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기타(pd) 2003-03-15   1398

[분쟁지역현황] DR 콩고

일반

1997년 이후 콩고민주공화국(구(舊) 자이레)는 민족간 유혈전쟁과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

콩고민주공화국에는 이미 1994년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발생한 분쟁으로 피난민들이 대거 유입돼 있는 상태에서 97년 5월 카빌라(Laurent KABILA)가 주동한 혁명으로 모부투(MOBUTU) 정권이 무너지게 된다. 혁명 당시 카빌라는 르완다와 우간다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혁명 이후 국가명을 자이르에서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바꾼다. 카빌라는 집권 초기 자신의 집권을 도왔던 르완다 투치족 출신을 국방장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국민의 2/3이 투치족과 대립관계에 있던 후투족과 가까운 반투족이었기 때문에 투치족과의 지속적인 연대를 맺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1998년 카빌라는 르완다 투치족의 전면 철수를 요구하며 투치계의 바냐물렝게족을 국외 추방하겠다고 선언하게 된다. 이 선언으로 콩고민주공화국에 다시 내전이 시작되었다. 특히 이 내전에 이웃한 짐바브웨와 앙골라, 나미비아, 차드, 수단 등 주변국들이 민족분쟁과 정권유지를 위한 반군견제, 자원확보 등 다양한 이유로 개입하게 되면서 격화된다.

99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리비아, 아프리카 단결기구(OAU), 유엔과 미국 등이 중재에 나서면서 각 국과 콩고민주공화국과 공화국내 반정부 무장세력 사이에 무장해제 협정, 즉 종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우발적인 분쟁은 계속됐다.

2001년 1월 카빌라가 암살 당했고, 그의 아들 죠셉 KABILA가 새로운 국가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죠셉 카빌라는 그의 아버지와 다른, 급진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끝내는 데 성공하지는 못하고 있다.

지리적 조건

  • 위치 : 중앙 아프리카, 앙골라의 북동부
  • 면적 : 234만5천㎢ (미국의 1/4보다 약간 작음)
  • 인접 국가 : 앙골라, 부룬디,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콩고공화국, 르완다, 수단, 탄자니아, 우간다, 잠비아
  • 기후 : 전형적 열대성 기후, 적도지역의 고온다습성 하천지대와 보다 건조하고 시원한 남쪽 고지대, 저온다습한 동쪽 고지대, 적도 북쪽은 4월부터 10월까지 우기, 나머지 기간동안 건기, 적도 남쪽은 11월부터 3월까지 우기, 나머지 기간동안 건기.
  • 자연 자원 : 코발트, 구리, 카드뮴, 공업용 다이아몬드, 금, 은, 아연, 자석, 주석, 게르마늄, 우랴늄, 철, 석탄, 목재 등

사람들

  • 총인구 : 552만 명
  • 참고 : AIDS로 인한 사망률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음, 예상 수명이 낮아지고 있고, 유아사망률과 사망률이 높아지고 있음.
  • 연령 분포도 : 0-14 세 48.2% / 15-64 세 49.3% / 65 세 이상 2.5%
  • 인구 성장률 : 2.79%
  • 유아 사망률 : 98.05 (인구 1천명당)
  • 예상 수명 : 49.13세
  • AIDS 성인 감염률 : 5.07% (110만명 추정)
  • 인종 : 200개가 넘는 부족으로 구성된 반투족, 4개 대표 종족인 몬고, 루바, 콘고(반투족), 망베투-아산드(하미틱족)이 전체 인구의 45%
  • 종교 : 로마 카톨릭 50%, 개신교 20%, 이슬람 10%, 기타
  • 언어 : 프랑스어(공식), 링갈라어, 킹와나어, 키콘고어 등

경제상황

막대한 천연자원으로 잠재적으로 부유한 국가가 될 수도 있는 콩고민주공화국의 경제는 1980년대 중반이후 급격히 쇠퇴했다. 1998년 8월에 시작된 전쟁은 국내 생산량과 정부세입을 급격하게 줄였고, 외채는 증가시켰다. 외국인의 투자는 분쟁결과에 대한 불확실성, 시설 부족, 대처가 어려운 사회환경 때문에 점차 줄어들었다.

전쟁은 불확실한 법적 장치, 부패, 과도한 인플레이션, 정부 경제정책과 재정 정책상의 불투명성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로 인한 충격을 더욱 심화시켰다. IMF, 세계은행 등에서 파견된 사절단은 콩고정부의 경제 개혁 정책 시행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정부와 만났고, 카빌라 대통령은 개혁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 국내총생산 : 320억 불
  • 국내총생산 성장률 : -4%
  • 국민 1인당 국내총생산 : 590 불
  • 물가상승률 : 358%
  • 화폐 : CDF
정치상황

  • 정부 유형 : 독재정권, 대의정부로의 이행하려는 과도기
  • 수도: 킨샤사 (Kinshasa)
  • 독립 : 1960년 6월 30일 벨기에로부터 독립
  • 국가 지도자 : 조셉 카빌라(2001년 1월 26일~), 대통령은 국가 지도자이자, 정부 지도자

현재 콩고민주공화국 위치해 있는 카탕가 지역에 16세기에는 강력한 중앙집중국가였던 루바왕조가 있었다. 1840년부터 1870년까지 데이비드 리빙스턴 박사(Dr. David Livingstone)가 이 지역의 탐험에 나섰고, 1871년 저널리스트인 헨리 스탠리(Henry Stanley)가 리빙스턴 박사를 취재하면서 이 지역이 서방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스탠리가 콩고강을 따라 탐험에 나서면서, 지역 지도자들과 수 백 개의 무역과 보호 조약을 맺어 나가는 동안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는 원정자금을 지원했다. 이 조약들은 벨기에의 콩고 경제개척에 구심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영국의 콩고 식민지 시도를 무력화 시키는 데 한 몫 하게 된다. 벨기에의 식민지 기간동안 콩고 사람들은 가혹한 작업환경에 시달렸고 무력에 의한 통제를 받았다.

아프리카인들이 정당을 설립할 수 있게 된 1957년, 대부분 정당들은 종족의 이해에 기반한 활동을 펼쳤다. 오직 친소련계열인 루뭄바(Patrice Lumumba)가 이끈 콩고국민운동만이 국가 지향적인 독립 우선주의에 기반한 활동을 전개했다.

결국 1960년 6월,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콩고는 카사부부(Joseph Kasavubu)가 대통령이 됐고, 루뭄바가 국무총리직을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독립 몇 일 후, 카탕가의 지도자인 숌베(Moise Tshombe)가 폭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960년 9월, 모부토(Joseph Desire Mobuto)가 권력을 잡게 되고, 체포된 루뭄바는 이후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1961년 다시 카사부부에게로 정권이 탈환된다.

연방주의자인 카사부부는 카탕가 지역에 대한 독립을 선언한 숌베와 1963년 협정을 맺게 되고, 1964년에 숌베는 국무총리가 되기에 이른다.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운동이 계속되는 가운데, 1965년 11월 군대지도자였던 모부투(Mobutu)가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숌베를 내쫒았다. 모부투는 국가의 이름을 자이레(Zaire)로 바꿨으며 아프리카 민족 우선정책을 택했으나, 그 정책을 오래도록 고수하지는 않았다.

1975년에 구리 산업을 국유화 하는 과정에서 모부투는 이권을 국가 관료와 일부 엘리트들에게 배분했다. 모부투는 국내의 모든 비판 세력을 진압하고 1966년에 일당체제-대중혁명운동이라는-를 확립하고 고도로 집중된 독재정치를 실시했다. 모부투는 친미적 정책으로 일관하며 미국을 주요 고객으로 확보했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프랑스의 관계가 더욱 견고해 지는 동안 벨기에와의 관계를 강화시켜 나갔다.

1990년에 모부투 반대파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그 결과 모부투는 4월에 일당체제의 종결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모부투 반대파의 활동이 학생들의 시위로까지 번지자 이에 놀란 모부투는 100명이나 넘는 학생들을 죽이는 것으로 시위 진압에 나섰고, 살아남은 반대파는 이웃 나라의 은신처로 흩어졌다.

1994년 르완다에서 일어난 대량학살로 많은 피난민들이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지역에 유입됐다. 이 피난민들 가운데는 대량학살의 가해자였던 군인들도 수 천 명이상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동부지역에 상당한 긴장이 조성됐다.

이러한 가운데 모부투는 1996년 8월 유럽에서 전립선 암 수술을 받는가 하면, 투치(Tutsi) 지역에서는 무장 반군세력들이 폭동을 일으켜 모부투의 장악력을 약화시켜 나갔다. 결국 모부투는 1997년 5월 카빌라(Laurent Kabila)가 지도자로 있던 콩고-자이레 자유를 위한 민주세력동맹(Alliance of Democratic Forces for the Liberation of Congo-Zaire)에 정권을 이양하고 국가를 떠나게 되고 4개월 후에 죽게된다. 카빌라는 1997년 5월 17일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하고, 국가명을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바꾸고 반짝이는 별이 그려진 국기를 복원한다.

1998년에 투치족 병사들이 카빌라의 르완다 군대 소탕 작전을 명령한 것에 반발하며 새로운 충돌이 발생했다. 폭동에 가담한 병사들은 카빌라의 부패와 족벌주의, 투명한 정치 정책시도의 실패를 비난했다. 카빌라는 짐바브웨, 앙골라, 나미비아, 차드에서 군대와 기타 군사적 지원을 받았고 뒤에서 폭동을 지원하는 우간다와 르완다를 맹비난했다.

반대파 정치인들과 추방된 대학생들과 전(前) 콩고 군인들의 연합인 콩고민주연합(Congolese Rally for Democracy, CRD)의 무력행동은 키산가니(Kisangani)를 포함한 콩고 북쪽과 동쪽의 넓은 지역에서 계속됐다. 이에 따라 콩고정부는 1999년 7월 잠비아의 수도인 루사카(Lusaka)에서 종전조약에 조인을 하고, 반대세력의 지도자들 또한 8월에 조약에 조인을 하게 된다.

그러나 계속된 내전은 중앙 아프리카를 동요시켰고, 백만 명의 주민들이 집을 떠나 피난민이 되었다. 콩고, 우간다, 르완다, 잠비아, 짐바브웨, 앙골라, 모잠비크의 대통령들은 2000년 1월 루사카(Lusaka)조약을 지킬 것을 다시 약속하면서, 유엔의 평화유지군 주재를 요청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아프리카 대통령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군대 감찰자-그러나 정식으로 허가를 받지는 않은-에게 빨리 권한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은 5백 명의 비무장 군대 감찰자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5천 명의 군대 파견을 회의에 안건으로 상정했다.

2000년 2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5500명의 감찰자들의 파견이 허가되었고, 4월에 대립중인 양측이 우간다에서 회의를 갖고 정전에 합의하게 된다. 그러나 협상은 충돌을 종결시키는 데 실패했고, 6월에는 르완다와 우간다 군대가 충돌하며 키산가니(Kisangani)에서는 다시 긴장이 높아졌다.

전쟁은 폭력과 굶주림, 질병으로 2백만 명 가까운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2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2000년 말까지 거주지를 떠났고, 그 가운데 180만 명 가량의 사람들이 국내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난민들은 탄자니아, 콩고공화국, 잠비아, 르완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앙골라, 우간다 등지로 흩어졌다. 부룬디와 카메룬, 말라위 등지로도 소규모의 난민들이 이동했으며 약 8천명의 사람들이 유럽으로의 망명을 신청했다.

반면 2000년 말까지 앙골라, 수단, 르완다, 부룬디, 우간다, 콩고공화국으로부터 콩고민주공화국으로 유입돼 온 난민들도 27만5천명이나 됐다. 카빌라는 2001년 1월 경호원 중 한 사람에 의해 저격당했다. 결국 그의 아들 조셉이 정권을 넘겨 받은 후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하며 회담을 제의했으나 결렬됐다.

 

군대상황

  • 군사력 : 육군, 해군, 공군, 특수부대
  • 군대 동원 가능 인력 : 남자 15-49세 1199만 6175 명
  • 국방비 : 2억 5천만 달러
  • 국내총생산 대비 국방비 : 4.6%

국제사회관심

내분 : 콩고민주공화국은 내전에 휩싸여 있다. 주변국인 우간다와 르완다의 지원을 받아 콩고의 동부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반군세력들과 무력 충돌을 이어지고 있다. 대호수 지역에서 투치족, 후투족 등 여러 민족들과 정치적 반대세력, 다양한 다른 나라 군대-부룬디, 르완다, 우간다 등-와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콩고공화국과 콩고민주공화국 사이의 콩고강 국경선 논쟁도 여전하다.

불법마약의 생산 : 대마초를 불법 생산, 대부분 국내에서 소비됨

최근상황

2003년 4월, 평화협상 조인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발생한 5년 가까운 내전에 가담했던 모든 정치 세력들이 지난 4월 2일, 평화협정 조인식을 가졌다.

남부 아프리카에서의 회담의 마지막 순간에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와 반군 세력, 정치적 반대 세력과 시민사회 대표자들은 2년 후 민주적 선거를 시행기로 하고, 이를 감시하기 위한 과도 정부를 세우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콩고민주공화국 대통령 죠셉 카빌라(Joseph Kabila)는 반군 세력과 시민 반대 세력에서 선출된 네 명의 부통령의 지원을 받는 새로운 내각에서도 그의 입지를 견고히 하려는 의도에서 조약 협정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유엔 코피 아난 사무총장은 이 평화협정이 콩고 국민들의 “평화를 회복하는 최고의 기회”라며 환영했다. 동시에 아난 사무총장은 그를 대신한 특별 사절, 무스타파 니아세(Moustapha Niasse)가 낭독한 연설에서 “평화협정이 그 자체로 실현될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할 것”이라며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일은 아직 앞에 놓여있다”고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반란군 세력에 동조하던 정당들이 새로운 국방력에 병합되었지만, 통합된 군대에 대한 명령체계에 대한 중요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또한 반란군 지도자들은 수도 킨샤사로 가는 것에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중립적인 국제 군사력을 요청했다.

아난 사무총장은 가장 시급한 과제는, 콩고민주공화국 북동쪽에서 계속되는 충돌을 중지시키는 것이라며 “불행히도 이 지역의 사람들의 상황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전보다 훨씬 더 나빠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콩고민주공화국 위기의 중재자이자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의 현 대통령인 남아프리카 공화국 타보 음베키(Thabo Mbeki) 또한 평화협정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콩고 북동부 지역의 긴장을 지적했다. “콩고 국민을 계속 죽이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대다수 콩고 민중을 대표하며 이 곳에 나온 여러분들은 그 곳을 평화와 국민의 화합, 민족간 화해되게 하는 데 일조해야만 할 것”이라고 선시(Sun City)에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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