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기타(pd) 2003-03-15   1430

[분쟁지역현황] 수단 리포트 : 수단공화국(Republic of the Sudan)의 오래된 분쟁

다음 글은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있는 최상구씨가 정리한 글을 기초로 해서 재작성한 것이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의 분포

아프리카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진 수단은 국토의 25%는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이고, 30%는 유목민(총인구의 약 14%)이 사는 건조지대이며, 나머지 부분에는 농경민 등 정착인구가 분산해 있습니다. 북부지방에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이슬람계의 함족과 셈족이 살고 있으며, 남부에는 흑인계열의 기독교와 전통신앙, 독특한 언어를 가진 다양한 인종과 부족이 살고 있어 남북간에 뚜렷한 경제, 사회, 문화적 차이가 있습니다.

수단의 역사는 이집트 및 에티오피아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BC 8세기 전반에는 누비아를 중심으로 강력한 노예국가가 형성되어 1∼3세기 사이에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3세기에 에티오피아 유목민들의 침략으로 멸망하였고, BC 3,000년경 이집트의 파라오는 수단의 북부지역인 누비아를 침략하기도 하였습니다. 6세기에는 그리스도교가 유입되었으나 7세기 중반에 아랍인들의 이민이 시작된 후 이슬람교와 아랍어가 중심문화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1870년대 이후 수단은 이집트의 지배하에 속하게 되었고, 이집트가 영국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자 1899년 양국의 공동통치가 수립되어, 앵글로이집트수단이 되었습니다. 이집트 혁명 후인 1953년에 이집트는 수단인의 자결권을 인정하고 이집트·영국 협정으로 1955년 수단공화국으로 독립하였습니다.

정치불안과 분리독립운동

수단은 독립 당시부터 국내 이슬람 종파간에 세력 다툼으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었으며, 여러번의 쿠데타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남부지역의 비아랍인들(수단 인구의 25%)은 과거 지속되어 왔던 남부지방에 대한 차별과 소외 때문에 분리독립을 주장하면서 분쟁이 시작되었고, 1972년에는 에티오피아 중재로 휴전에 합의하였으나, 휴전조건을 놓고 반군과 이슬람세력 자체에 내분이 발생하여 휴전은 무산되었습니다.

1969년 자팔 누메이리(Nimeiri)의 쿠데타이후 국명을 수단공화국에서 수단 민주공화국으로 바꾸고 사회주의정책을 실시하였고, 1983년 누메이리 정권이 이슬람법을 실시하려 하자 남부지역의 분리독립운동세력은 에티오피아 및 리비아 지원 하에 수단인민해방군(Sudan People’s Liberation Army: SPLA)을 조직하여 분쟁이 격화되었습니다.

1985년 누메이리 대통령의 외유 중 다하브 국방장관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과도군사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였으며, 1989년에는 오마르 하산 알 바시르(Omer Hassan Ahmed El Bashir) 준장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독재정치의 강화와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이자 1990년부터 분쟁은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미국과 자이르(현재 콩고민주공화국) 등이 양측에게 휴전할 것을 요구하였고, 열세에 몰린 인민해방군 측은 1992년 5월 나이지리아의 아푸자에서 휴전협상에 임하여 바시르 정권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무력 충돌은 계속되어 남부의 중심지 주바에서 수단인민해방군의 공격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1992년 9월에는 난민구제를 위해 파견된 유엔 요원 4명이 무력 충돌 과정에서 희생되기도 하였습니다. 바시르정권과 수단인민해방군간의 협상은 결렬되고, 분리독립운동세력들의 내분 역시 평화협상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1993년 수단인민해방군 내부의 통일파와 가란파가 케냐에서 협상을 벌여 남부지역에 잠정적 통치기구를 설치할 것과 독립을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한다는 것에 합의하고 1996년말부터 움마당(Umma Party), 통일민주당(Democratic Unionist Party: DUP) 무장조직 등 7개 세력이 민족민주동맹(National Democratic Allience: NDA)을 결성,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시르정권은 1997년 에티오피아군 지원하에 반군이 국경선을 침범하였다는 이유로 국가총동원령을 선포하였고, 1999년 바시르정권은 국가긴급사태를 선포하여 의회를 해산시키고, 전권을 바시르대통령에게 집중시켜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습니다.

무력충돌이 빈번히 지속되는 가운데 2002년에는 스위스와 미국의 중재로 수단 정부와 독립운동세력간의 휴전이 합의되었습니다. 스위스에서 진행된 이 협상에 따라 휴전합의이행을 감독하기 위한 국제감시단 구성, 수단인민해방군이 점령하고 있는 누바 산악지역내 민간인의 자유로운 이동과 인도지원 구호품의 공수, 그리고 2개 무장지역에 경작민의 접근을 허용하는 것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비참한 생활

현재 아프리카의 국경은 서구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모국들이 분할 점령하였던 경계선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어진 선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던 소수민족들의 이해 또한 다양한 것입니다. 하지만 식민통치는 이러한 이해관계와는 상관없이 식민지 모국을 위한 불균형한 산업발전과 이 과정에서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계속되었습니다.

수단의 분쟁은 인종과 민족의 차이에 의한 지역차별 때문에 발생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수단의 남부지방은 보건과 교육체계, 전반적인 사회기반시설의 저발전에도 불구하고 석유, 광산, 목축업과 목재 등의 산업이 북부 지배층에 의해 개발되었습니다. 남부지방의 소외의식은 아프리카 전반에 퍼져있는 빈곤의 문제와 함께 폭발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랜 분쟁으로 인권상황은 그야말로 비참한 상황입니다. 1997년말 기준으로 6개국에 35만명(우간다 16만명, 콩고/자이레 6만명, 에티오피아 6만명, 케냐 4만명, 중앙아프리카공화국 3만 2천명, 이집트 1천명 등)이 난민생활을 하고 있으며, 1999년 초 유엔식량계획은 남부주민 500만명 중 260만명이 아사에 직면한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또한 수단 자체가 분쟁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인접국가들인 차드, 에디오피아, 에트리아 등의 분쟁으로 인하여 이들 주변국으로부터 난민이 유입되어, 수단의 난민문제와 함께 이 지역의 인권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으며, 정부의 비행금지구역의 해제가 지체되면서 인도적 구호물품의 공수가 지연되고 있습니다.

오랜 독재정치로 정치적 권리 역시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AI)에 의하면, 이슬람의 발전이 수단에 언제나 평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언급한 3월 9일 한 지방신문에 대하여 편집권을 몰수하는 등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20년이 넘게 지속된 분쟁으로 국방비에 대한 과다 지출과 거액의 외채는 경제 성장의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수단 분쟁은 강대국의 직접적 이익이 걸려있지 않고 그 영향 범위가 내부로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국제사회로부터 크게 주목받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명 피해와 난민 발생 규모 역시 다른 분쟁과 마찬가지로 심각하며 국제사회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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