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의 평화바이러스> 북의 새해 공동사설과 DJ의 호소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 뭔가 새롭고 희망찰 법도 한데, 올핸 전혀 그런 기분이 아니다. 영 찝찝하고 답답하다. 수족관 바닥에 달라붙은 광어마냥 착 가라앉은 기분이 영 오르지를 않는다.

생각해보면, 중년의 문턱이라는 40줄에 들어섰기 때문만은 아니다. 4·15총선, 11월2일의 아메리카합중국 대통령 선거 따위, 2004년의 앞에 ‘운명의’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 것 같은 나라 안팎의 중요 정치일정에 대해 희망에 찬 기대를 하기 어려운 정황 탓이 큰 것 같다. 올 한해, 한반도는, 그리고 지구마을은 좀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두루 행복한 그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를 위해 열심히 살려 애쓰겠다고 다짐하지만,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1월1일치 <한겨레>에 실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해 인터뷰를 읽고 또 읽는다. 그리고 1월1일 오전 발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동신문>(당보), <조선인민군>(군보), <청년전위>(청년보) 새해 공동사설을 읽고 또 읽는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한해 총노선을 요약한 이 사설 읽기는 참으로 고역이다. 때론 훈고학자처럼 때론 언어학자처럼, 표현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단어의 유무와 그 빈도 따위를 지뢰밭을 걸어가듯 세심하게 ‘징후적 독해’를 해야만 한다. 7년째 이 사설을 챙겨 읽고 있지만, 한해를 마치고 돌아보면 잘못 읽은 것이 늘 너무도 많다. 나의 무능과는 다른 차원에서 나는 한해의 총정책 노선을 이런 식으로 밝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관행이 답답하고 안타깝다).

흔히 ‘DJ’라 불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타공인 한국 최고의 안보전략가이다. 재임 5년동안 남북한의 반세기에 걸친 적대와 갈등 관계를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변화시키려 애썼다. ‘내정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겠다’던 그는 “한반도처럼 4대국이 둘러싼 지정학적 환경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국민 전체가 외교관이 돼야 한다”라고 강조하며, ‘북핵 문제’로 불리는 북-미간 갈등, 미국의 대북정책, 남북관계 등에 대해선 기다렸다는 듯이 가슴 속 생각을 길게 풀어놨다.

그는 우선 남한 정부에 좀더 적극적인 자세를 주문했다. “(참여정부 안에)핵문제가 해결돼야 남북관계가 개선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오히려 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남북관계가 잘 돼야 한다고 본다. …6자 회담에서 중국이 하고 있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 …우리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의 당사자다. 주도적 구실을 해야 한다.”

지난해 이른바 ‘핵문제’ 해결이 선행해야 한다며 남북관계에서 사실상 현상유지 전술을 구사한 남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쓴소리로 들린다. 주무장관인 정세현 통일부 장관은 2일 통일부 시무식에서 “올해 대북정책 추진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북한 핵 문제가 해결단계에 진입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가는 일”이라면서도, “북핵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 남북관계는 차분히 진전시키면서 부문별로 내실화를 도모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최근년간 북한의 변화를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 강경파의 시각과는 확연히 다른 접근법이지만, 김 전 대통령의 ‘주문’과 온도차가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6자 회담에서 중국이 하고 있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김 대통령의 지적 앞에선, 가슴이 아프다. 그건 정녕 불가능한 꿈인가. 그 꿈은 결코 당위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른바 ‘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중국의 남북한 양쪽에 걸친 영향력의 확대가 한반도 정세에 장기적으로 어떤 파장을 끼칠지 심고원려가 필요하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쨌거나 북한의 공동사설도 지난해 8·15 (평양)민족대회와 철도·도로 연결을 “통일운동사에 특기할 일”이라고 평가하며 “6·15 북남공동선언은 조국통일대강”이라고 강조했다. 덧붙여 ‘조선민족대 미국의 대결구도’를 지적함으로써 올해에도 지난해와 비슷하게 ‘민족공조 강조 속의 남북협력’ 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전 대통령 인터뷰엔 ‘북한 핵문제를 풀기 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부시 대통령에게 조언을 한다면?’이라는 질문이 들어 있다. 이 인터뷰는 12월30일에 이뤄졌는데, 들리는 얘기론 김 전 대통령이 수많은 질문 가운데 특히 이 대목에 강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둘에게 하고 싶은 말이 그만큼 많았지 않겠냐는 짐작을 해본다.

긴 답변을 간략하게 요약해보자. “부시 대통령은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거듭 표명해야 한다. 또 대북 안전보장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해줘야 한다. 불침공, 불전복, 불제재, 이런 것을 해주는 것이다. 그게 북한이 핵을 결정적으로 포기하는데 도움이 된다. 김정일 위원장에게는 지금 과감하게 핵 포기 선언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미국 대선 전에 해결해야 한다. 그걸 놓치면, 그 다음에 아주 어려울 것이다. …미국이 먼저 어떻게 하면 포기한다는 게 아니라 먼저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

내 생각엔, 위의 인용문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우선 ‘동시행동(에 따른 일괄타결)’을 고수해온 북한에 ‘(일방적)선 핵포기 선언’을 촉구한 것이다. 11월 아메리카합중국 대통령 선거 전에 ‘북한 핵문제’로 표상되는 북-미 갈등의 실마리를 풀지 못한다면, 북한에 심각한 위기 상황-이는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에 위기상황일 수밖에 없다-이 도래할 수 있다는 절박한 정세 인식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부시가 재선에 실패하고, 민주당의 후보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다. 앞일을 예측하는 것은 사뭇 무모한 일이지만, 현재로선 부시의 재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게 일반적 전망이다. 불행한 일이다.

북한 공동사설은 “조-미사이의 핵문제를 대화를 통하여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우리의 원칙적 립장은 일관하다. 그러나 우리는 존엄있는 우리식의 사상과 제도를 전면부인하고 위협하는 미국의 강경정책에는 언제나 초강경으로 대응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이라 명시적으로 밝힌 대목에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적 대응 방안이 함축돼 있는지는, 북한이 미국의 핵 전문가와 의회 보좌관들이 포함된 대표단의 6∼10일 영변 핵시설 방문을 허용했다는 <유에스에이투데이>의 때맞춘 보도와 함께 눈여겨 볼 대목이다(만약 미 대표단의 영변 등 북한 핵시설 방문이 이뤄진다면 이는 관계 당사자 모두에게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외부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북한의 핵 능력이라는 ‘불확실한 사실’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설 수 있다는 점에서 사태 진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지만, 상황 전개에 따라선 ‘파국’으로 치닫는 지렛대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걱정을 떨칠 수 없다).

어쨌든 북한은 ‘강경에는 초강경’이라는 익숙한 수사를 덧붙임으로써, 미국의 요구에 호락호락 응하지는 않을 것임을 내비쳤다. 적어도 북한이 김 전 대통령식의 ‘선 핵포기 선언’을 통한 외교적 공세를 펼치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부시 행정부가 ‘북핵 문제’의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에 전향적, 적극적으로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 전망이다. 북-미 갈등의 대화를 통한 완화 또는 해결이 자신의 재선 가도에 명백히 플러스 요인이 될 것이라는 정세 판단이 전제되지 않는 한 부시 대통령이 순순히 북한의 요구에 응할 가능성은 낮다. 그럼에도 나는 “(미국이 북한에 대해) 불침공, 불전복, 불제재를 (담보)해주면, 북한이 핵을 결정적으로 포기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김 전 대통령의 문제진단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불침공-불전복-불제재’를 대북 안전보장 3원칙이라 부르고 싶다.

어떻게 하면 엇나가기만 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마주 앉게 해 대화를 나누게 할 수 있을까. 지금 중국이 그걸 하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 몫을 남한 정부가 해야 한다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남북관계 개선에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문제인식에 대해 좀더 많은 고민을 하면 좋겠다. 그리하여 올 한해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서로 모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함께 늘 꿈꾸자, 부시의 낙선을. 혼자 꾸는 꿈은 그저 꿈일 뿐이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새해부터 너무 실없는 소리한다고 웃지 않길 바란다.

이제훈 한겨레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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