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합의는 20세기의 종언을 시사하는가? (서재정, 프레시안, 2007. 2. 21)

‘동아시아의 지각 변동’이 시작되었는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합의 직후 동북아 전문가인 개번 맥코맥 호주 국립대 교수는 ‘2.13합의’를 1970년의 ‘닉슨 쇼크’를 무색하게 할 만한 미국의 정책변화라며 이를 ‘부시 쇼크’라고 불렀다.

이는 핵문제 해결에 있어서 북미 양자협상과 외교적 타결에 반대하던 조지 부시 미 행정부의 입장이 전적으로 바뀐 결과이며,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다자적 탈(脫)미국헤게모니 질서’가 동북아시아에서 형성되기 시작하는 첫 걸음이라는 것이다.

소위 ‘북핵문제’는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했다는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한국전쟁 시기부터 북에 핵위협을 행사해 왔다는 반세기에 걸친 양자적 문제이다.

전쟁으로 일방이 파멸을 맞지 않는 한 양자가 동시적으로 ‘행동 대 행동’을 취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인 구조라는 것은 이번 합의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북한과 미국은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도움을 받아 반세기를 끌어온 지루하고도 파괴적인 대립관계를 끝내는 전환점에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보다 긴 역사적 호흡으로 보자면 아시아가 적어도 19세기말 경부터(일본은 그 이전부터지만) 꿈꿔 왔던 근대적 민족국가 수립이 100년 이상의 굴곡과정을 거쳐 마침내 이뤄질 전기를 맞고 있다.

민족 단위로 국가를 수립해 구성원에게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안보를 보장해준다는 근대적 이상은 아시아인들에게는 이루기 힘든 꿈이었다. 이제 경제적 성장에 더해서 안보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틀이 6자회담을 통해서 이뤄진다면 아시아의 근대적 꿈은 21세기 탈근대시기에 와서야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한민족에게 있어 이것은 평화와 통일이라는 모습으로 이루고 싶다는 꿈일 것이며, 이것은 6자회담 합의를 계기로 현실로 한 걸음 다가서고 있다.

또한 6자회담 합의는 냉전의 등장으로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으로 양분되었던 아시아가 반세기가 넘는 동북아시아의 분단을 끝내는 전환점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러시아와 중국, 북한을 일방으로 하고 미국과 한국, 일본을 또 다른 일방으로 하는 냉전의 분단은 이미 사회경제·문화적으로는 무너지고 있으나, 정치적 분단선은 완강히 남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한미일 삼각동맹에 북한과 중국을 대척점으로 놓은 신냉전적 단층선이 서서히 부각되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6자회담은 이러한 냉전적 혹은 신냉전적 아시아의 분단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민족국가적 꿈이 완성되는 순간 나타날 수 있는 국가간 경쟁과 안보딜레마의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틀을 6자회담은 동시적으로 열어주고 있다.

6자회담 합의는 동아시아의 ‘100년 위기’를 끝내고, 뒤늦게나마 21세기 새로운 질서를 여는 ‘지각변동’의 서곡인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변화?

그러나 이러한 거시적인 관점은 미시적인 분석과 결합될 필요가 있다. 6자회담의 중요한 당사자이자, 동북아시아 지각구성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이 이 방향으로 갈 것이냐는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2.13합의’로 가는 과정에 대한 미시적 분석에서 부분적이나마 찾을 수 있다.

이번 2.13합의는 적어도 북핵문제에 관한 한 부시 행정부의 정책이 이전의 네오콘적 근본주의 접근방법에서 탈피해 보다 현실적인 접근방식을 채택했음을 시사한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두고는 여전히 군사력 사용을 포함한 강경책을 구사하고 있는 데 비해, 북한에 대해서는 외교적 해결에 합의했다는 점에서 부시 행정부의 전반적 전략 수정이라기보다는 대북정책의 부분적 변화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제한적 변화는 아직 취약한 기반에 기초하고 있다. 언론의 보도로 이번 2.13합의의 과정을 추적해보면 소수의 관리들이 이 합의를 추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 베이징 합의의 계기는 작년 말 빅터 차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부보좌관이 작년 12월 베이징 공항에서 북한 관리들과 우연히 마주쳐 의견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이 ‘우연한 만남’은 지난 1월 중순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부상 간의 베를린 회동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이뤄진 양자간의 일정한 합의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보고되었고, 라이스 장관은 스티븐 해들리 국가안보보좌관과 부시 대통령에게 직통전화를 해서 승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6자회담에서 합의된 초기이행조치는 구체적 내용에서 다소 차이는 있지만 큰 틀에서는 베를린 회동에서의 합의가 모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베를린 합의의 중요성이 있다.

반면에 그 과정은 이 합의가 부시 행정부나 미국 정치권 내에서 광범위한 의견수렴 과정과 지지기반 구축 없이 소수에 의해서 조속히 이뤄졌다는 취약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2.13합의가 발표되자마자 행정부 밖에서는 존 볼턴 전 유엔대사가 부시 정책의 기본원칙에 위배되는 ‘문제아’라고 비판하고 나섰고, 행정부 내에서는 엘리엇 에이브럼스 NSC 부보좌관과 로버트 조지프 국무부 차관 등이 이메일을 돌려 이 합의가 적절한 내부 절차를 거치지 않은 부적절한 ‘사생아’라고 걸고 나섰다.

이에 대응해 부시 대통령과 라이스 국무장관은 공개적으로 이 합의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일단 정부 내에서의 진화에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고, 이 불씨는 정부 밖의 비판자들이 계속 부채질하는 가운데 2.13합의를 태워버릴 잠재적 파괴력을 보유하고 있다.

네오콘과 보수진영이 이 합의를 ‘악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저버린, ‘신앙에 기초한 비확산정책’이라고 비판한다면, 민주당과 반핵세력 등 자유주의 진영은 부시 행정부가 결국 문제만 키워놓고 근본적 문제인 북한의 핵무기는 해결하지 않은 미봉책으로 현상을 무마한다며 비판하고 있다.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대한 전면적 검토와 전망 없이 ‘북핵조치’만을 둘러싼 정치공방이 벌써 불붙기 시작한 대선경쟁과 맞물리는 와중에, 베이징에서 초기이행조치에 대한 합의가 발표된 직후인 16일 워싱턴에서는 ‘신 아미티지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과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가 공동 대표저자로 나선 이 보고서는 당면 현안에 대한 정책제안뿐만 아니라 2020년까지 아시아가 변할 모습을 예측하며 미국의 장기적 아시아 정책을 제안하고 있다.

합리적 보수와 합리적 자유주의 간의 합의를 추구하는 이 보고서는 “아시아를 위한 가장 훌륭한 구조는 미국의 힘과 공약, 지도력”이며 “미국이 아시아에서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전략적 자산은 미일동맹”이라며 미국과 미일동맹을 근간으로 하는 아시아 질서의 재편성을 시사하고 있다.

물론 일방주의적 군사력 행사를 비판하고 다자적 접근과 아시아 국가의 참여를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미국식 ‘중도파’의 무게중심이 어디인지는 쉽게 드러난다.

‘2.13 초기이행조치’라는 신생아

이번의 베이징 합의는 ‘동아시아의 지각변동’을 낳을 씨앗을 잉태하고 있지만 그 앞길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미국만 보더라도 단기적으로는 좌우의 협공을 받고 있고, 중장기적으로도 동아시아를 미일동맹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힘을 얻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와 동아시아의 안정, 아시아의 ‘근대 프로젝트’ 완성이라는 꿈을 완성시킬 ‘신생아’는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이 신생아를 어떻게 키워, 어떠한 성인으로 성장시킬 것이지는 모두에게 던져진 과제다. 그 과제를 둔 거대한 각축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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