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6자회담 ‘뜀판’ 원한다 (셀리그 해리슨, 한겨레, 2005. 4. 17)

북, 6자회담 ‘뜀판’ 원한다

셀리그 해리슨/미국 국제정책센터 선임연구원

앞으로 석 달 동안 북한은 영변 원자로에서 연료봉을 제거할 예정이다. 이 연료봉은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으로 재처리될 수 있는 것들이다. 평양 당국은 1994년 6월에 그랬던 것처럼, 또 6자 회담 자리에서 되풀이해 주장했던 것처럼 다시 한번 재처리를 동결하기 위한 협상을 제안하고 있다. 이건 내가 지난 5일에서 9일 사이에 아홉번째로 북한을 방문한 성과 중 좋은 소식이다.

나쁜 소식도 있다. 그것은 평양 당국이 이미 보유한 핵무기의 폐기를 베이징의 6자 회담 자리에선 더 논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미국이 북한과의 정치·경제 관계를 정상화하고 ‘체제 교체’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믿을 만한 약속을 할 때까지 더는 핵 폐기 논의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는 북한이 이미 보유 중이라고 주장하는 기존 핵무기는 계속 유지하겠지만, 협상을 통해 새로운 핵무기 증산은 동결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나는 평양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1시간,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과 2시간,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5시간, 리찬복 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대표와 2시간 동안 만났다. 그들은 두루 북한이 미국과 동등한 핵 보유국이며,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 핵무기 폐기뿐 아니라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미국의 핵위협’ 제거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내용은 지난달 31일 북한 외무성 성명을 통해서도 자세히 설명됐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 당장의 긴박한 요구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미국과 북한이 관계를 정상화하고 상호신뢰를 더 쌓은 뒤에야, 북한 핵시설 사찰과 함께 북한의 남한 미군기지 사찰이 이뤄져야 한다는 게 북한의 주장이다.

북한이 지금 원하는 건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통해 관계 정상화를 시작하는 일이다. 북한은 북-미 직접대화를, 미국이 북한 체제를 합법적으로 인정한다는 의사를 보여주는 첫 신호로 간주하고 있다. 6자 회담이 재개될 수는 있겠지만 평양 당국의 강조점은 북-미 직접대화에 있다.

김계관 부상은 북한의 6자 회담 복귀에 회담의제와 관련한 어떤 전제조건도 달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이 북한 체제 교체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함으로써 대화 분위기를 만들 때에야 비로소 6자 회담에 참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북한의 공식적인 주장은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부른 걸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만약 미국이 그럴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우리에게) 참가 명분을 주기 위한 다른 방안을 찾을 수 있다. 그건 미국에 달렸다. 공은 미국 쪽에 가 있다”고 말했다.

강석주 제1부상 역시 라이스 장관이 “북한이 주권국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 걸로는 충분치 않다고 했다. 만약 라이스가 “미국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존중하고, 사회체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평화적 공존을 할 용의가 있다”고 말한다면 만족하겠느냐는 물음에 강석주 부상은 “받아들일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걸 공개적으로 또는 비공개 만남에서 미국 쪽으로부터 직접 듣고 싶다”고 답했다.

그는 “우리는 6자 회담에 되돌아가기 위한 뜀틀이 필요하다. 우리가 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로 대접받고 주권국의 위엄을 유지하고 있다는 걸 우리 군대와 국민에게 확신시켜야 한다. 6자 회담 복귀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압력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평양의 유럽 외교관들은 5월9일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2차대전 종전 60돌 기념식을 미국이 북한에 화해 몸짓을 보여주는 마당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그 행사에 참석할 것이고, 북한에선 아마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갈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짧게라도 만나는 게 이상적이겠지만, 단지 정중한 악수만으로도 지금의 교착상태를 깨는 데 도움이 된다.

강석주 제1부상과 리근 외무성 미주국장은 영변 원자로의 정기적인 (연료봉) 제거작업이 이달 중 시작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제거작업이 이미 시작됐는지 또는 구체적으로 언제 시작하는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또 내가 만난 모든 이들은 핵실험을 할 것인지, 이게 정말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모호하게 대답했다.

김영남 위원장에게 핵실험을 하지 않고도 핵무기가 작동하는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그는 “관계기관들은 모든 게 잘 준비됐고, 핵무기들이 기능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고 답했다. 리찬복 장군은 “핵실험은 필요 없다. 우리는 지하 핵실험도 방사능 낙진 때문에 원하지 않는다. 핵실험 없이도 우리의 핵 억지력은 기능할 것이다. 우리는 원한다면 언제든지 탄두를 미사일에 탑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 얘기는 핵탄두가 아직 미사일에 탑재돼 있지는 않다는 걸 암시한다. 북한의 핵 억지력이 미사일로만 이뤄진 것인지 아니면 공중 투하 방식도 포함하는 것인지를 재차 묻자, 그는 “21세기에 항공기 운반 방식의 핵폭탄을 사용하는 나라가 있다는 건 나로선 믿기 어렵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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