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칼럼(pd) 2003-10-27   557

<안국동 窓> 특검제가 해법은 아니다

맞박자와 엇박자 속에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중 가장 뜨거운 대상은 무엇인가. 여야 정당의 대선 자금과 대통령 재신임 문제, 이라크 파병 논란, 그리고 이제 한풀 꺾인 듯하지만 송두율 교수 사건 등을 꼽을 수 있다. 어떤 것은 지금 한창 진행중이고, 어떤 것은 몇 주째 지속되고 있다.

이 사회에선 대부분 일들이 그렇듯, 막상 터지면 당장 의견을 내고 수습책을 강구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꾸물대다간 전부 파탄에 이르러 회복 불능의 손실을 입을 것 같다.

그러나 놀랍게도 어떤 사태건 파국에까지 가지는 않는다. 제대로 된 수습책 없이 시종일관 처음의 자기 입장만 내세우며 싸우기만 하는데도 그렇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그럭저럭 정리되지 않은 채 다른 사건으로 넘어간다. 대개 사건은 끊이질 않고 연방 일어나니까.

이런 되풀이가 거듭되면서 우리 정치 사회는 안정 상태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걸핏하면 민생 문제라며 몇가지 경제 수치를 들먹이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오직 중산층 이상이 욕망하는 소비와 축적 대상으로서 부에 대한 관심일 뿐이다.

점점 깊어가는 빈부 차이에 따른 계급화를 포함한 경제 문제는 따로 논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역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정치적 안정이다. 그것도 안정 자체가 아니라, 우선 안정이 가능한 길목부터 찾는 일이다.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우리는 어떤 사태에 부닥치거나 하나의 쟁점과 맞닥뜨리게 되면 어느새 그 본질을 잊어버리는 수가 많다. 특히 여야 정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인들이 그러하다. 그 까닭은,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명분이나 논리보다 승리의 욕구가 앞서기 때문이다. 토론의 목표도 설득이 아니라 오직 상대방의 굴복이다.

최근의 일들을 간략히 살펴보자. 노 대통령이 제기한 재신임 국민투표와 대선 자금 문제도 사태의 핵심에서는 벗어난 곳에서 논란을 거듭하고 있다. 문제를 일으키기 전까지 노 대통령과 청와대의 일 처리 방식에도 지적할 점들이 없지 않지만, 그 부분은 이미 <조선> <동아> <중앙> 등의 언론이 쉬지 않고 써댔으니 반복할 필요가 없다.

사태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는 혐의는 한나라당에 훨씬 많다. 노 대통령이 재신임 얘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최병렬 대표를 비롯한 한나라당은 즉각 국민투표를 주장했다. 그리고는 놀라우리만치 궁색한 이유와 논리로 재신임 국민투표를 슬슬 밀쳤다.

거기에 주요 언론들의 일치된 말바꾸기도 기억에서 지워버리기 어려운 현상이다. 기록은 남는 법이니, 훗날 검토해 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그러다 검찰에 의해 최도술씨 사건이 드러나자 결정적 구실을 잡았다는 듯이 정권을 물고 늘어졌고, 불신임에 자신 없었던지 탄핵을 들고 나왔다. 여기까지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나라당의 태도만 보아도 그 저의를 알 수가 없다.

이렇게 물어보면 서로 이해가 쉬울 것 같다. 한나라당의 궁극적 목표는 국정의 안정인가, 노무현의 퇴진인가? 그리고 노무현이 지금 당장 하야하면 국정은 안정될까, 더 혼란에 빠질까? 굳이 하나만 더 묻는다면, 노무현이 중도에 하차하면 한나라당이 집권할까? 최병렬이 대통령이 될까?

그 다음의 행동 양식을 보면 한나라당의 태도를 더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최도술씨 사건으로 대통령까지 물러나라고 하더니, 그만 최돈웅 의원의 100억원 건이 터져버렸다.

그 순간 한나라당의 거침없던 공세는 주춤하고, 전세의 역전까지라고야 할 수 없어도 타협의 새 국면이 기대될 수 있었다. 지난 주말이 지나고 새 월요일이 시작되면서 지겨운 정쟁 하나를 종식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나 싶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기대를 저버렸다. 대표의 사과는 당연한 것이지만, 대선 자금의 특별검사 요구는 아무래도 사태 해결의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별검사를 못 믿어서가 아니다. 우선, 특별검사란 수사 대상이 기존 검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인물이거나 관련자여서 수사의 공정성을 기대하기 어려울 때 임명하는 제도다. 그런데 대선 자금은 대통령을 비롯한 여당만이 아니라, 야당인 한나라당이 더 문제다.

이런 경우 여당은 특별검사가 수사하고 야당은 검찰이 수사하자고 하는 것은 곤란하니, 아예 모두 특별검사가 처리하게 하자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지금 대검 중수부는 제대로 수사할 의지가 있어 보이고, 현재 특별한 결함없이 진행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국민들이 크게 의심하는 눈치가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특별검사를 뒤늦게 임명하여 시간을 지연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검찰의 공정성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인데, 그러면 송두율 교수의 구속과 최도술씨 수사는 대통령의 의사와 어떤 관계에 있단 말인가.

특별검사가 필요한 경우는 이럴 때일 것이다. 첫째, 노 대통령의 결정적 관련 혐의에 대한 수사가 어렵다고 판단될 구체적 정황이 있을 때다. 그리고 둘째, 최병렬 대표 스스로 검찰총장에게 전화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니, 야당으로부터도 그런 정치적 압력을 회피할 수 있도록 특별검사를 임명해야 한다는 논리가 진담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때다.

한나라당의 오늘 입장을 보자. 특별검사를 임명해 대선 자금 수사를 하여 노 대통령 관련 혐의가 드러나면 탄핵을 한다. 만약 노 대통령에게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 다시 대통령 재신임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이 정도 되면 처음 제기한 나의 의문이 반드시 무지의 소치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란 반증이 되는 셈이다. 한나라당의 목표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그 목표가 분명하다면, 대통령을 억지로 끌어내려 자신들에게 돌아갈 이익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시간이 좀 지난 것이긴 하지만, 조선일보 김광일 차장의 ‘구경꾼 없는 대통령 물어뜯기’란 데스크 칼럼(9월 14일자 A14면)도 그 의미만 분명하다면 아직 유효한 말들이다.

이러한 본질과 동떨어진 떠들어대기는 다른 문제에서도 동일하다. 송두율 교수와 관련하여, 그가 한 행위의 구체적 위험성이 존재하느냐가 처벌 여부의 핵심임에도 지금의 국가보안법 때문에 거론하지 않는다.

이라크 파병은 어떤가. 국익에도 여러 형태가 있다는 걸 잊고 있다는 느낌이다. 당장의 국익이 있으면 먼 훗날까지 이어지는 국익이 있고, 미국이 주는 이익이 있는 반면 다수의 작은 나라들이 줄 수 있는 이익도 있다.

아직 하나의 문제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정치적 싸움에서 얻을 승리보다는 서로의 근본적 물음에 대한 대답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정치인들은 깨달아야 한다. 정당 사이의 싸움과 목표점은 승리가 아니라 타협이다. 마지막에 행할 처벌과 용서의 권한은 국민이 지니고 있다.

* 이 글은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에도 실려 있습니다.

차병직 (변호사, 참여연대 상임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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