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사구시와 대북정책 (임원혁 美브루킹스연구소 객원연구원, 2006. 12. 13)

출처: 코리아연구원

오는 12월 18일 베이징에서 재개되는 6자회담을 앞두고 미국과 북한이 과연 어떻게 협상에 임할지 추측이 무성하다. 특히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북핵 폐기를 전제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서면으로 한국전쟁 종식 선언을 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표명한 데 대해 해석이 분분하다.

긍정적으로 보는 쪽에서는 비록 북핵 폐기라는 전제가 붙어 있긴 하지만 ‘한국전쟁 종식’이라는 표현은 2000년 10월 북미공동코뮈니케에 포함된 내용을 연상시킨다면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태도 변화를 상징하는 증거로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 우크라이나, 러시아 3개국 정상회담을 통해 최고지도자들이 안전보장과 핵폐기, 경제지원을 공약한 우크라이나식 해법으로 발전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도 현재 국면이 ‘클린턴 행정부 말기의 상황’을 방불케 한다고 평가하면서, 미국이 종전 선언과 북미 관계정상화, 대북 에너지 및 경제 지원, 다방면적인 유대 등 모든 현안을 부시 행정부 임기 내에 해결하자고 나선 것만 해도 큰 진전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2000년 10월 북미코뮈니케(북한과 미국이 적대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으로 2000년 10월 북한의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발표된 공동성명-편집자 주) 채택 이후 지난 6년 동안의 북미관계를 돌이켜보면, 최근 부시 행정부의 제안에 대해 이처럼 긍정적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사실 부시 행정부에 의지가 있었다면, 북미공동코뮈니케의 정신을 확인해 달라고 한 북한의 요청을 받아 들여 2001년 상반기에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와 관계 정상화를 일괄 타결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만의 하나 북한이 1994년 제네바 합의 이전 1~1.5개의 핵폭탄에 해당하는 핵물질을 추출했다고 해도, 북한의 플루토늄 프로그램을 동결한 상태에서 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한 투명성을 제고하고 북미 관계정상화에 따라 북핵을 폐기하는 수순을 밟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당시 그것을 거부했다.

제네바합의의 와해로 인해 북한이 6~8개의 핵폭탄에 해당하는 핵물질을 확보하고 핵실험까지 감행하자 비로소 북한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태도가 바뀌었을까? 그렇다면 지난 5년 동안의 행동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실제로 부시 행정부가 이번에 제안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직까지는 북한의 원자로 가동 중단 등 실질적인 행동을 전제로 미국은 금융제재 해제 검토 등 상징적 조치만 취하겠다는 성격이 강하다.

미국은 북한이 취할 초기 조치로 (1) 영변 핵시설 가동중지 (2)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수용 (3) 모든 핵 프로그램 신고 (4) 핵 실험장 폐쇄 등 4가지 사항을 요구한 반면, 북한이 얻을 ‘조기수확(early harvest)’에 대해서는 실무그룹(working group)을 설치하여 검토하겠다고 제안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중장기적으로 (1) 확인된 북한의 핵시설 동결 및 사찰 (2) 미확인 핵 프로그램 신고 및 사찰 (3) 핵 프로그램 완전 폐기에 이르는 절차에 상응해 미국이 대북 관계 개선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지도 아직 불분명하다.

상호 위협감축과 동시행동이라는 원칙에 따라 북한 핵·미사일 문제와 관계정상화를 일괄 타결하겠다는 입장에서 여전히 벗어나 있는 것이다. 지난 10월 9일의 핵실험으로 협상력을 끌어올렸다고 생각하고,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면 공세적 협상 행태를 보이곤 하는 북한이 미국에 일방적으로 양보를 할 가능성도 없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는 제5차 6자회담 2단계 회의에 대해 근거없이 낙관적인 전망을 할 것이 아니라 미국과 북한이 ‘실질적인 초기조치’를 취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제로 2000년 10월 북미공동코뮈니케 채택 이후 북미관계가 전개된 과정을 돌이켜 봐도 이와 같은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북한이 놓쳐버린 기회

1999년 이후 북한과의 미사일 협상을 이끌던 웬디 셔먼 대사는 2001년 3월 7일자 <뉴욕타임즈> 기고문을 통해 “미사일 방어체제(MD)를 구축하는 것이 나름대로 논리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 체제가 제대로 작동될 때까지는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될 것이기 때문에 북한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차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하면서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의 협상을 계속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이렇게 셔먼 대사가 미사일 협상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신임 행정부에게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공개적으로 부탁하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북한이 북미협상을 지연시킴에 따라 클린턴 행정부 임기 내에 협상을 완료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정상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통제를 강화하는, 더 많이 주고 더 많이 받는 접근법(more-for-more approach)을 채택한 것은 1999년 9월의 일이다.

페리 프로세스를 마무리한 미국은 그 달 17일, 그 때까지 적성국무역법에 의거해 북한에 대해 적용하던 경제제재를 일부 해제하면서 북미관계 정상화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다. 이에 호응해 북한은 24일 북미 고위급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미사일 발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처럼 클린턴 행정부가 대북 무관심 정책을 관여정책으로 전환하고 북한이 이에 화답하자 북미관계는 급속히 개선될 듯 했다. 그런데 북한은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그 뒤 1년 동안 시간을 허비했다. 심지어 미국 국무부의 관리가 북한의 협상 상대에게 “클린턴 행정부 임기 말까지 기다렸다가 밀어붙일 의향인 것 같은데, 앞으로 미국내 정치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고 경고까지 했지만, 북한은 2000년 10월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해 공동코뮈니케를 발표하기 전까지는 북미협상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조명록 차수의 워싱턴 방문이 6개월 정도만 앞당겨졌어도 북미 미사일협상이 타결되고 클린턴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관계정상화를 이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북일 관계정상화도 탄력을 받았을 것이고, 아무리 부시 행정부라고 해도 대북정책을 180도 전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북한이 2000년 5월, 6월, 7월에 각각 북중, 남북, 북러 정상회담을 통해 중국, 한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시킨 데 반해,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열리기 한 달 전까지 북미관계 개선 노력을 유보한 것은 큰 실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셔먼 대사가 2001년 3월 뉴욕타임즈 기고문을 통해 북미협상을 계속 추진하도록 촉구한 두 번째 이유는 그 때 이미 부시 행정부가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전면 부정할 것이라는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반감과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면서 미사일 방어체제를 강력히 추진할 의향을 보이자, 셔먼 대사는 북미협상을 통해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국가안보에 부합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포착되었다고 하는 2002년 여름까지는 아직 1년도 넘는 기간이 남아 있는 시점이었다.

즉, 북한이 제네바합의를 위반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포착되기도 전에 미국의 대북정책은 전환된 것이다. 2001년 3월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회의감을 표명하며 이와 같은 입장을 분명히 드러냈다.

미국의 대북정책 전환과 남북한의 대응

부시 행정부는 ‘과거의 적대감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공약한 북미 공동코뮈니케의 정신을 확인하기는커녕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관여정책을 폐기하고 악의적 무시정책을 추진했다.

부시 행정부는 국가안보가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북한과의 미사일 협상을 중단하고, 북핵 프로그램의 단계적 폐기에 상응해 대북 지원과 북미 관계정상화를 상정한 제네바합의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북한의 악행에 대한 보상은 있을 수 없고, 부도덕한 북한 정권은 협상 상대가 아니라 교체의 대상이라는 것이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부시 행정부 내 강경파의 입장이었다.

이와 같은 태도는 9.11 테러를 계기로 더욱 강화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2002년 1월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지목하면서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도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 다음 달에 열린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대북 강경정책의 위험성을 부각시키고 부시 대통령과 함께 도라산역을 방문해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냈으나, 북한 정권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북미관계가 교착상태가 빠지자 2002년 4월 김대중 정부는 대북 특사 파견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북한도 북미관계 개선이 이뤄지기 전에는 남한과 상대하지 않던 과거 행태에서 벗어나,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1년간 침체 상태에 빠졌던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기 시작했다.

북한은 2000년 이후 개선된 한국,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2002년 9월 북일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등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북미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풀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엔 대북 강경정책을 추진했던 클린턴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부시 행정부도 결국엔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모색할 것으로 당시 북한은 판단했던 것 같다. 북한은 대외관계 개선 노력과 함께 개혁·개방 조치를 취함으로써 ‘고난의 행군’ 시대의 외교적 고립과 경제적 궁핍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 등 부시 행정부 내 온건파는 이와 같은 북한의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북미대화를 추진했으나, 강경파는 북한의 변화를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더 큰 맥락에서 본다면 미국 해전대학(Naval War College)의 조나단 폴락(Jonathan Pollack) 교수도 지적한 바와 같이, 미국 내 일부 정책담당자들은 북한의 변화와 남북정상회담, 북일정상회담 등으로 인해 미국이 동북아 내에서 주도권을 상실할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2002년 북한의 개혁·개방, 남북 철도·도로 연결 합의, 북일정상회담 등 동북아 냉전구도의 해체를 촉진시키는 일련의 움직임이 있은 직후,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의혹이 제기되었다는 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2002년 10월 미 국무부의 제임스 켈리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한 이후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국이 파악하고 있는 북한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의 실체는 제대로 공개된 바 없다. 북한이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구축에 필요한 핵심 설비 및 기술을 습득하였는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 채,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이 완성되면 해마다 2~3개의 핵폭탄에 해당하는 핵물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식의 ‘조건부 추정치’가 있을 뿐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2002년 10월 부시 행정부가 취한 행동이 1999년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관련 첩보를 이미 입수했던 클린턴 행정부의 행동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클린턴 행정부가 실체적 위협인 북한의 플루토늄 프로그램에 대한 동결상태를 유지하면서 북미관계 개선을 통해 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한 투명성도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반면, 부시 행정부는 그 실체도 불분명한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빌미로 대북 중유공급을 중단함으로써 제네바 합의가 와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북한의 플루토늄 프로그램에 이어 우라늄 프로그램도 통제하는 방향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 제네바 합의의 틀 그 자체가 파괴되도록 한 것이다.

제2차 북핵위기의 전개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대북 중유공급이 중단된 시점에서 시작된 제2차 북핵위기는, 이미 몇 년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공포영화의 속편처럼 전개됐다.

북한은 IAEA 사찰요원을 축출하고 8000여 개의 폐연료봉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해 재처리를 하겠다고 위협했고, 미국은 경수로 공사를 사실상 중단시키는 한편 북한에 대한 ‘맞춤형 봉쇄’ 및 군사적 조치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제1차 북핵위기 때의 경험을 살려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 등 미국의 일부 전직 관리들은 북한이 플루토늄을 재처리하지 못하도록 금지선(red line)을 긋고 북한과의 직접 대화에 나서도록 권고했으나, 당시 이라크 전쟁을 준비하기 바빴던 부시 행정부는 북한에 대해 ‘강압도 없고 외교도 없는’ 노선을 선택했다. 이에 북한은 플루토늄을 재처리해 핵물질을 확보하는 한편 동결되어 있던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시켰다.

1994년의 제1차 북핵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일촉즉발로 치닫던 상황은 곧 외교적 노력에 의해 통제되기 시작했다. 2003년 4월 북미중 3자회담에 이어 6자회담 체제가 자리를 잡았고, 미국과 북한 사이에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미국이 북한을 무시하거나 적대시하는 모습을 보이면 북한이 벼랑끝 전술을 통해 판을 흔들면서 군사적으로 실리를 취하는 것도 10년 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위기가 비등점으로 치달아야 미국이 북한과의 본격적인 협상에 나서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개성공단으로 상징되는 북한의 긍정적 변화를 환영하기보다는 오히려 투명성 문제를 제기하고, 북한이 긴장을 고조시켜야 비로소 관심을 보였다.

피터 헤이즈 노틸러스 연구소장이 지적한 바와 같이 북한도 북한대로 마치 스토커처럼 위협을 가하면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 2005년 2월 10일 북한이 핵 보유를 선언하고, 미사일 발사 유예 조치를 폐기하는 한편, 영변 원자로에서 핵물질을 추가적으로 추출하자 미국은 북한과의 양자채널을 가동하여 북핵문제의 해결을 모색했다.

이처럼 10년 전에 이미 한 번 겪어본 과정을 거쳐 제네바합의의 증보판이나 다름없는 9.19공동성명이 도출됐다. 한반도 비핵화, 북미·북일 관계 정상화, 양자·다자간 경제협력 증진, 동북아시아의 항구적 평화와 안정 추구를 공동의 목표로 설정하고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에 원칙에 입각해 단계적 방식으로 이행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제2차 북핵위기의 결말

하지만 기본구도는 비슷하나 원작보다 못한 속편처럼 제2차 북핵위기는 몇 가지 측면에서 제1차 위기 때와 다르고, 이미 4년이 지났지만 제1차 위기 때와 같이 극적인 결말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북미 양자협상 대신 6자회담이라는 다자협상 체제가 구축된 점이다. 미국측 논리에 따르면 북한과의 양자협상 방식은 이미 북한이 제네바합의를 파기함으로써 그 한계가 드러났으므로 이번에는 미국과 북한 외에 4명의 증인을 입회시키는 식으로 합의 이행을 담보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논리일 뿐이고, 부시 행정부 내 강경파의 구상은 6자회담에서 북한을 상대로 ‘5 대 1의 인민재판’ 구도를 만들어 북한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다.

이처럼 협상에 의한 문제 해결 대신 압박에 의한 항복을 꾀하는 미국내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득세가 제1차 북핵위기와 제2차 위기 사이의 가장 큰 차이다.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동북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북한의 행동은 외교를 통해 예방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대북제재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 된다.

실제로 지난 1~2년간 부시 행정부의 일부 관리들은 북한이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을 할 것으로 공공연히 예상하면서 오히려 이와 같은 북한의 행동을 환영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대북정책에 대한 미국내의 논란을 잠재울 호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페리 전 국방장관 같은 정통보수론자와는 달리 이들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가중되는 것을 용인했다. 또, 북한정권의 부도덕성을 부각시킴으로써 북한정권이 타도의 대상이지 진지한 협상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부시 행정부 내 온건파도 이런 입장을 의식해 북한 외무성보다는 미국 내 강경파를 상대로 협상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다.

작년 9.19공동성명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직후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가 폐회성명을 통해 북미 관계정상화가 요원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대북 경수로 제공 문제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미국내 강경파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수로 제공을 클린턴식 굴욕외교의 상징으로 규정해 온 부시 행정부로서는 제네바 합의의 증보판 같은 9.19공동성명의 실체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경수로를 확보하기 이전에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맞불작전을 폈다. 또 방코델타아시아(BDA)와의 거래에 대한 미국의 제재조치를 대북 적대정책의 징표로 간주하고, 9.19공동성명의 정신에 입각해 무차별적인 금융제재를 해제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2006년에 들어서도 북한은 부시 행정부 임기가 끝날 때까지 소극적으로 버티기보다는, 미사일 시험발사를 재개하고 최초로 핵실험을 감행하는 등 공세적인 전략을 폈다. 2000년 이후 외교적 고립과 경제적 궁핍 상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면서 자신감을 상당 부분 회복하고, 2002년 이후 추가로 핵물질을 확보한 북한이 미국을 압박하게 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먼저 핵을 폐기할 것을 요구하는 미국의 압박에 밀려 북한이 일방적으로 양보할 가능성은 없다.

또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북한 문제를 현 상태로 관리하는 것 또한 별로 현실성이 없다. 북한은 미사일 시험발사를 다시 한 번 추진하고 핵물질을 추가적으로 추출하는 한편, 현재 가동되고 있는 영변 원자로보다 10배의 핵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50MW 원자로 건설을 통해 미국을 압박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상호위협감축과 동시행동의 원칙에 따라 9.19공동성명을 이행하는 수밖에 별로 묘안이 없다. 즉, 이미 확인된 북한의 핵시설을 동결하는 대가로 대북 지원과 관계 개선의 초기 조치를 취하고, 상호 미확인 핵프로그램에 대한 신고 및 검증 절차를 거치면서 궁극적인 핵 폐기와 관계 정상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임원혁/美브루킹스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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