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칼럼(pd) 2004-04-10   606

<안국동 窓> ‘전후 평화재건’ 이라는 망상

언론에 간헐적으로 보도된 바와 현지의 시각을 종합해 볼 때 최근 5일간 본격적으로 전개된 이라크의 상황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미국과 동맹국들의 예측을 뛰어넘은 이라크인들의 전반적인 반미 반점령 정서, 수니-시아파 연합의 항미 민중봉기의 전면화, 미 동맹국 비전투부대와 민간인들에 대한 공격의 개시, 친미 과도통치위원회의 정당성 상실과 붕괴직전의 상황, 미국 주도의 이라크 점령정책의 총체적 파탄, 다급한 미군의 민간인 학살과 전쟁 범죄의 급증, 팔루자 대학살로 야기되는 미국 주도 점령동맹의 약화와 이탈, 부시 행정부의 국제적 고립 심화, 이라크내 대미 강경파의 정치적 군사적 헤게모니 급증 등이다.

이로부터 가능성 높은 상황 전개가 몇 가지 예상된다. 이라크의 다양한 종교적 종족적 집단속에서 대미 강경파가 미군의 성지 공격과 문화적 오만함, 그리고 팔루자 대학살과 같은 ‘피의 정당성’을 발판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미 점령군에 대한 군사적 저항에 강력한 이념과 지휘 체계를 불어 넣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부각된 알 사드르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알 사드르가 계속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이제 팔루자 학살과 같은 역사적 사건과 보다 통합된 이념 및 지휘체계와 대중적 동원력을 갖춘 대미 항전은 지금까지 보아온 산발적 저항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시아 온건파를 중심으로 하는 대미 협력파의 입지는 그만큼 위축될 것이며, 그 상호작용으로 미국의 이라크 점령 정책은 공세적 군사 행동과 오만함에 더 의존하게 될 것이다.

또 친미 과도통치위원회가 정당성을 상실하면서 평화로운 정권 이양은 당분간 논의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향후 새롭게 전개될 정권 구성 논의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이라크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세력간의 경쟁과 갈등이 심화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 측이 ‘종파간 경쟁의 일환’이라고 축소하고 싶은 이 경쟁과 갈등은 바로 ‘미국 주도의 점령’이라는 핵심 이슈를 누가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놓고 벌어진다. 때문에 작년 침공이후 지금까지의 이라크인들의 희생과 특히 미군의 팔루자 사원의 폭격과 학살 이후, 이 세력간 경쟁과 갈등이 점령을 인정하는 ‘과도통치’ 국면을 붕괴시키고 점령을 거부하지 않으면 경쟁이 되지 않는 ‘피의 정당성’ 국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즉 미 점령에 더 격렬하게 군사적으로 저항하는 세력이 더 정당성을 획득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현재 한국의 이라크 파병 정책은 몇 가지 고정된 전제 아래 추진되고 있다. ‘묻지마’ 대미 협력, ‘점령’이라는 상황 규정 부인, “전후 재건”이라는 이라크 상황 판단, 안전한 주둔지가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 등이다. 이러한 고정 관념은 이라크의 실제 상황과 완전히 따로 놀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이라크 파병과 또 불행히 발생할 지도 모르는 한국 민간인에 대한 테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야 할 시점이다. 이라크인들이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무장한 한국군의 주둔을 ‘점령’과 무관한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 있는가? 즉 안전한 주둔지가 존재하는가? 내전 상태인 이라크 현지에서 무조건적 대미 협력을 하지 않고 무장한 한국군이 독자적인 재건 활동만 전개할 여지가 있는가? 즉 ‘전후 재건’이 가능한 상황인가? 정부는 이에 대해 책임있게 답해야 한다.

만일 주둔지를 초기에 “안전”하다고 주장된 모술이나 키르쿠크로 해서 4월 이전에 파병했더라면, 한국 정부는 최악의 상황, 즉 미국의 점령 정책을 돕는 점령군으로서 이라크 국민들과 전쟁을 전개하거나 파병부대를 철수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지경으로 내몰렸을 것이다. 현재의 상황 전개는 곧 이런 막다른 골목을 예견하고 있다.

파병정책의 이같은 막다른 골목은 작년 미국의 이라크 침략 이후 이라크 상황에 대한 계속적인 판단 착오와 상황 왜곡을 통해 정책을 추진했던 현 정부의 사필귀정이다. 그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선 목적(대미 지원) 설정 후 상황 판단 –> 미국의 허황된 ‘전후 평화’ 상황인식 맹종 –> 독자적 상황 판단 포기 –> 반복된 상황 판단 착오 –> 무조건적 목적 실현 (대미 지원)을 위한 판단 착오의 은폐와 합리화.

즉 ‘전후 평화 재건’ 이라는 망상이 파병 정책과 상황 판단을 계속 지배했고 이를 주도한 국방부와 외교부의 수뇌부가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작년 5월 이후 ‘전후’ 라는 상황 판단이 자주적 상황판단을 완전히 결여한 대미추종형 정보 종속의 핵심이었다. ‘전후’라는 망상적 상황 판단 때문에 ‘전후 재건’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정부 내에 창조되었다. 사실 조사 보다는 환상에 의존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아직도 현재 상황을 ‘점령군과의 내전’ 또는 ‘전쟁의 지속’으로 판단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판단 착오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이번 파병 결정에서처럼 외교안보 지도부의 무능력과 관료성 그리고 대미종속성이 드러난 사례도 앞으로 찾기 힘들 것이다. 이제 분명히 드러난 상황판단의 완전한 착오와 무리한 정책 고수의 책임을 관련자들에게 엄중히 물어 교정의 기회를 만들어야 할 때이다.

이대훈(참여연대 협동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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