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15공동위 활동, 분야별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이태호 / 6.15민족공동위 남측위원회 정책위원,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6ㆍ15공동위 활동, 분야별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6ㆍ15 이전의 민간통일운동은 그 시도 자체로서 분단 질서와 냉전대결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 민족 동질성 회복과 화해협력의 실천, 대미 예속 등 정치ㆍ군사적 문제의 제기, 통일논의에서의 당국자 중심 혹은 창구 단일화의 극복 등 당시로서는 금기시 되었던 주제들을 공론화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조건에서 정권의 봉쇄와 억압에 직면해야 했고, 자연스럽게 정권에 대한 정치 투쟁의 맥락에서 추진되곤 했다.  

2000년 6.15공동선언은 민간통일운동의 지형과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교류협력이 더 이상 통일운동단체의 전유물이나 당위적 구호가 아님을 실감케 했다. 북한동포돕기 등 민간 인도지원, 금강산 개발, 개성공단 착공, 경의선 철도 연결 등 경제협력, 그 밖의 각계 사회ㆍ문화 교류가 활성화되었다. 또한 남북관계 개선에서 민간 통일운동은 남북당국과도 합법적인 파트너십을 형성하게 되었다. 북측 역시 남북 민간 행사를 일방적인 정치선전과 대남공세의 수단으로 이용하기보다 남북 당국 관계 개선과 병행하는 민간창구로 인식하고 접근하게 되었다.

민화협과 남북공동행사  
김대중 정부는 민간 단체들과 함께 남북 민간교류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1998)’ 구성을 추진하였다. 민화협은 성격에 대해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해서 남쪽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참가한 통일운동 상설협의체”라고 정의하였다. 민화협에는 일부 통일운동단체 외에도 여협, 교총, 재향군인회, 자유총연맹 등 보수적인 민간단체들과 정치인들도 망라되었다. 한편 일부 통일운동단체와 민중운동단체들은 민화협 구성이 위로부터의 시도로서 통일운동의 독립성을 해칠 수 있다면서, 2001년 3월 ‘6ㆍ15 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를 결성한다. 남측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응하여 범민련 북측본부는 남측 내부의 마찰을 우려하여 2000년 범민족대회를 열지 말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2001년 양 정부의 교류접촉 승인 하에 진보 보수를 망라한 민간단체 인사와 정당 인사들이 함께 참여하는 6ㆍ15, 8ㆍ15 민족통일대축전이 개최된다. 이 행사에는 민화협, 통일연대와 함께, 90년대 말 북한돕기운동을 활발히 벌였던 각 종단이 이들 공동행사에 중요한 파트너로 참여하였다. 범민족대회를 대체한 일련의 대축전 행사들은 민화협, 통일연대, 종단을 세 축으로 하고 북측의 민족화해협의회를 파트너로 하는 ‘합법적인 공동행사’, ‘정치적 교류’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과거 범민족대회가 당국 간의 갈등으로 사실상 단 한 번도 합법적으로 성사된 바 없었던 데 반해, 이들 6.15, 8.15공동행사는 비교적 정기적으로 이어져왔다. 북측에 이용될 것이라던 내외의 우려는 남측 참가주체의 다원화가 보장됨에 따라 기우에 그쳤다. 비록 조문 파동 등 남남갈등이 남북간 갈등으로 비화되는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큰 흐름에 지장을 준 것은 아니었다.


6•15민족공동위원회의 한계  
북핵문제로 북미간 갈등이 이어지고 남북관계가 교착되던 2004년 겨울, 기존 남북공동행사 추진 주체들을 보다 확대하고, 남북 민간교류의 구심체 역할을 할 남북해외의 연대기구로 발족시키자는 제안이 북측으로부터 제기되었다. 남측과 해외에서의 논의를 거쳐 ‘남북해외 민족공동행사 공동추진위원회(남측 상임대표 백낙청)’가 2005년 3월 발족하였고 그해 겨울 6ㆍ15민족공동위원회로 개칭하였다.

이 기구는 범민련 이래 처음으로 구성된 남북민간의 합작기구이다. 차이점은 범민련이 일종의 투쟁기구 혹은 통일전선적 성격이었다면, 이 기구는 남북당국대화를 지원하고 추동하는 협력관계를 주된 과제의 하나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 기구에는 그 동안 통일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남측의 시민단체들도 중요한 한 축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는 분단극복의 문제가 멀리 있는 문제가 아니라 시민의 일상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주제로 ‘현실화’되고 있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이 기구에는 또 각국의 해외동포도 해외위원회를 구성하여 남북과 함께 3축의 하나로 참여하고 있다.

6ㆍ15민족공동위 구성 이후 3년간의 활동은 이 기구의 의미와 한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6ㆍ15민족공동위는 2005년 평양에서 열린 6ㆍ15 5주년 민족통일대축전에 남한 당국대표단과 함께 방북하여, 남북당국관계의 교착을 푸는 가교 역할을 하는가 하면, 2007년 10ㆍ4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내는 데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전체로서 지난 3년간 이 기구가 남북 당국간 관계를 매개하고 연결하는 디딤돌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검증되었다.

다만, 이 기구가 당초 각종 사회문화교류의 구심체이자 추동체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는 지금까지 제대로 충족되지 않고 있다. 북측은 지역 교류에 난색을 표하는가 하면, 기존 부문 교류 중에서도 노동, 농민, 학생, 여성, 작가 등 이미 6.15공동위 이전 그 틀이 형성된 분야에만 한정하고 있다. 이는 북측이 당초 6ㆍ15공동위를 다양한 교류의 확대보다는 당국간 대화의 보완장치 혹은 남북각계각층의 정치적 협력기구로 사고하고 접근했다는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6ㆍ15 민족공동위는 다양한 교류형태의 하나로서 정치적 교류의 축으로 정착될 것을 조심스럽게 가정해볼 수 있다.

해외의 결합 역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지난 3년여는 ‘해외’가 가진 역할과 한계가 확인되는 기간이었다. 현 해외위원회는 해외에서의 민족대단결을 도모하기에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고, 남측과는 달리 협의적 관계를 바탕으로 이제껏 소극적이던 이들을 적극 동참시키려는 노력과 장치가 미흡하다. 이 점에서 6ㆍ15공동위 운영은 남북이 중심이 되어 해외의 각계인사를 초빙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해외의 운동발전을 위해서도 적절하리라 여겨진다.  

6ㆍ15공동위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통일운동 대중화와 일상화를 실현할 구체적인 수단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분단극복을 위한 각계의 실천이 다양화되고 풍부화되고 있는 조건에서, 6ㆍ15공동위가 모두 감당해야 할 숙제만은 아닐 것이다. 도리어 6ㆍ15공동위는 이 과제를 자신이 짊어짐으로써가 아니라, 이미 다양한 대중적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통일운동단체, 평화단체, 인도지원ㆍ개발협력단체, 인권단체, 지역단체들과의 적절한 파트너십을 통해 실현해나가야 할 것이다.

한편, 6ㆍ15민족공동위의 발전방향을 두고 각종 대중투쟁, 즉 반통일정책이나 세력, 각종 전쟁위협 등에 대한 투쟁의 구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6ㆍ15민족공동위의 구심력을 더욱 강화하여야 한다는 조직논쟁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투쟁은 필수불가결한 것이긴 하되 반전평화단체, 대중단체, 정당들이 수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직접적 투쟁의 임무는 남북당국과 협력하고 이들의 대화를 추동하고, 다양한 형태의 남북민간교류의 의의와 역할을 정치적으로 대변해하고 이를 위한 환경을 조성해야 할 6ㆍ15민족공동위의 임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해당 시기 각계각층이 공유할만한 정책적 쟁점을 찾아 이를 의제화하고 남북당국에 관철하기 위한 정책사업은 보다 힘을 기울여볼 만 하다.     


새 정부에서의 민간통일운동
선거기간 동안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10년의 남북관계를 비관적으로 평가하던 이명박 정부는 취임사에서 한 발 물러서 “남북관계를 이념의 잣대가 아니라 실용의 잣대로 풀어가겠다”고 밝혔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구상인 ‘비핵개방3000’은 장기적 과제일 수밖에 없는 북의  선핵폐기와 개방 등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어 그 실현가능성이 의심된다. 이 구상이 ‘실용의 잣대’에 의해 현실성을 얻으려면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기존의 정책수단과 시스템을 잘 계승하고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기존 남북간의 합의사항에 대해서도 일방적으로 파기할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재검토가 필요하다면 북한과 대화를 통해 합의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명박 정부의 엄격한 상호주의-실제로는 일방주의적- 태도가 변화 없이 유지된다면 남북당국간 관계는 6자회담 등의 호조건에도 불구하고 난항을 겪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시장이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믿고 있는 대신 다차원적인 민간교류와 협력의 역할은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명박 정부가 통일부 폐지 입장을 철회한 것은 다행이지만 적극적인 통일거버넌스에 대한 구상이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5년 여야 합의로 통과된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과 이에 따른 중장기 남북관계 발전구상이 차질 없이 진행되는 지의 여부는 새 정부의 의지와 능력을 시험하는 하나의 지표가 될 것이다. 

결국, 역대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명박 정부 시기에는 남북관계가 냉탕온탕을 반복하는 일이 더 많아지고 그 수위도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이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도 증폭될 것이다. 이런 모든 상황들은 남북을 잇는 민간통일운동의 사회적 역할이 새 정부에서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특히 6ㆍ15공동위원회 등 남북해외 합작기구의 가교로서의 역할과 책임이 매우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다. 남측 정부의 협력이 소극적인 조건에서 남과 북의 가교역할을 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매우 섬세한 노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또한 남측 내부의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는 조건에서 남한 정권과의 협력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것도 역시 간단한 일이 아니다. 북측은 북측대로 당국관계에서 교착에 빠진 많은 이슈들을 민간연대기구를 통해 의제화하고자 할 것이다. 6ㆍ15공동위 남측위원회는 이른바 남남 갈등을 극복하고 남한 내부의 민족대단결도 이루어야 한다.

이 난제들을 해결하는 길은 6ㆍ15공동위원회 남측위가 지금까지 줄곧 꾀해 온 바, 남북 각계가 보다 허심탄회하게 모든 것을 논의하는 가운데,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배가하는 것이다. 또한 통일운동, 인도지원ㆍ경제협력운동, 평화인권운동 등 다양한 분단극복운동과의 협력과 분업체계를 잘 형성하여 이를 통해 남북화해협력을 큰 물길로 만들어내야 한다.    



<615선언 이후 615, 815 남북공동행사 현황 2001~2007>


       6.15공동행사/ 8.15공동행사
01    금강산(6.15-16), 남450, 북200, 해외20명/ 평양(8.15-21), 남337명
02    금강산(6.13-16), 남217, 북350명 / 서울(8.14-17), 남530, 북116명
03    싸스(SARS)로 인해 미개최/ 평양(8.14-17), 남339, 북400명
04    인천(6.14-17), 남1200, 북126, 해39명/ (평양) 조문파동, 이적단체소속원 참가보장문제로 무산
05    평양(6.14-17), 남300, 북147, 해외00명/ 서울(8.14-17), 남400, 북200, 해외50명
06    광주(6.14-17), 남483, 북147, 해외45명/ (평양) 북측 수해로 미개최
07    금강산(6.14-17), 남284, 북300, 해외32명/ (부산) 을지훈련 등 사유로 북측불참통보


* 이 글은 <민족화해> 통권 제 31호 (2008/03/04)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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