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기타(od) 1998-12-10   1143

[제12호 쓴소리] 한국영화, '아름다운 시절'은 올 수 없나요

존경하는 대통령님.

어려운 국정에 여러 가지로 노고가 많으신 데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대통령님께 저희 영화인의 마음을 전하고자 편지를 드립니다.

저희는 대통령님께서 우리 영화에 대해 늘 지대한 관심과 사랑을 갖고 계셨다고 느낍니다. 그 느낌은 재야 시절 때부터 영화를 통해 여러번 뵈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대통령님의 우리 영화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영화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대통령님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21세기 미래에 대한 훌륭하신 안목과 식견을 가지신 문화대통령으로서 전력을 다하고 계심을 저희는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럼, 요즘 대통령님께 심려를 끼쳐드리고 있고 저희 영화인들이 호소하고 있는 스크린쿼터에 관한 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12월 1일부터 시작된 영화인들의 투쟁은 그 이전의 투쟁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생존권에 대한 문제나 영화 자체에만 초점이 맞추어졌었으나, 지금의 이 투쟁은 단순한 생존권 문제를 넘어, 21세기 미래의 우리나라 영상산업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며 절박한 위기의식의 발현입니다. 영상산업이 주역이 되는 21세기를 주인의 자리를 빼앗긴 채 맞이한다는 것은 정말 암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화적 위기의식은 급기야 스크린 쿼터 사수에 대한 여러 시민, 문화단체의 지지성명으로 연일 이어지고 있으며, 범국민적 차원으로 그 공감대는 확산되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 모두는 우리나라의 경제의 어려움과 실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배부른 투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회사가 쓰러지고 실직자가 생겨나는 마당에 같이 고통분담을 하지 않는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위기에 처한 경제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스크린 쿼터를 미국에게 건네주려는 통상교섭단의 움직임은 21세기 한국경제에 고부가가치 시장전체를 미국에게 넘기는 행위라고 저희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스크린 쿼터를 사수하고자 영화인 모두가 거리로 결집하고, 문화 관련 지식인과 예술인들, 그리고 각 사회단체들이 한목소리를 내는 것도 이 문제가 미래 경제의 관건이라는 인식 때문인 것입니다.

대통령님께서도 늘 말씀하시는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는 것은, 경제보다 문화가 더 중요해진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경제가 ‘문화경제’라는 새로운 복합형태로 변화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자국의 영상산업 기반을 확충하지 않고서 21세기의 새로운 국가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대통령님께서 ‘한국영화 관객 점유율이 40%에 이르기까지는 현행 스크린쿼터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공약하신 점 역시 누구보다도 이 제도의 중요성을 잘 아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미국은 미래의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늘 영상문화산업에 맨 앞줄에 서있는 영화에 대해 끊임없이 압박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스크린쿼터제에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은 이 제도만 없어진다면 한국영화 시장의 장악은 물론 21세기 영상산업의 거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경제가 어렵다고 스크린 쿼터제를 축소 또는 폐지하여 한미 투자협정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로서는 잔병을 피하려다가 중병을 앓게 되는, 득보다는 실이 너무 많은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 또한 미국이 이번 쌍무 회담에 스크린 쿼터제를 포함시킨 것은 앞으로 전개될 다자간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근거를 갖고자 함일 것입니다. 사실, 스크린 쿼터 일수를 몇 일 줄이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이익이 될 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가 그동안 굳세게 지켜온 원칙을 깨버린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영화를 사랑합니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자국영화의 관객점유율이 25%를 넘는 나라는 프랑스, 일본, 이태리, 스페인, 영국, 한국 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 상대적으로나마 이렇게 많다는 것에 대하여 저희는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크린 쿼터제가 무너지면 우리영화를 사랑하는 25%의 관객은 더이상 우리영화를 볼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후손들은 결국 미국의 영화만을 보고 자라나게 되고 우리는 점점 우리의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영화의 영향력은 너무나 거대하여 그 이후의 결과는 예측하기조차 힘이 듭니다. 저희가 스크린 쿼터제 사수를 외치는 것은 우리영화를 보호해달라는, 법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려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미국영화가 더이상 우리영화와 영상산업과 우리영화를 보는 관객의 권리를 독점하지 못하게 하는 적극적인 제도이며 몸짓이라고 생각합니다.

OECD 협정에 영화는 문화적 예외조항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지난 번 협정 때 영화의 종주국이던 프랑스가 미국에 강력하게 맞선 것은, 프랑스가 영화의 탄생지이며 프랑스 국민들이 누구보다 자국영화를 사랑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영화야말로 21세기의 영상산업의 핵심이고 스크린 쿼터는 바로 이를 사수하기 위한 교두보라는 것을 이미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한국영화는 현재 놀라운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미국 영화에 굴복하지 않고 자국 영화산업을 지키고 있는 특이한 나라 중 하나이고, 영상문화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관심과 열정 또한 대단합니다. 국내외적으로 수천명의 젊은 이들이 영화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외국영화인들이 다들 선망하고 있는 이 모든 점들은, 우리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잠재력이자 한국인 특유의 생명력이며, 다음 세기의 민족적, 국가적 발전에 활력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스크린 쿼터를 정부가 양보하게 된다면 이 모든 것들을 잃게 될 것입니다. 다시한번 이번 일로 심려끼쳐드린 것에 죄송합을 느끼며, 이미 이 모든 상황을 다 읽고 계실 대통령님께 이렇게 소견을 올릴 수밖에 없는 저희의 마음과 뜻을 받아 주실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추운 날씨에 모쪼록 건강하시길 바라오며 성탄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98년 12월 10일

영화배우 안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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