를 접했을 때, 저는 한편으로는 한없이 부끄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누군가 대통령님께 '의약품 비리' 문제가 단순히 의사들의 '양심불량'만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을 알려드렸으면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던 참에 참여연대가 '의약품 비리' 문제를 구조적인 문제로 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일을 심도 있게 준비한다기에 조사에 참여하였고, 그 계기로 대통령님께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몇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선 의사를 둘러싼 부끄러운 비리에 대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순서겠지요. 저도 '의약품 비리'의 수혜자임을 고백합니다. 너무 부끄럽습니다. 참여연대의 발표가 T.V.를 통해 나간 날 저녁, 저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내일 나를 찾아올 환 자들에게 무슨 낯을 들고 진료를 하나?' 혹시 '선생님도 약을 덤으로 받으세요라고 환자가 물어오면 어떻게 대답할까?' 노심초사하면서 연신 애꿎은 담배만 피워댔던 일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희 의원에 들어오는 약의 반 이상은 사실상 공짜로 들어옵니다. 아니 우리 나라의 의사들은 사실 모두가 의약품을 둘러싼 블랙마켓에 옴짝달 싹하지 못하게 매어 있습니다. 이 굴레는 어느 누구도 벗을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술을 베풀어야 할 의사'들이, 어떤 약이 환자를 위해 가장 좋을까를 생각해야 할 시간에 '어떤 약을 써야 가장 이익이 많이 남을까'를 생각하고 있는 부끄럽고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는 현재와 같은 의약품시장에서는 같은 성분의 약이라도 제약회사에 따라 가격이 다르기 때문이고, 또 비슷한 다른 약을 쓰면 가격이 몇 배나 차이가 날 수 있기 때 문입니다. 의원의 경우 이른바 '할증'이라는 것을 통해 100알의 약값으로 실제 약은 300-400알을 받는 일(200알을 얹어주면 할증을 200%, 300알을 덤으로 주면 할증을 300%라고 합니다)이 비일비재합니다.

더 부끄러운 일은 이러한 비정상적인 관행은 공공연한 비밀인데도 저와 같은 의사들은 시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관행이 의료기관 경영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의원도 그렇습니다만 작게는 의원 전체 순이익의 30%에서 많게는 60% 이상까지가 이 약가마진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의 수입의 가장 큰 부분이 약을 통한 음성적인 돈으로부터 얻고 있는 셈입니다.

이번 참여연대의 종합적인 발표자료를 보고서야 알게 되었지만 보험약가가 높게 책정되어 있어 보험재정에서 새어나가는 돈이 무려 1조 2800억원에 달한다고 되어 있더군요. 사실 약가가 높게 책정되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규모가 구체적인 숫자로 나오니 저 또한 놀랐습니다. 이러한 발표문을 보니 국민들이 의사들은 '다 도둑놈'이라는 생각을 안하는 게 이상할 정도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의사들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습니다. 시쳇말로 '자본주의사회에서 싼 약을 쓰려는 것은 당연한 경제행위'이고 '우리 나라에서 뒷거래가 없는 분야가 과연 있는가'라는 이야기가 동료의사에게서 터져 나옵니다. 그렇지만 의사가 장사꾼이 아니라면 이런 이야기는 그리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사실 의사들이 느끼는 가장 큰 문제는, 의사들이 의사로서 이 사회에서 인정받아야 할 것들, 즉 기술료, 행위료인 의료보험수가가 너무 낮게 책정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희 의원 만 하더라도 현재 의료보험수가만 가지고는 정상적인 의원경영이 불가능합니다. 즉 약가마진에서 오는 이익이 없어지면, 문을 닫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 제가 보건대, 우리 나라 거의 모든 의료기관이 비슷한 형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의사들의 변명이 약가를 둘러싼 의약품 비리와 비정상적인 관행 전체를 뒤덮을 만한 명분을 가진 대단한 변명거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지 만 지금까지 왜 의사들이, 더군다나 상당수의 양심적으로 살려하는 의사들조차도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였는지에 대한 설명은 되리라고 봅니다. 즉 높은 약가마진을 낮 은 의료보험수가에 대한 보상 정도로 의사들이 생각하고 있고, 또 보험당국이나 정책당국자들도 이러한 뒷거래 관행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료보험수가를 쉽게 올려 주지 않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의사들은 언론이나 정책당국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의료문제가 발생하면 언론 보도는 구조적 원인이 아니라 의사들의 양심에 초점을 맞춥니 다. 이번 사건도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참여연대의 발표문의 초점은 1조 2,800 억원의 보험재정 손실의 원인이 제약협회가 보험약가를 제 마음대로 조정하고 있기 때문이고, 보건복지부가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한 데에 있었습니다. 이번 발표문에서 제가 새롭게 안 사실이지만, 보험약가를 정하는 의료 보험약가심사위원회가 제약협회 내에 설치된 게 무려 17년전인 1981년부터라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높은 보험약가와 낮은 의료수가가 의료보험 도입 초 기에 이미 구조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생각에 미치고 나서는 저 또한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문보도의 초점은 그 원인의 지적에 두어지기보다는 의료기관이 그것도 의사들이 비리의 가장 큰 공범자이자 수혜자임을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의사들 이 그 수혜자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낮은 의사의 기술이나 처방에 대한 수가는 낮고 약에 대한 수가는 높게 책정된 현재 의 구조 속에서는 의사 개개인에게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전문인으로서의 의사사회 전체가 이런 구조적 비리에 대해 지금까지 침묵하고 개선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으로서는 이 구조 속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환자의 이익을 진료의 최우선적인 목적으로 하고 진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사로서 환자에게 약장사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 뿐만 아니라 상당수 의사가 성심성의껏 진료를 하면 어느 정도의 수익이 보장되는 환경만 만들어진다면, 지금보다 수익은 어느 정도 줄어들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 니다.

대통령님. 사실 현재와 같은 낮은 의료보험수가(기술료, 처방료 등)와 높은 보험약가 (약) 구조 속에서는 이러한 의사들의 소박한 주장이 실현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빨리 보험약가를 낮춰 정상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험약가를 낮춰 절약되는 보험재정을 의료보험수가에 반영시켜야 합니다. 이런 원칙이 세워진다면, 대다수 의사들은 환영할 것입니다. 수익이 일부 줄더라도 환영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구조 속에서 '약'을 '돈'으로 보면서 진료를 해야 했던 자괴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경우라면 약을 제값에 사고 제값에 공급한다면 정말 홀가분하겠습니다. 저희가 약을 처방하면서 약의 가격이나 할증을 따지지 않고, 약의 효능 그 자체만을 생각했 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보험약가를 정상화하여 절약된 보험재정을 의사를 위한 보험수가 인상에 써 주십시오. 의료기관 운영이 어렵습니다. 병원, 의원의 도산율은 이미 다른 분야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정상적인 약가마진이 없어지는 대신 보험수가에서 받을 수 있어야 의료기관이 삽니다. 물론 절감액 중 일부는 국민들을 위한 보 험급여 확대에도 쓰여져야겠지요. 그리고 이런 일은 동시에 이뤄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의사들은 또다시 불신을 하게 되고, 상당수 동네의원은 운영이 어려워 문을 닫는 상황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님!

높은 보험약가, 낮은 의료수가로 인한 '의약품 비리' 문제에서 자유로운 의사, 의료기관은 우리 나라에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번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 으면 또다시 어떤 언론이나 시민단체가 이 문제를 제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다시 의사들은 국민들로부터 '도둑놈' 취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제 환자에게 또다시 고개숙인 의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싫습니다. 의사/환자가 정말 질병치료를 위해 따뜻한 관계가 되도록 만들어주십시오.

더 이상 이렇게 의사로 서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상황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동네의사로서, 존경받는 의사가 되고 싶은 절박한 심정으로 감히 말씀드립니다. 시급히 의약품 비리의 근원인 의료보험약가 결정과정을 바꿔주십시오. 보험 약가를 낮추고 의료수가를 높여주십시오. '의사들 도둑놈' 소리만 듣고 또다시 근본은 해결되지 않는 미봉적 해결책만으로는 곤란합니다. 이것이 지금보다 수익이 줄더 라도 환자에게는 존경을 받고 싶다는 대다수 의사들의 생각이고 소박한 바람입니다.

추워지는 날씨에 대통령님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참여연대의 의료기관 할증률 조사에 참여했던 한 의사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