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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이야기    종로구 통인동 희망1번지

  • 칼럼/기고
  • 2004.10.28
  • 537

법조문 건재해도 ‘적용’은 사멸단계



지난해 10월 평양에 다녀왔다. 정주영 체육관 개관을 기념하여 무려 1100명의 인사와 함께 평양을 간 것이다. 개성에서 평양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엔 북한차는 한대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일행만 75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달렸다. 3박4일의 평양체류 동안 우리는 ‘위대한 수령’을 ‘고무찬양’하는 구호에 둘러싸여 ‘수령 말씀’을 들었다. ‘수령’의 거대 동상을 배경으로 웃는 표정의 사진을 찍어 ‘이적표현물을 제작’하였다. 만나는 북한사람에게 일부러 말을 걸고 ‘회합통신’을 했다. 그들의 몇 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금품’을 제공하고 몇 개 상품을 샀고, 수령의 어록이 들어있는 책과 기념품을 샀다.

북 ‘민생실패’에 미화 안 먹혀

국가보안법이 엄연한 세계에서 이는 아찔한 모험이다. ‘반국가단체’의 지역으로 ‘탈출’하여, ‘고무/찬양/동조’행위를 하고, ‘금품수수’, ‘회합통신’, ‘이적표현물제작’을 한뒤, 다시 남한으로 ‘잠입’한 범죄로 처벌받고 빨갱이로 낙인찍힐 일대 사건이 아닌가. 무자비한 고문속에 누굴 접선하고 포섭했느냐고 문초받았을 사건이 아닌가 말이다.

이렇게 국보법 위반자는 이 땅을 활보하고 있다. 지난해 한해만 봐도, 북한 방문자는 모두 1만5천명이고, 지난 5년간을 합하면 5만5천명에 이른다. 그와 별도로 금강산에 관광갔다온 사람들이 74만명에 이르고, 지금도 매월 1만여명이 금강산에 간다. 고위 정치인, 경제인들이 김정일과 웃으며 사진찍었다.

국보법 반대에 열심인 거대신문의 총수는 김일성이 자신의 항일업적 중 가장 내세우는 ‘보천보사건’을 보도했던 자사의 기사를 금판으로 떠서, ‘국방위원장’에게 증정했고, 북한은 국제친선 전람관에 이를 전시하고 있다. 지난 용천역 폭발사고 때는 여당도 야당도, ‘수구’도 ‘친북’도 구호품을 전달하여, 장차 북한의 군인과 후방병력이 될 사람들을 살리려고 애썼다.

‘위대한 수령, 경애하는 위원장’에 대한 고무찬양을 집중적으로 들은 남한주민이 80만에 이르건만 왜 대대적인 적화운동이 펼쳐지지 않는가-북한 입장에선 기이한 일이기도 할 게다. 해답은 우리가 방문했던 정주영체육관에도 있다. 한 때 타도대상이었던 재벌총수를 기리는 체육관 바로 옆엔 ‘유경호텔’이 있다.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보다 2층 더 높이 지었다는, 삼각형의 유경호텔은 김일성의 피라밋이다.

쓸모없는 시멘트 덩어리로 남아버린 이 기괴한 건축물은 김일성 후기의 정책 파탄의 상징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그 파국적 실패는 1990년대 식량재앙을 초래했고, 몇백만의 아사자, 10만 이상의 탈북자, 남쪽 소년보다 머리 하나의 키 차이가 나는 왜소한 체형의 소년을 북쪽에 남겼다. 항일과 ‘주체’로 아무리 미화해도 이런 참담한 민생의 실패 앞에 설 땅이 없다.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에 이른 지금, 군부독재보다 헌법재판소가 더 위력을 떨치도록 민주화를 이룬 지금, 대한민국에서 북한의 존재는 진정 그토록 위협적인가. 국보법 없이는 국가의 존립·안전이 위협받을 정도로 취약한가. 남한주민들은 달러를 들고 북측으로 여행하고 있고 북한주민들은 먹을 것을 찾아 목숨걸고 탈출하고 있는 지금도, 잠입/탈출/고무/찬양/회합/통신이 그토록 걱정스러운가.

그래도 광화문 네거리에 인공기 휘날리는 사람이 출현한다면? 이런 상상만으로도 걱정되어 잠이 오지 않을 분들이 적지 않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80만명이 인공기와 ‘위대한 수령의 나라’에 며칠동안 쇄뇌당하고도 바뀌지 않는 마음이 광화문에서 인공기를 본다고 영향받겠는가.

대한민국은 지금 언론 자유가 만개하고, 년간 수십만건의 집회/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다양한 정보와 수많은 주장 속에서 살아가는 국민은 ‘인공기 하나’, ‘수령 찬양구호 하나’에 흔들릴 이유가 없다. 불온한 구호 하나가 국가의 존립/안전을 뒤흔들리라 믿는 인사는 다른 국민의 분별력과 판단력을 너무나 무시하는 것이다.

핵과 미사일로 서울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데, 국보법을 폐지해서 되겠는가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핵과 미사일은 법조문으로 막아낼 수는 없다. 효율적인 무기와 외교역량을 통해 억제시킬 수 있을 뿐이다.

개폐논쟁 당쟁변질 성격 커

국보법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은 토론보다는 당쟁의 모습으로 변질되고 있다. 한나라당도 처음엔 ‘정부참칭’ 부분을 포함하여, 상당 조항을 개폐할 용의를 밝혔다. 한나라당엔 공안검사 출신과 용공조작 피해자들이 공존한다. 열린우리당에는 전대협 출신과 국방부 출신이 공존한다.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상대 당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투쟁적 전략’이 아니라 ‘대화의 기술’이다. 당내의 반대파와의 토론부터 시작해, 각기 분명한 대안을 내걸고 당 대 당으로 협의한 뒤, 국민에게 다가오는 것이 순서이다. 모든 곳에서 토론공화국이 꽃피어나야 한다.

국보법은 그동안 인권침해의 대명사로 대내외에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국보법은 조문은 건재해도, 법적용을 보면 점진적인 사멸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민주화가 신장되면서, 남북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사법권이 제자리로 가면서 차츰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법조문은 변화하는 법현실에 비해서도 낙후되어 있다.

남북접촉 북쪽 일상도 바꿔

국보법은 북한의 존재 자체를 처벌대상으로 한다. 형법으로 처리하자는 것은 북한이 하는 짓을 보고 개별적으로 검토하자는 뜻이다. 북한이 협상과 화해로 나올 때는 헌법 제4조의 평화통일의 상대방이 된다. 북한이 간첩을 내려보내거나 우리 체제를 전복하는 행동을 보여주면 그 행위는 처벌한다. 무력 북진통일을 할 것이 아닐진대, 북한을 일률적으로 ‘반국가단체’로 묶어둘 이유가 없다.

왜 국보법 폐지를 그토록 걱정하는가. 국보법이 없어지면 뭔가 불안하다는 심리적 효과, 국보법이 있어야 반공을 국시처럼 보이게 하는 상징적 효과에 기대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보법은 안보를 지켜주는 ‘주술적 부적’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국보법은 통행금지 같은 것이다.

한 때 통행금지가 없어지면 심야에 범죄가 창궐할 것처럼 학습받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통행금지가 해제된 뒤 국민들은 빼앗긴 시간을 되찾았고, 치안상의 어려움은 약간의 보완으로 족했다. 지금 통금시대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동안 국보법은 사상·표현의 검열관이자 남북교류의 장애물로 되어 왔다. 법적용 빈도가 줄었다 해도 심리적인 검열관의 모습은 여전하다. 자유가 가위눌린 상태를 자유상태인 양 착각하지 말고, 국보법의 금단효과를 벗어날 때이다.

북한은 변함없는데, 우리만 무장해제해서 될 일인가 걱정도 한다. 두가지 예로 답하고 싶다. 지난해 만경대를 갔더니 ‘방명록’이 없었다. 물어보니 지난번 만경대 방명록 사건 이후 치워버렸다고 했다. 김일성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의사당에도 남측의 방문을 권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심지어 미국시민들의 선물이라고 표시된 쌀자루가 몇천만개나 유통되고 있다. 북한에 절실한 것은 이데올로기 전파가 아니라 달러벌이다. 이렇게 남북접촉은 북한의 일상을 점차 바꾸어가고 있다.

둘째로, 대한민국을 10달라 미만의 월급을 감수하고, 국가원수 비판한다고 감옥가는 나라로 전락시킬 수 없다. 인권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우리의 인권수준은 B+에서 A-로 이행 중에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선진국 문턱으로 넘어서기 위해서는 냉전-후진-독재의 표상, 국가보안법을 현실의 법전에서 빼내어 법제사(法制史)의 서고(書庫)로 옮겨야 한다.

한인섭(서울법대 교수,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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