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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군축센터    한반도 평화를 위해 비핵군축운동을 합니다

  • 자료-시민사회
  • 2007.04.10
  • 562
무엇이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변화시켰나



- 2.13합의는 성공할 수 있을까?

지난해 10월 9일 오전 10시 36분. 한반도 최초의 핵실험으로 함경북도 풍계리 부근에 인공지진이 발생했다. 핵폭발치고는 예상보다 작은 TNT 1000톤의 위력과 맞먹는 1킬로톤에 조금 못 미치는 규모였다. 그러나 그 정도 규모라도 대도시에서 터질 경우 수천 명을 즉사시킬 수 있다고 지그프리드 헤커 전 미 국립핵연구소장이 말했다.

북한은 이 핵실험을 “100% 우리의 지혜과 기술”로 이뤄 낸 역사적 사건이라며 자축하였다. 북한 당국은 핵실험을 한 지 11일이 지난 후에야 핵 보유국이 된 일을 대대적으로 자축하기 시작했다. 평양 시내 곳곳에는 ‘핵 보유국이 된 5000년 민족사의 역사적 사변을 길이 빛내자’는 대형 선전 간판들이 나붙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이 핵 보유국에 합류할 경우 북한의 핵물질 및 관련 프로그램의 제거를 목표로 했던 6자회담은 사실상 끝이라는 견해가 보편적이었으며, 나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의 판단은 틀렸다.

1월 중순,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비공식적으로 베를린에 있는 각국의 대사관에서 회담을 갖고, 2.13 합의의 기본적인 틀을 잡는데 성공하였다. 그 합의 이행을 위해 힐 차관보와 김계관 부상은 3월 5일과 6일에 유엔본부 미 대표의 숙소에서 다시 회담을 갖고 4월 중순을 시한으로 하는 합의의 구체적인 이행조치를 마련했다. 그 이행조치에 따르면 북한은 영변 원자로를 폐쇄하고, 3년 전에 추방되었던 국제 핵사찰단의 입국을 허용해야 한다. 한편, 미국은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대한 미 재무부의 조사를 중단하고, 북한에 대한 대적성국 교역법 적용을 중단하고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는 절차에 착수해야만 한다.

어떻게 그리고 왜 미국의 대북정책이 선회하게 되었는가? 그 몇 가지 요인들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2006년 10월 9일, 북한의 핵실험

- 40여년에 걸친 북한의 핵개발 노력은 이번 핵실험으로 인해 절정에 이르렀으며, 동북아의 안보 환경을 바꿔 놓았다.

이 실험은 북한의 핵개발을 견제하지 않는다면, 북한은 계속해서 핵무기를 생산하고 핵실험을 재차 반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는 일본, 한국, 대만을 위시한 아시아 전역의 군비 경쟁을 야기할 수 있다. 또한 북한이 추가적으로 플루토늄을 생산하여 반미국가나 하위국가 그룹(subnational groups)들에게 판매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미국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다. 북한의 군사 시설에 대한 무력 공격 가능성은 큰 위험 부담과 비효율성으로 인해 배제된 상황에서, 외교적 접근만이 미국의 국가안보와 세계질서를 수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떠오른 것이다.

20세기 전반을 살펴보더라도, 미국은 북한이 자국 혹은 그 동맹국에게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인정할 때라야 제대로 된 관심을 기울여 왔다. 1950-53년의 한국 전쟁, 1993-94년 북한의 핵무기 개발 계획은 1994년 제네바 합의로 이어졌으며, 1998년 북한의 탄도미사일 실험 이후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과의 협상이 이뤄 졌다. 또한 제네바 합의의 결렬과 북한의 핵물질 생산은 6자회담을 이끌어 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았을 때, 지난 10월 북한의 핵실험이 미국 정책 결정자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다만 이번 협상이 지금까지 이토록 빨리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만이 놀라울 뿐이다.

2. 작년 11월 중간 선거 결과로 인한 공화당의 정치적 입지의 급격한 변화

중간선거를 통해 반대파인 민주당은 상하원 모두를 차지하였다. 상하원을 이끌게 된 민주당은 이라크뿐만 아니라 아시아에 대한 부시의 외교정책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만약 새롭게 대두된 핵위협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부시 행정부는 아마도 혹독한 미 의회 청문회 및 동북아 정책에 대한 의회 조사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3. 부시 행정부 내의 정치지형의 변화

- 존 볼튼과 대북 개입정책(engagement) 반대자들의 사임

미국 내 정치지형의 변화는 적대국에 대한 개입정책에 강력하게 반대해 왔던 세력의 선봉에 서 있었던 체이니 부통령의 영향력 또한 감소시켰다. 남한의 한 고위 외교관이 윌리엄 페리 전 장관에게 왜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바꼈는지를 묻자,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체이니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이지요.”

4. 미국과 함께 북의 탄도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에 반대해 왔던 중국의 영향

중국은 북한의 핵실험이 일본, 한국 그리고 대만의 핵무기 개발 의지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북한의 핵무장을 반대해 왔다. 더욱이 2003년 이래, 6자회담의 주최국으로서 중국의 역할은 지역 차원의 영향력 면에서나 미국과의 관계 차원에서 중국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중국의 지도자들은 미국에게 북한과의 대화할 것을 설득하는 등 6자회담의 붕괴와 동북아 핵무장을 방지하기 위한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할 각오를 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대북한 정책 변화를 이끌어낸 핵심적 요인은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의 노력이다. 물론 힐 차관보가 부시의 개인적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불확실하다. 힐 차관보는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정책 조정관으로 대북 협상을 이끄는 인물로 부상했다. 힐은 외교관 시절 초기에 주한 미 대사관에서 잠시 일했다. 하지만 2004년 이전에는 대부분 유럽에서 보냈다. 폴란드어,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 마케도니아어, 알바니아어를 할 줄 안다. 95∼97년 리처드 홀브룩 특사의 보좌관으로 보스니아에서 위험 부담이 큰 외교협상에 참여함으로써 처음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홀브룩은 힐을 “명석하고, 겁이 없으며, 논리적으로 따지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힐은 2004∼05년 주한 미대사로, 2005년 4월 이래는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똑같은 평가를 받았다.

지난 2년간 힐 차관보의 가장 중요한 협상은 북한이나 다른 국가들 보다는 국내에서 부시 행정부와 이루어졌다. 그는 부시 행정부 내 보수파들에 의해 제한되었던 자신의 협상 권한을 두고 싸워야 했다. 힐 차관보는 선임자인 제임스 켈리와는 달리, 때때로 이 싸움에서 이기기도 하였다. 지난 2005년 8월 내가 힐 차관보에 대해 평을 한 글을 보면, “그는 마치 공을 받으면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부 장관의 보호 아래서 미국이 처한 위험 수준이 어느 정도 인가를 판단하여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멀리 달려나가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때때로 그는 김계관 부상과의 모임을 개최하는 등 스스로 과감한 조치를 취하고 차후 행정부 내 비판세력에게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때때로 그의 노력은 북한과의 협상을 반대하는 내부의 적들로 인해 좌절되기도 했다. 힐 차관보가 발 빠르게 움직여 김계관 부상과 우호적인 실무 관계를 만들어 내자, 김 부상은 힐 차관보를 2005년도 가을과 2006년도 5월 평양에 초청한 바 있다. 그러나 힐 차관보의 방문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후, 토니 스노우 백악관 대변인은 “미국은 북한과의 양자협상에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2006년 4월에는 동북아협력대화(Notheast Asia Cooperation Dialogue)의 비정부 전문가들이 힐 차관보와 김 부상을 도쿄 회의에 초청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참석은 할 수 있었으나, 힐은 김 부상과의 협상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북한 핵실험 이후 양자회담을 통해 힐 차관보와 김 부상 사이에서 합의된 조치들에 더 주목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북한의 핵실험 직후, 유엔 안보리는 만장일치로 북한을 강력히 “비난했고”, 북한의 핵과 미사일 관련 기구들에 대하여 경제적•정치적 제재를 채택하였다. 특히 중국은 북한의 탄도 미사일 실험이 있었을 때와 같이 북한에 대한 제재를 찬성하였다. 중국이 제공하는 식량과 에너지 그리고 정치적 보호에 의존해야 하는 북한은 중국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었다. 중국 쪽으로부터 나온 보고서는 중국의 불편한 심기를 강조하고 있으며, 중국은 북한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중단하고 북한 주민들이 압록강을 건너는데 필요한 교량작업을 갑자기 중단하였다. 북한의 핵실험이 있은지 10일이 지난 10월 19일, 중국의 외교 담당 국무위원이며 전 외교부장이었던 탕자쉬안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6자회담에 복귀할 것과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해 융통성 있게 협력할 것을 제안하였다. 탕자쉬안은 베이징으로 돌아와서 미 국무부 장관인 라이스에게 이를 통지하고 힐이 베이징으로 와 김 부상을 만날 것을 요청하였다. 힐과 김 부상, 중국측 협상자 몇몇과 우다웨이 부부장 사이의 7시간에 걸친 논의 끝에 북한을 포함한 6자회담의 재개가 가능했던 것이다.

막대한 외교적 노력이 집중되었던 11월 협상 이후,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열렸던 6자회담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북한은 핵 프로그램에 대한 협상 자체를 거부하고 미국측에는 국내로부터 충분한 지시를 받지 못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그 협상이 끝나던 날, 힐은 자신의 보좌관인 김성용 국무부 한국과장을 북한 대사관으로 보내 베이징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김부상을 만나 핵문제를 논의하고 싶다는 메세지를 전달하였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이틀 후에 힐에게 유럽에서 만나자는 김 부상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이것이 바로 1월 16일로부터 18일까지 열렸던 베를린 회담의 시초가 되었던 것이다. 이 회담을 통해 비로서 돌파구가 마련되어 북한의 핵관련 활동을 중단시키고 미국으로 하여금 융통성과 타협을 끌어낼 수가 있었다.

라이스 장관은 지난 1월 17일 중동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베를린에 잠시 들려, 힐로부터 직접 브리핑을 받았다. 이후 그녀는 부시 대통령과 그녀의 전 보좌관이자,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인 해들리에게 전화를 걸어 힐이 김 부상과의 협상을 통해 마련한 대략적인 (문제해결) 틀에 대한 승인을 요구하였다.

2.13 합의와 뉴욕에서 며칠에 걸쳐 열렸던 회담을 통해 이루어진 진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무기 생산의 중단과 궁극적인 비핵화를 이루어지기까지는 해결해야 할 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다.

북한이 영변 원자로에서 생산된 플루토늄과는 구별되는 고농축 우라늄의 존재를 시인하고 생산을 중단할 것인가가 한가지 난관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파키스탄은 핵무기 원료와 기술의 불법 거래에 관계했던 칸 박사로부터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을 만큼의 원심분리기를 제공받았다는 충분한 증거를 제시한 바 있다. 이 정보는 2002년 부시 행정부가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위반하고 있다고 주장했을 당시, 근거로서 이용되었다. 이러한 혐의는 미국과 북한의 제네바 합의의 결렬로 이어졌고, 북한은 전면적으로 영변에서의 핵활동을 재개하여 10월 9일 실험에 사용된 플루토늄을 생산하였다.

미 행정부와 과학 기관들 사이에서는 과연 북한이 무기급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하기에 충분한 원심분리기와 핵물질 원료를 확보•제조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다. 이러한 의구심은 지난 2월 말, 미 국가정보국 북한 담당자 조지프 디트라니의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표출되었다. 그의 증언은 부시 행정부가 2002년, 쓸데없이 제네바 합의를 좌초시켜 북한의 핵무기 개발로 이어지게 했다는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

김 부상은 최근의 협상 자리에서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몇 번이나 고농축 우라늄과 관련하여 미국과 논의할 의향이 있음을 밝혀 왔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논의 자리가 마련된다 하더라도 미국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힐은 북한에게 핵물질 생산을 위해 그동안 북한이 취했던 모든 조치들을 “밝히고” 협상에 나올 것을 요구해 왔다.

6자회담 당사국 모두가 수용하고 승인한 2·13 합의에는 여러 가지 세부적인 이행 사항이 들어 있다. 그 하나하나가 미국과 북한, 그리고 다른 관련국들 사이에서 치열한 협상 대상이다. 힐 차관보와 김 부상은 뉴욕회담에서 그중 일부 사항을 다뤘다. 두 사람은 회담이 끝난 뒤 초기협의가 잘 진행됐다는 듯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북한이 지하핵실험을 실시한지 4개월 만에 북한의 핵정책을 바꾸기 위한 협상들이 이만큼까지 진척되었다는 것과 부시 행정부가 이처럼 큰 노선변경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중 어떠한 것도 향후 논의가 순탄하거나 긍정적인 결과물이 담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도 여전히 매우 높다. 그러나 또한 성공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한반도 비핵화를 바라는 외교관들의 부단한 노력의 직접적인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So Far, So Fast: What's Really Behind The Bush Administration's Course Reversal On North Korea-And Can The Negotiations Succeed?"

By Don Oberdorfer

At 10:36 a.m. last Oct. 9, the first nuclear blast ever to shake the Korean peninsula created an artificial earthquake near P'unggye in the remote northeastern corner of North Korea. As nuclear detonations go, it was smaller than expected-less than 1 kiloton, the equivalent of 1,000 tons (2 million pounds) of TNT. However, that would be enough, according to U.S. expert Siegfried Hecker, former chief of the U.S. nuclear laboratory at Los Alamos, to kill instantly many thousands of people if it exploded in a major city.

North Korea hailed the blast as a historic event that had been conducted entirely with "indigenous wisdom and technology." Following an unexplained delay of 11 days, it began holding mass celebrations of the country's nuclear status. Signs were erected on Pyongyang street corners declaring LET US MAKE SHINE FOREVER OUR BECOMING A NUCLEAR POWER, A HISTORIC INCIDENT IN THE 5,000 YEARS OF OUR PEOPLE'S HISTORY.

The widespread belief, which I shared at the time, was that North Korea's entry into the nuclear weapons club would mean the virtual end of the Six-Party Talks aimed at rolling back and eventually eliminating the country's nuclear materials and programs. I was wrong.

In mid-January, U.S.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Christopher Hill and North Korean Vice Foreign Minister Kim Kye-gwan held unannounced meetings in the embassies of the two nations in Berlin, where they agreed on the basic outlines of an accord that was formally adopted on Feb. 13 by all members of the resurrected Six-Party Talks.

Following up on that agreement, Hill and Kim met again on March 5 and 6 across the polished dining table in the private suite of the U.S. ambassador to the United Nations on the 42nd floor of the elegant Waldorf-Astoria Hotel in New York. There they worked to hammer out details of the actions each side is committed to take in the first phase of the agreement, by mid-April: North Korea is to shut down and seal its plutonium-producing nuclear reactor at Yongbyon and invite back the international inspectors who had been kicked out of the country three years earlier; and the United States is to end the U.S. Treasury Department investigation of Banco Delta Asia, the Macao bank that was integral to many North Korean financial transactions, and to begin the process of removing the country from its list of states supporting international terrorism and from the list of official U.S. enemies under the Trading with the Enemy Act. Hill made clear that successful negotiations could lead to the 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Washington and Pyongyang-so long as the North Koreans faithfully fulfill any promises they make.

Ironically, the suite where the two negotiators met had been only recently vacated by former ambassador to the United Nations John Bolton, an outspoken opponent of bilateral negotiations with the North. He was well known for calling North Korean leader Kim Jong Il a "tyrannical dictator" who presided over a country that is for many "a hellish nightmare." In return, a North Korean spokesman labeled Bolton "human scum."

For most of his six years in office, President George W. Bush had also been opposed to bilateral dealings with North Korea and supremely uninterested in normalizing relations with Kim's regime. Nor has he been complimentary about North Korea, labeling it in 2002 as part of an "Axis of Evil" along with Iraq and Iran, and volunteering to author Bob Woodward in August of that year, "I loathe Kim Jong Il!" Nonetheless, Bush's policy, if not his personal views, began to change dramatically late last year, making possible the negotiations that took place in New York last week.

How and why U.S. policy has shifted dramatically is a matter of great speculation in Washington and a variety of other capitals. No definitive answers have been established, but the following are among the most frequently cited factors:

The Oct. 9 test itself, the climax of at least four decades of effort by North Korea, which changed the security environment in Northeast Asia.

As a result of its activities at Yongbyon, North Korea is believed to possess about 50 kilograms of plutonium, enough to be the radioactive core of six to 10 nuclear weapons, depending on their size and efficiency. Unless checked, North Korea could continue to produce more weapons material and stage many more tests. This could touch off a nuclear arms race in Asia, potentially involving Japan, South Korea and Taiwan, Province of China, among others. The nightmare for the United States is that North Korea could produce enough plutonium to have some to spare for potential sales to anti-American states or subnational groups. With a military attack on North Korea's military facilities virtually ruled out as too dangerous or ineffective, diplomacy emerged as the only credible way to protect U.S. national security and world order.

Throughout the 20th century, Washington paid full attention to North Korea only when the isolated communist state was considered a credible threat to the United States or its allies: in the 1950-53 Korean War; during the 1993-94 North Korean drive for nuclear materials, leading to negotiations and the Agreed Framework; after the 1998 North Korean ballistic missile test, which generated the negotiations led by former Defense secretary William Perry, and after the collapse of the Agreed Framework and the start of North Korea's all-out drive to produce nuclear materials, which generated the Six-Party Talks. In the light of this history, it's not surprising that the nuclear weapons test of last October got the attention of U.S. policymakers, although it is surprising that negotiations have proceeded so far, so fast.

The dramatic political reverses of Bush's Republican Party in last November's congressional elections.

The elections brought to power the opposition Democratic Party in both houses of Congress. Leading Democrats have been highly critical of Bush's foreign policies, especially in Iraq but also in Asia. Unless it took some actions to deal with the new nuclear threat, the Bush administration would probably face hostile congressional hearings and perhaps congressional investigations of its policies in Northeast Asia.

Internal changes within the Bush administration, including the resignation of John Bolton and of other foes of engagement with North Korea.

The shifting Washington landscape has also reduced the remarkably strong influence of Vice President Dick Cheney, whose office was believed to be the center of opposition to engagement with adversary states. When a senior South Korean diplomat asked William Perry why the Bush team had reversed course on North Korea, the answer was stark and simple: "Because Cheney wasn't there."

The influence of China, which has become a crucial partner of the United States in opposing North Korea's ballistic-missile and nuclear weapons activities.

China has its own reasons for opposing a nuclear-armed North Korea, especially the potential impact on the nuclear weapons ambitions of forces within Japan, South Korea and Taiwan, Province of China. Moreover, its role as convener of the Six-Party Talks since 2003 has been important to Chinese prestige, regional authority and its relations with the United States. Chinese leaders seem determined to do everything possible-including persuading Bush to engage North Korea-to prevent the talks' collapse and a nuclearized Northeast Asia.

A central factor in the change of U.S. policy, although with uncertain influence on Bush's personal thinking, is the work of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Christopher Hill, who emerged as the administration's leader on negotiations with North Korea. A career Foreign Service officer, Hill served briefly in the U.S. Embassy in Seoul early in his career but until 2004 had spent most of his diplomatic life in Europe. His language skills are in Polish, Serbo-Croatian, Macedonian and Albanian. He first came to widespread notice as an aide to Richard Holbrooke in the high-wire, high-stakes diplomacy in Bosnia in 1995-97. Holbrooke described Hill as "brilliant, fearless and argumentative." Recently, Hill earned all those adjectives as U.S. ambassador to Seoul in 2004-05 and since April 2005 as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East Asian and Pacific affairs.

For much of the past two years, Hill's most important negotiations have been at home within the Bush administration rather than abroad with North Korea or others. Hill fought hard against restrictions on his negotiating authority imposed by Bush administration conservatives and, unlike his predecessor, Jim Kelly, sometimes managed to succeed. I wrote in my journal in August 2005, when he had been in the job only four months, "My impression is that Hill was given the ball and is running with it as far and fast has he can, with protection from [Secretary of State] Condi Rice and a consciousness of where USA danger points are." At times he boldly took steps on his own-such as holding social meetings with his North Korean counterpart, Kim Kye-gwan-and defended his actions later against administration critics.

At times his efforts were complicated and even frustrated by enemies within who opposed negotiations with North Korea. After he quickly forged a positive working relationship with the North Korean negotiator, Kim invited Hill to visit Pyongyang in the autumn of 2005 and in May 2006, but he was not permitted to do so. On the latter occasion, White House spokesman Tony Snow declared, "The United States is not going to engage in bilateral negotiations with the government of North Korea." In April 2006 unofficial experts of the Northeast Asia Cooperation Dialogue went to great trouble to invite both Hill and Kim to a meeting in Tokyo. Both of them attended but Hill was not permitted to have substantive, or even cursory, discussions with his counterpart. All of which makes remarkable the events of recent months following the Oct. 9 North Korean nuclear test and culminating-so far-in the intensive bilateral meetings between Hill and Kim across John Bolton's former dining table.

In the immediate aftermath of the nuclear test, the U.N. Security Council unanimously "condemned" the test and adopted economic and political sanctions against nuclear- and missile-related organs of North Korea. Significantly, China voted for sanctions against North Korea-as it had done following the July ballistic missile tests-after maneuvering to water them down somewhat. North Korea, which depends on China for energy and food, as well as for political protection, took notice of the attitude and actions of its giant neighbor. Reports from the area suggest that to emphasize its unhappiness, China also cut off the supply of spare parts to North Korea's military and abruptly stopped building a bridge for the North Koreans across the Yalu River. On Oct. 19, just 10 days after the nuclear test, Kim Jong Il met Chinese State Councilor Tang Jiaxuan, a former foreign minister, in Pyongyang to hear China propose that North Korea return to the Six-Party Talks and work flexibly toward a denuclearized Korean Peninsula. When he returned to Beijing, Tang informed Secretary of State Rice and asked her to arrange for Hill, then in the South Pacific, to fly to the Chinese capital to meet Kim Kye-gwan, who would fly in from Pyongyang. Seven hours of meetings between Hill and Kim, some with their Chinese counterpart, Vice Foreign Minister Wu Dawei, produced an agreement to resume the Six-Party Talks with North Korean participation.

After a great deal of diplomatic maneuvering in November, the formal talks in Beijing held Dec. 18-22 proved to be a disappointment. North Korea refused to engage with the others on the issues of its nuclear weapons program and passed word to the Americans that its negotiator lacked instructions from home. The night the talks ended, Hill sent his aide Sung Kim, director of the State Department Office of Korean Affairs, to the North Korean Embassy with the message that Hill would be willing to meet Kim Kye-gwan for bilateral talks in another city to carry on the nuclear dialogue. Two days after Christmas the word came back that Kim wished to meet Hill in Europe. This was the genesis of their meetings in Berlin on Jan. 16-18, which produced important breakthroughs toward halting and eventually eliminating North Korea's nuclear activities, but which also required U.S. flexibility and compromises.

Secretary Rice stopped off in Berlin on Jan. 17 on her way back from discussions in the Middle East and was briefed in person by Hill. Rice then took the extraordinary step of calling Bush directly, as well as her former deputy, national-security adviser Stephen Hadley, to urge-and obtain-approval of the course that Hill had outlined in his talks with Kim. This action bypassed the Washington bureaucracy, some of whose officials have thrown up roadblocks in the past to meetings and agreements with the North.

Despite the progress made with the Feb. 13 accords and the meetings in New York in the past few days, many hurdles remain before solid progress is assured toward cessation of North Korea's nuclear weapons activities and eventual denuclearization.

One of the difficult issues is North Korea's acknowledgement and cessation of its activities to produce highly enriched uranium, a nuclear weapons material different from the plutonium that has been produced in the Yongbyon reactor. There is ample evidence from Pakistan that AQ Khan, the former illicit salesman of nuclear weapons materials and technology, supplied North Korea with at least a small number of centrifuges with which highly enriched uranium can be made. This information was the basis of the Bush administration's 2002 accusation that North Korea was cheating on its obligations under the Agreed Framework. This charge led to the end of the U.S.-North Korean pact at the end of that year and Pyongyang's resumption of full-scale weapons activity at Yongbyon, where it produced the plutonium used in the Oct. 9 blast.

There is growing doubt in U.S. official and scientific quarters that Pyongyang has obtained or manufactured enough centrifuges and other materials to produce weapons-usable enriched uranium. The doubts surfaced publicly in the late-February testimony before Congress of Joseph DeTrani, the chief U.S. national intelligence officer for North Korea, creating a sensation among critics who charged that the administration had needlessly destroyed the Agreed Framework in 2002, leading to the production of the radioactive materials that comprise the North Korean nuclear arsenal.

Kim Kye-gwan has told Hill on several occasions, including the recent talks, that North Korea is willing to discuss the highly enriched uranium issue with the United States, but it is uncertain whether the discussion he has in mind will satisfy U.S. officials. Hill has demanded that North Korea "come clean" in laying out all that it has done to produce this weapons material.

The Feb. 13 accord, accepted and endorsed by all parties to the Six-Party Talks, contains many detailed commitments, any of which could be the subject of intense bargaining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North Korea, as well as other parties. Hill and Kim addressed some of those issues at the Waldorf-Astoria and emerged with expressions of satisfaction that these early talks had gone well.

Four months after North Korea's underground blast, it's astonishing how far the negotiations aimed at reversing North Korea's nuclear success have progressed-and how much the Bush administration has changed course. None of this means that the road ahead will be smooth or that a positive outcome is guaranteed. Failure is still very much a possibility. But the fact that success is also a possibility is a direct result of the impressive efforts of the diplomats who are seeking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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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변화시켰나(돈 오버도퍼, 2007. 3. 20)   2007.04.10
평택미군기지 이전에 대한 정부의 주장 vs 진실 (목차) (5)  2007.04.05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위배되지 않는다? (6)  2007.04.04
주한미군이 동북아 분쟁에 개입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6)  2007.04.04
기지이전협정 비준, 더 시간 끌 수 없다. 연내처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6)  2007.04.04
이전비용 총액 제출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손해다? (6)  2007.04.04
반환기지 환경치유는 미 측이 부담한다? (6)  2007.04.04
기지이전에 대한 추가비용 부담은 절대로 없다? (6)  2007.04.04
주한미군 재배치는 ‘신속기동군화’ 등 역할변화와 관계없다? (6)  2007.04.04
용산기지 이전은 한국 측 요구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전액 부담한다? (5)  2007.04.04
용산기지 이전은 주한미군 재배치와 관계없다? (6)  2007.04.04
들어가며 - 평택미군기지와 정부의 거짓말 I (5)  2007.04.04
평택미군기지와 정부의 거짓말 II -요약 (5)  2007.04.04
‘국가 안보, 전략·작전측면, 경제적 측면을 고려한 최선의 선택? (5)  2007.04.04
평택기지 중 용산 대체부지는 극히 일부, 대부분은 2사단과 공군기지 부지 (5)  2007.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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