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칼럼(pd) 2018-05-10   1680

[이제는 평화] 피고 대한민국에 ‘망각금지’를 선고하다

피고 대한민국에 ‘망각금지’를 선고하다

[이제는 평화] 베트남 시민평화법정이 우리에게 남긴 과제

 

임재성 변호사(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집행위원장)

 

 

“우리가 이겼어요!” 시민평화법정의 원고 석에 앉아있던 두 명의 응우옌티탄(동명이인)은 판결문 낭독이 끝난 후 두 손을 번쩍 들었다. 1968년 2월 12일 74명의 주민들이 한국군에 의해 학살된 베트남 중부 퐁니 마을에서 온 응우옌티탄의 ‘승소 소감’은 이랬다. 

 

“몸이 떨릴 만큼 좋습니다. 진실을 말하러 왔고, 최선을 다해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겼다는 판결까지 받았습니다. 마을에 돌아가 제가 보고 들을 것을 전하겠습니다” 

 

지난 4월 21~22일에 걸쳐 서울 마포 문화비축기지에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 열렸다. 2000년 도쿄에서 열렸던 일본군 ‘위안부’ 관련 민간법정(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을 롤모델로 하여 가해국의 수도에서 가해국의 책임을 묻는 민간법정이었다.  

 

1968년 2월에 한국군에 의해 발생한 퐁니 마을 사건, 하미 마을 사건을 대상사건으로 하여 각 마을의 생존자 2명을 ‘원고’로, 대한민국을 ‘피고’로 해 학살사실과 대한민국의 책임을 다뤘다.  

 

김영란 전 대법관, 이석태 변호사,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구성된 시민평화법정의 재판부는 이틀에 걸친 심리 끝에 피고 대한민국이 원고들에게 공식적 사과와 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지난 20년간 이어진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순간이었다. 

 

▲ 시민평화법정에서 판결선고 직후의 원고들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에 대한 부인과 망각 

 

1999년부터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들의 증언이 국내 언론에 보도되면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시작되었다. 2000년에는 한국군에 의해 베트남지역 80여 개 마을에서 9000여 명이 학살되었다는 연구 결과도 발표되었다. 최소한의 추정치였다. 한국 사회는 ‘가해자의 책임’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당시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한국 정부의 책임 있는 태도를 요구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불행한 전쟁’, 노무현 대통령은 ‘마음의 빚’ 정도의 언급을 하였을 뿐이다. 국방부를 포함한 그 어떠한 한국의 정부 기구도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인정이 없었으니 온전한 사과나 피해회복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 시민평화법정 원고 대리인 소장 요지 진술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베트남전 민간인학살에 대한 사회적 관심 역시 줄어들었다. 소수의 시민단체들이 베트남 민간인학살 지역을 방문·지원하는 활동을 이어갔을 뿐이다. 사회학자 윤충로 박사는 이를 ‘2차 망각’이라고 명명한다. 1975년 베트남전쟁 종전 이후 1999년까지가 ‘1차 망각’이라면, 2000년 중반 이후 한국 사회가 또 다시 자신들이 행한 학살을 망각한 것은 ‘2차 망각’인 것이다.

 

 

‘미안해요 베트남’의 제2라운드 

 

2015년 4월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생존자 분들이 최초로 한국을 방문하셨던 것은 망각을 깨는 계기였다. 한국에 온 생존자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학살을 증언했고, 참전군인들의 사과를 요구했다.  

 

수요집회에 참석한 베트남 생존자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이용수 할머니는 “여러분들도 베트남에 있는 한국 대사관 앞에 가서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데모를 하세요. 저도 돕겠습니다”라며 연대의 마음을 전했다.  

 

그해 8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 10여 명의 변호사들은 베트남에 방문하여 한국군에 의한 학살지역을 순례한 이후 ‘제도적 해결’에 대한 모색을 시작했다. 막연히 ‘정부의 책임’을 요구하는 것을 넘어서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들을 원고로 하는 국가배상소송이나 진상조사 특별법 발의 등 ‘제도적 해결’에 대한 법률적 검토를 진행했다. 

 

구수정 박사를 비롯해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활동에 오랜 시간 투신해온 활동가들과의 연대도 이루어졌다. 20년 가까이 이어진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새로운 라운드로 나가는 순간이었다. 

 

‘시민평화법정’의 기획은 그 과정에서 등장했다. 2차 망각을 깨면서 한국 사회의 여론을 환기시키는 운동이자, 학살에 대한 구체적 책임을 묻는 운동으로서의 법정. 그렇기에 시민평화법정은 ‘진실을 확인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는 자리’여야 했다.

 

▲ 증언하고 있는 퐁니 마을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높은 수준의 증거를 바탕으로 한 진실규명 

 

베트남의 학살 생존자들은 한국군이 왜 비무장한 자신과 가족들을 무차별적으로 쏘았는지 묻고 싶다며 울부짖어왔다. 시민평화법정의 원고들은 학살 사건 당시 8세, 11세의 소녀였다. 가족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본인 역시 큰 상해를 입었던 이들이다. 

 

반면 참전군인들은 이들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들은 민간인이 아닌 ‘베트콩’이었으며 한국군은 정당한 작전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 대립 속에서 정작 전쟁이라는 폭력에 대해 1차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한국 정부나 베트남 정부는 그 어떤 공식조사도 진행하지 않은 채 비겁하게 침묵해왔다. 50년 전 전쟁은 끝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시민평화법정은 법이라는 도구, 법정이라는 형식을 통해 진실을 규명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다. 80여 개로 추정되는 학살사건 중 1968년 2월에 발생한 퐁니·퐁넛 마을 사건과 하미 마을 사건, 2건에 집중하여 확보할 수 있는 모든 증거들을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퐁니 마을 사건의 경우 17년 만에 추가적인 참전 군인의 증언을 발굴했다. 1968년 2월 당시 청룡부대 1대대 1중대 2소대원이었던 참전 군인은 자신의 중대가 퐁니 마을에서 수십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실을 인정했다. 하미 마을의 경우 군사편찬연구소가 보관중인 파월한국군전사 부도(작전지도)를 통해 청룡부대 1대대 26중대가 학살을 자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밝혀냈다. 

 

정식 법정이 아니기에 ‘연극’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시민평화법정에 제출된 법률 서면과 증거들은 모두 실제 소송에서 사용될 수 있는 수준의 것들이었다. 시민평화법정 이후 실제 국가배상소송이 예정되어 있기도 했지만,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이었기에 더욱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재판부는 이러한 증거들을 바탕으로 ‘한국군에 의해 1968년 2월 12일 퐁니 마을과 같은 달 22일 하미 마을에서 불법적인 민간인학살이 발생하였다’라는 사실을 판결로서 인정하였다. 사회적으로 높은 신망을 받고 있는 법률가(법학자)가 구체적 증거에 근거하여 자신의 이름을 걸로 내린 판단이었다. 시민평화법정의 판결을 통해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의 ‘진실’은 분명 더 명료해졌다. 

 

▲ 시민평화법정 판결선고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이야기가 시작되는 법정 

 

시민평화법정은 ‘진실을 밝히는 장소’임과 동시에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소’이고자 했다. 시민평화법정이 형사재판이 아닌 국가책임을 묻는 민사재판의 형식을 채용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다.  

 

방아쇠를 당긴 군인들과 그 명령을 내린 지휘권자를 처벌하는 형사법정은 국가범죄의 책임을 일부 군인에게 한정시켜버릴 위험이 있다.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이고 이야기는 닫히게 된다. 시민평화법정은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를 피고로 상정함으로서 2018년을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에 대한 책임이 이야기될 수 있기를 바랐다.

 

이야기의 시작은 용기를 내 한국에 온 원고들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의 법정에서 거대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이 원고들에게 주는 중압감은 상당했다. 그러나 법정 기간 동안 원고들은 당당했고, 최선을 다해 자신이 견뎌온 고통을 전해주었다. 

 

이틀에 걸쳐 15시간 가까운 변론이 진행되었지만 휴정시간을 제외하고는 단 한 순간도 자리를 뜨지 않고 통역이 전해주는 재판의 내용에 집중하였으며, 한국 정부의 사과와 책임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원고들의 대리인은 최후진술에서 원고들의 청구는 피고 대한민국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순간을 목격하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법정에 모인 우리들이 1968년 학살을 행했던 이들은 아니겠지만, 그 학살이 50년 동안 가려져왔던 것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베트남전 파병이 경제발전의 큰 동력이었다는 역사 교과서 내용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법정에서 우리가 들었던 원고들의 고통 위에 지금 우리의 생활이 존재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소한 우리는 원고들의 고통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본의 전쟁책임에 천착해온 도쿄대 교수 타카하시 테츠야는 ‘책임'(responsibility)을 ‘응답가능성'(respond/ability)이라고 정의한다. 책임진다는 것은 누군가의 요청에, 고통에 응답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틀간의 법정은 끝났지만 원고들의 이야기에 응답하며 이야기를 이어갈 책임은 이제 시작이다. 

 

▲ 시민평화법정 방청객들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 시민평화법정 선고 이후 원고들의 발언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법정 이후의 과제 

 

시민평화법정 재판부는 피고 대한민국이 학살 피해자들인 원고들에게 배상하고, 사과해야 하며, 나아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인권침해 행위 전반을 조사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시민평화법정의 판결에 따른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이 원하지 않는다’라며 책임을 피하고 있지만, 시민평화법정에 선 원고들이 한국 정부의 사과와 책임을 요구했다는 것은 이미 수많은 언론에 보도되었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는 외교문제 이전에 인권문제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피해자 중심주의를 강조하는 문재인 정부가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에 같은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모순이다. 

 

시민평화법정을 통해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의 제도적 해결을 목표로 하는 제2라운드는 사회적 주목을 받으면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시민평화법정을 준비해온 법률가들은 한국 법원에 실제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할 준비를 곧 시작할 예정이다.

 

▲ 하미 마을 위령비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정부의 침묵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추가적인 증거확보를 위한 노력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시민평화법정에서 다룬 퐁니 마을 사건의 경우 1969년 당시 중앙정보부가 해당 부대원들을 조사하였는데, 국정원이 현재 그 조사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되었다. 이에 대한 정보공개청구소송의 첫 번째 변론기일이 5월 11일이다. 

 

하미 마을에서 온 응우옌티탄은 1968년 2월 22일 하미 마을에서 죽은 135명의 이야기를 자신이 대신 전하려 한국에 온 것 같다고, 그렇지 않았다면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판결문을 번역해서 보내준다면 꼭 마을 사람들과 나눠서 읽겠다고, 135명의 이름이 적힌 위령비 앞에도 놓아두겠다고 했다. 부디 건강하시길 바란다. 너무 늦지 않게, 시민평화법정에서 이야기했던 당신들의 요구에 우리 사회가 응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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