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파병 2019-05-23   3741

[칼럼]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있다면, 어떻게 답했을까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있다면, 어떻게 답했을까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한국군의 이라크 전쟁 참전 과정을 다시 돌아보며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오는 23일 봉화마을에서 열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추도사를 한다고 한다. 대통령 퇴임 후 화가로 활동해 온 그가 직접 그린 노 전 대통령의 초상화도 전달하고, 재임 시절 노무현 대통령과의 각별한 인연에 대해 얘기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역사의 고비에서 여러 차례 함께 마주 앉아야 했던 정치인들의 인간적인 인연을 다룬 다큐멘터리들처럼, 이 방문 소식은 퍽 훈훈하게 다뤄지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때 한반도와 전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저 그런 개인적 후일담으로 처리해버려도 좋은 것일까?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한반도 역사와 세계사에 회복하기 힘든 상흔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유산이 아직도 지속적인 분쟁과 적대의 악순환을 낳고 있다. 조지 W 부시는 2000년 12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즈음 한반도는 1980년대 후반 이후의 민주화 과정과 세계사적 탈냉전 흐름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2000년 6월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북조선인민공화국 김정일 군사위원장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고, 남북 간의 해빙이 본격화됐다. 이 역사적 전환에 힘입어 미국 클린턴 행정부와 북한 정권 간에도 ‘북미코뮤니케’라는 포괄적인 관계개선 합의가 성사됐다. 50년여 동안 이어져온 북미 적대관계가 청산되기를 기대하던 때다. 하지만 이렇게 찾아온 한반도의 봄은 채 6개월이 이어지지 않았다.

 

2001년 3월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신임 부시 대통령은 북미코뮤니케를 존중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남한 정부가 추진하던 햇볕정책과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9.11 사태 직후 부시 대통령이 취한 대외 정책은 한반도와 전 세계를 큰 갈등으로 몰아넣었다.

 

이듬해 초 부시 행정부는 북한, 이란, 이라크를 3대 악의 축으로 공표하고 핵 선제공격 가능성을 언급했다. 1993년 북미 제네바합의는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핵으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소극적 안전보장(NSA)에 기반하고 있었는데, 그 전제를 허물어뜨린 것이다.

 

2002년 10월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개발 문제를 제기하며 무력에 의한 해결 가능성을 언급했다. 당시는 이미 미국이 북한에 대한 소극적 안전보장 약속을 파기한 상태였고, 제네바 합의에서 약속한 경수로 건설 지원도 지체되고 있어서 북한의 고농충 우라늄 개발만을 문제 삼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북한의 악행 탓으로 몰아갔다. 한반도 화해협력 분위기는 일순간에 전쟁 가능성으로 전환되었다.

 

 

‘미국에 할 말 한다’는 젊은 노무현의 등장 

 

한국 정부는 당시 미국으로부터 F-15전투기의 구매와 MD 참여,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요청받았다. 김대중 정부는 F-15전투기 40대(40억 달러 규모)를 구매했다. 또한 미국이 아프간을 공격한 직후 아프간에 400여 명의 군대를 파병하여 ‘대테러전쟁’ 참전국가가 되었다. 영국이 공식 참전하기까지 한국은 가장 먼저, 가장 많은 군대를 파견한 나라였다.

 

그 과정에서 2002년 6월 훈련 중인 미군 장갑차에 여중생 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특히 그해 11월, 이 사건에 대해 미군법정이 무죄로 평결하자 그간 한미관계에서 누적된 불만이 촛불집회로 터져 나왔다. 이는 지난 50여년간 누적된 한미 간 불평등 관계에 대한 정상화 요구이자 부시 행정부 이후의 일방주의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 할 말은 하겠다고 공약한 젊은 노무현 후보가 매우 불리한 환경을 딛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집권 초기부터 직면해야 했던 것은 아프간 파병에 이은 이라크 파병, 북한제재 공조, 그리고 한미군사동맹의 지역/지구적 범위에서의 역할 확대에 관한 미국의 압박이었다. 3대 악의 축으로 부시 행정부가 지목한 세 나라 중의 하나인 이라크를 공격하는 것을 도우라는 일방적 요청은 이라크 외에 북한도 공격할 수 있다는 위협으로 들리기 충분한 것이었다.

 

이라크 전쟁은 아프간 전쟁과는 또 다른 침략적 성격의 전쟁이었다. 이라크는 부시 미 대통령이 지목한 소위 3대 악의 축의 하나였는데, 이라크 후세인 정권이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고, 테러 세력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 미국의 주장이었지만 이 모든 것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실제 유엔 IAEA의 핵무기 사찰단장이었던 한스 블릭스는 이라크 전쟁 개전 직전인 2003년 2월 14일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 혹은 그와 연관된 아이템이나 프로그램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유엔 사찰단은 그러한 무기를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고 유엔 안보리에 사찰 결과를 보고했다. 하지만 결국 미국은 유엔 안보리로부터 침공을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결의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3월 20일 이라크를 침공했다.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2004년 “이라크 전쟁은 유엔헌장에 저촉되는 불법행위”라고 규정했다.

 

부시 행정부 스스로도 이라크 점령 직후 미군 정보부와 무기 전문가 1천여 명으로 이라크 서베이 그룹(ISG)을 구성해, 이라크 전역을 돌며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의혹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증거를 발견하는 데 실패했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공공청렴센터(Center for Public Integrity)는 부시 행정부가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이라크가 미국에 위협이 된다는 잘못된 입장을 발표한 횟수가 935건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2004년 7월 발표된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에 관한 국가위원회’ 최종 보고서 역시 “9·11의 주모자로 알려진 알카에다와 사담 후세인의 협조 관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2006년 9월 <뉴욕타임스>에 폭로된 미국 ‘국가정보평가(NIE) 보고서’는 이라크전으로 테러 위험이 되레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미 국가정보위원회 의장을 지낸 로버트 허친슨 등 전문가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이라크가 차세대 테러분자들을 끌어들이는 자석과 훈련장이 돼버렸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최근 이라크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장해가고 있는 근본주의 이슬람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Islam State of Iraq and Syria)의 성장 배경에는 미국이 주도한 다국적군의 명분 없는 이라크 침공과 점령, 그 과정에서 이라크 국민들이 입게 된 회복하기 힘든 정신적·육체적·경제적 파괴가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정작 미국이 침공하기 전까지 이라크에는 이슬람국가와 같은 테러세력도, 대량살상무기도 없었다. 다만 후세인이라는 독재자가 있었을 뿐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 수단으로 고문과 무기한 구금을 채택했다. 이라크와 아프간의 수용시설과 관타나모 기자, 그리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CIA 비밀감옥에서 심문수단으로 고문을 광범위하게 자행했던 것은 지금까지도 미국과 국제 정치의 한복판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국제인권단체들은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행해진 가학적 행위들이 미 국방부와 법무부, 중앙정보국(CIA) 등이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공식화한 ‘법률적 기준’과 이를 위해 고안된 고문수단-‘강압적 심문 규정’-이 전세계 인권 상황을 크게 악화시켰다고 비판하고, 고문을 합법화한 미 행정부 주요 인사들을 전범으로 고발하기도 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그렇게 고발된 전범 중 한 명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선 당시 강력한 주장과 시민사회단체들의 거센 저항, 국가인권위원회의 파병 불가 의견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다. 정부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이라크 파병이 불가피하다고 시민들을 설득하면서 미국에 대해서는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약속받고자 했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요청에 의하여 2003년 서희제마부대 500명을 이라크에 1차로 파견한다. 그러나 미국의 예상과는 달리 이라크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은 압도적 무력을 바탕으로 바그다드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그다드 점령은 전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라크를 점령한 부시 행정부는 2003년 5월 1일 종전을 선언하지만 당시 이라크 무장세력들은 종전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였고 이라크 대부분의 지역에서 교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미국과 연합군은 곧 이라크 점령의 수렁에 깊이 빠져들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 종결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은 2011년 12월 15일이었다. 이 역시 전쟁이 끝나서가 아니라 미국이 이라크에서 철수한 날에 불과했다.

 

이라크에서 수렁에 빠진 미국은 더 많은 부대를 요구했다. 1만여 명의 파병을 요청받았던 노무현 정부는 2차로 자이툰 부대 약 3000명(2004-2007)을 파견한다. 이 논의 도중인 2004년 6월 이라크에 진출하여 미군용품을 납품하는 계약을 이행하던 기독교 계열 회사의 직원 김선일씨가 무장저항세력에 의해 피납,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테러에 굴복할 수 없다”며 국회 일각의 재검토 논의를 일축하고 자이툰 부대 파병을 강행했다. 국회도 별다른 정세평가나 파병 근거에 대한 체계적 토론없이 거수기 노릇을 하고 말았다.

 

정부는 ‘유엔의 요청에 따른 이라크 전후재건’을 위한 파병이라고 둘러댔지만, 당시 이라크는 결코 ‘전후’라고 할 수 없는 전쟁 상황이었다. 공식적으로도 1차·2차 파병동의안 목적란에 “테러행위 근절을 위한 미국의 행동을 지원”하는 파병이라고 명시했다. 더욱이 석유 이권 확보, 안전성 등을 고려해 자이툰 부대 파병지역으로 검토되었던 모술과 키르쿠크는 그 이후 분쟁의 중심이 되었고 지금도 IS의 거점 노릇을 하고 있다.

 

 

대규모 파병 감행했지만… 북핵 대화 거절한 미국 

 

노무현 정부는 그 밖에도 주한미군을 신속기동군으로 재편하고, 주한미군기지를 전 세계 분쟁지역을 향한 허브 기지로 활용하도록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보장’하는 데 합의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가 명분 없는 대규모 파병을 무리하게 강행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상 의무가 없는 주한미군의 역할재편을 동의해주고, 평택기지까지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부시 행정부는 북핵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는데 협조해달라는 남한 정부의 제안을 공개적으로 거절했다.

 

선제(핵)공격 옵션은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를 위한 미국의 전략이므로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고 그 입장은 불행하게도 지금 이 시간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나마 강경 일변도의 부시 행정부가 이 옵션을 사실상 포기하고 북한과의 대화에 나선 것은 이라크에서의 저항으로 전황이 불리해지고, 미국 국내에서 이라크 철군 여론이 다수가 된 2005년 이후였다.

 

언론 기사에 따르면, 부시 전 대통령은 지난 2010년 출간된 자신의 자서전 ‘결정의 순간’에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몇 가지 주요 현안과 관련해 그가 보여준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다”며 “이라크의 민주주의 정착을 돕기 위해 한국군을 파병한 결정과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일 등이 거기에 포함된다”고 기술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서 노무현 정부가 과연 미국의 이라크 파병 요청을 거부할 수 있었을지 그가 서거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 되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 몇 가지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당시 미국의 결정은 세계를 망쳤고, 그 자신의 영향력도 위태롭게 했다. 특히 한반도에 어렵게 도래한 해빙의 봄을 다시 추운 겨울로 돌려놨다. 2000년 6.15선언부터 2000년 11월 북미코뮤니케까지 6개월간 짧게 도래했던 ‘한반도의 봄’ 이후, 미국, 남한, 북한이 한마음으로 관계 개선을 위해 진정성 있는 협상에 몰입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3자의 궁합이 깨어진 이후 18년여 지난 2018년 4.27 판문점 선언 이후에야 비로소 미심쩍은 트럼프 행정부와 함께 비슷한 상황을 창출하고 있긴 하다.

 

둘째, 문재인 정부를 포함해서 한국 정부는 아직까지 이라크 참전과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공식평가서를 발표한 적도 없고, 관련 정보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전쟁을 일으켰던 미국과 영국이 잘못된 전쟁이었다는 공식평가서를 발표했음에도 한국 정부와 국방부는 아직 묵묵부답이다.

 

더욱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도입된 반인권악법인 테러방지법을 미국은 2014년 폐기했지만, 한국은 미국이 해당 법안을 폐기한 다음해인 2015년에 새롭게 제정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이 법안의 폐지 얘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있다면, 지금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얘기할지 궁금하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