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국제분쟁 2011-09-16   2673

[언론기획③] 짧았던 ‘한반도의 봄’, 길었던 ‘테러와의 전쟁’

짧았던 ‘한반도의 봄’, 길었던 ‘테러와의 전쟁’

[아시아의 ‘관타나모’]<하1> 새 냉전질서 형성된 한반도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됨으로써 탈냉전이 본격화됐다. 하지만 그 10년 뒤인 2001년, 냉전을 대체한 새로운 시대가 결코 평화로운 시대가 아닐 수 있다는 우려를 현실로 드러내는 듯한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났다. 9.11사건과 미국 부시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 선포,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공격이다.

부시 행정부가 집권할 당시 한반도의 분단된 반쪽인 북한은 사회주의권 붕괴의 충격과 이어진 1990년대 말의 식량난으로부터 겨우 벗어나와 2000년 북미 코뮤니케, 2002년 북일정상회담 등 미국 일본 등 냉전시대 적대국과의 포괄적인 관계개선을 약속한 상태였다.

한편, 한반도 분단체제의 다른 한쪽인 남한은 1987년 이후의 민주화 이래 1998년 최초로 민주화 운동 진영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반부패· 인권·복지에서 중요한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북한에 대해 ‘햇볕정책’으로 알려진 화해협력 정책을 추진하여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였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김대중 대통령은 그 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부시 행정부가 집권하고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 한반도 남단에는 두 개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스스로 이룬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에 자긍심을 느끼면서 동시에 반세기 이상 이어져온 한미군사동맹이 불균등하고 비용 대비 효과가 적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대한민국, 그리고 반공을 국시로 여기고 힘 있는 미국과 군사·외교·경제를 망라하는 포괄적인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생존과 번영 그리고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는 대한민국이 그것이다.


부시 독트린과 김대중 정부

2001년 3월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신임 미 대통령은 북미코뮤니케를 존중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남한 정부가 추진하던 햇볕정책과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이듬해 부시 행정부는 북한은 3대 악의 축의 하나로 공표했다. 한국 정부는 당시 미국으로부터 F-15 전투기의 구매와 MD(미사일 방어체제) 참여,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요청받고 있었다.

2002년 10월 미국은 북한이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한반도 화해협력 분위기는 일순간에 전쟁가능성으로 전환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F-15 전투기 40대(40억 달러 규모)를 구매했다. 또한 미국이 아프간을 공격한 직후 김대중 정부는 아프간에 400여 명의 군대를 파병하여 ‘대테러전쟁’ 참전국가가 되었다. 영국이 공식참전하기까지 한국은 가장 먼저, 가장 많은 군대를 파견한 나라였다. 다만, 김대중 정부는 북한에 대한 군사공격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고 북한과 중국의 반발을 야기할 MD 참여도 거부했다.


주한미군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 책임자 처벌을 위한 촛불집회

미국의 아프간 전쟁이 한창인 2002년 6월 13일 군사훈련 중이던 미군 전차가 2명의 여중생을 치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정부가 재판권이양을 요구했으나, 주한미군측이 SOFA 규정을 내세워 이를 거부했다.

같은 해 11월 22일 주한미군 배심원이 두 명의 미군 운전병에게 무죄를 평결하자 이에 대해 항의하는 시민들의 촛불집회가 2003년 초까지 이어졌다. 12월 14일에는 서울에서만 최대 10만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주요 요구사항은 책임자 처벌과 한미 행정협정(한미SOFA, Status of Forces Agreement )개정이었지만, 두 요구사항 모두 관철되지 못했다.

이 촛불집회는 직접적으로는 여중생 사망의 책임자 처벌을 위한 것이었지만, 한미 군사동맹의 구조적인 불균등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2001년 이후 미국의 무기구매압력과 남한의 화해협력 정책에 대한 반대와 무시같은 한미동맹의 불화와 전쟁위기를 계기로 분출한 것으로 이해될만 하다.

 뜨거운 여름 2008년 6월
▲ 2003년 6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여중생 사망사건 1주기 추모 행사에 모인 시민들. ⓒ연합뉴스 


노무현 정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대테러전쟁 참전

2002년 12월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는 선거기간 중 “미국에 할 말은 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약한 바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아프간 파병에 이은 이라크 파병, 북한제재 공조, PSI(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 및 MD 참여, 그리고 한미 군사동맹의 지역·지구적 범위에서의 역할 확대를 강력히 요구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대와는 달리 한반도 핵 문제 해법을 제외한 대개의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의 제안에 응했다. 우선 노 대통령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이라크 파병 의견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결정했다. 정부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이라크 파병이 불가피하다고 시민들을 설득하면서 미국에 대해서는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약속받고자 했다.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 1, 2차 파병에 협조하여 1차 약 500명(2003), 2차 약 3000명(2004-2007, 1차 병력 포함 3500명 내외)의 부대를 이라크에 파견했다.

그러나 미국 부시행정부는 이라크 파병을 대가로 북핵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는데 협조해달라는 한국 정부의 제안을 공개적으로 거절했다. 선제(핵)공격 옵션은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를 위한 미국의 전략이므로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부시 행정부가 이 옵션을 사실상 포기하고 북한과의 대화에 나선 것은 이라크에서의 저항으로 전황이 불리해지고, 미국 국내에서 이라크 철군여론이 다수가 된 2005년 이후였다.

노무현 정부는 또한 주한미군을 신속기동군으로 재편하고, 주한미군기지를 전 세계 분쟁지역을 향한 허브 기지로 활용하도록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보장’하는데 합의하였다. PSI에는 참관자격으로, MD에는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이라는 이름으로 제한적으로만 참가했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군사적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2012년까지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통제권을 주한미군으로부터 반환받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는 미군 스스로 대한반도 군사정책의 유연성 확보를 요구해온 만큼 미국이 양보한 것은 없으므로 적절한 해명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시민사회단체는 2002년 한국군의 아프간 파병 이래 한국군의 대테러전쟁 파견에 반대하는 연대기구를 구성 운영해오고 있다. 특히 2003년 9월 한국군의 2차 이라크 파병 발표 이후 350여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이라크파병반대국민행동(People’s Action Against the Dispatching of Troops to Iraq)는 한국군이 이라크에서 철군하는 2008년까지 지속되었고 이후 아프간 재파병반대연석회의로 전환하여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다.


6자회담과 북한의 핵실험

2003년 4월의 북미중 3자 대화를 계기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시작되었다. 6자회담은 북미 양자대화와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이 포함된 6자 대화가 병행되는 이중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부시행정부는 6자회담 초기 “악행에 보상할 수는 없다”며 북한의 핵폐기가 불가역적이고 검증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이후에 관계개선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소극적인 태도로 임했고, 6자회담은 교착되었다.

2005년 들어 북미 양자와 나머지 국가들은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단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4차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을 채택한다. 그 골자는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계획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 또는 재래식 공격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나머지 5개국은 북에 대해 에너지를 지원하고 적절한 시기에 원전(경수로)도 제공한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과 북한은 각자의 정책에 따라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하며, 6자회담 내에 별도의 포럼을 설치하여 관련 당사국간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러나 9.19 성명 직후 미국의 재무부가 예고 없이 대북금융제재 – BDA(방코델타아시아) 북한자금 동결(2005. 9) – 조치를 취함에 따라 북미관계가 다시 악화되었다. 북한의 위조지폐 발행으로 조성된 자금의 세탁에 BDA 계좌가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제재조치로 인해 9.19 성명 이행은 교착되었고, 이에 대해 2006년 북한은 핵실험으로 대응했다. 북한의 핵실험은 남북·북미간 긴장을 고조시켰지만, 북에 대한 적대적 정책의 한계 또한 드러내는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6자 당사국은 2007년 2월 13일 우여곡절 끝에 9.19 성명의 초기 이행방안에 합의하고, 같은 해 10월 3일 2단계 이행방안에도 합의하였다. 더욱이 10.4 남북정상회담으로 인해 모든 조건이 호전되는 듯 했다.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는 조건에서 시민사회단체들은 남북 민간대화로 갈등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다. 2005년 3월 1000개 이상의 시민사회단체, 종교단체, 언론단체와 문화예술단체, 정당들은 북한의 사회단체와 정당, 해외동포 사회단체들과 함께 6.15민족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연 2회 남북교환 대규모 교류행사를 추진해왔다.

특히 2005년 8월, 2007년 8월 평양에서 열린 교류행사에서는 한국 정부 대표단의 방북도 병행되었고, 시민사회 교류행사를 지렛대로 삼아 정부간 접촉이 이루어져 2005년 9.19 6자 공동성명, 2007년 10.3 6자합의, 10.4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막후협상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 집권 이후에는 남북관계의 악화와 남북민간접촉에 대한 남한 정부의 부정적인 태도로 인해 정기교류행사가 중단된 상태이다.


이명박-오바마 정부 시기의 한미동맹과 동북아시아 신냉전

2007년 12월 치러진 대선에서 보수 정치인인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했다. 그는 미국에서 클린턴 행정부에 대해 부시 행정부가 취했던 태도를 답습했다. 남한이 군사적 외교적 힘을 충분히 사용하는 것이 한반도에 분단극복과정을 정의롭게 관리하는 최선이 길이라는 네오콘식 접근법을 채택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남북이 합의한 6.15 선언과 10.4 선언을 일방적으로 폐기했고, 북한 핵폐기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대화협력이 병행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2008년 10월 미국 정부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하고, 북한의 핵재처리시설 불능화 조치를 취하는 등 6자회담의 돌파구가 마련될 가능성이 엿보였지만, ‘검증’문제를 둘러싼 북미·남북간 이견으로 다시 교착되었다.

이 교착은 2008년 9월 남한의 국정원장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 이상설을 공개적으로 발표할 때 어느 정도 예정된 것이었다. 미국과 남한은 전반적으로 북한의 불안정성을 이유로 북핵문제 등 현안 협상에 유보적이거나 소극적으로 임하기 시작했다. 또한 북한 붕괴나 내전 시 북한에 한미연합군이 개입하여 이를 안정화한다는 북한 비상사태 대비계획을 공공연히 천명하고 이를 구체적인 전쟁계획(O-plan 5029)로 발전시켰다.

이에 대해 북한은 더욱 자극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남북·북미관계는 점점 심각한 갈등으로 치달았다. 북한은 2009년 4월 위성발사실험을 강행했고, 이에 대해 유엔안보리 의장성명이 채택되고 제재가 강화되자 2009년 5월 2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이후 아직까지 6자회담은 열리지 않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적 외교와 테러와의 전쟁 노선을 수정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하면서 아랍세계와 이란, 쿠바 등에 대해 관계개선을 제의하는 등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한반도 정책만큼은 초기부터 그런 대화 제스처를 배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5년 BDA에 대한 미 재무부의 대북금융제재가 북을 고통스럽게 해 협상테이블로 이끌어내는데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하는 인사들을 중용했다.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실험을 강행한 이래 오바마의 대북정책은 ‘전략적 인내’로 표현되는 한층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명박 정부와의 대북제재 공조도 더욱 강화되어 왔다.

2010년 3월, 남북간 해상경계가 모호한 서해 NLL(Northern Limited Line) 인근 백령도 근해에서 남한 대잠수함 초계함인 천안함이 침몰한 것에 대해 이명박 정부가 북한을 원인제공자로 지목한 이후 남북관계는 모든 면에서 단절되었다. 같은 해 11월 NLL 인근 연평도에서 사격훈련을 하던 남한 해병부대를 겨냥한 북한의 포사격으로 민간인 2명을 포함한 4명이 사망한 직후 갈등은 절정을 이루었다.

이들 사건 이후, 한미 군사동맹은 핵항모와 핵잠수함을 동원한 서해상의 무력시위, 서해분쟁 재발시 남한군의 대규모 보복공격을 포함하는 ‘적극적(능동적) 억지전략’ 개발 등 공격적 성격을 더해가고 있다. 남한은 PSI 참여를 공식화하고 MD 참여도 부정적인 입장에서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한미군사동맹은 또한 국제금융위기 이래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는 중국과의 갈등을 유발하면서 한반도와 동북아에 새로운 냉전체제가 형성되도록 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천안함 뱃머리 부분
▲ 크레인에 예인되고 있는 천안함 함수(뱃머리) 부분. ⓒ연합뉴스 


테러와의 전쟁10년, 그리고 지나치게 짧았던 한반도의 봄

한반도 전체로 시야를 확대해 본다면, 2000년 6.15선언과 그 해 10월 12일 북미코뮤니케 합의를 전후한 6개월간의 짧은 ‘한반도의 봄’을 제외하면 테러와의 전쟁 10년간 몇 차례의 평화정착의 계기를 살리지 못한 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어 왔다. 부시 행정부 집권 기간 동안 한국군은 미국의 대테러 전장에 대규모로 동원되었고, 한반도 전체가 이른바 ‘불량국가’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일방주의를 실험하는 시험대로 전락했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최소한 한반도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기본 입장을 비교적 분명하게 견지했으나, 2007년 이명박 정부가 집권한 이후에는 남한의 일방주의가 강화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기존 남북 정상간 합의의 이행을 거부했고, 오바마 행정부 역시 전략적 인내라는 이름으로 남한의 선택을 도왔다. 북한은 이에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대응하면서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2010년 서해상에서의 무장출동 이래 동북아시아에는 새로운 냉전질서가 형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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