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파병 2003-05-30   1059

누구를 위한 전쟁기념관인가?

홍성태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상지대 교양학부 교수 rayhope@chollian.net

▲우리에게 기념할 전쟁이 과연 있는가? 삼각지 역 부근의 전쟁기념관. 사진 윤정은

삼각지 역에서 내려 전쟁기념관으로 간다. ‘기념’의 말뜻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뒤에 어떤 일을 상기할 근거로 삼음’, ‘지난 일을 상기하여 기억을 새롭게 함’이라고 되어 있다. 말뜻대로 한다면, ‘전쟁’이라고 기념하지 못할 이유는 없겠다. 그런데 우리가 기념을 대체로 ‘좋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전쟁기념관이라는 이름은 영 이상스럽게 느껴진다. 도대체 뭐 기념할 것이 없어서 전쟁을 기념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우리에게 도대체 기념할 전쟁이 과연 있다는 말인가?

어느덧 개관 10년이 된 전쟁기념관은 우선 그 큰 몸집으로 사람들을 제압하려 든다.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를 뒤적이다가 어떤 자료를 보니, ‘동 종류의 기념관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이 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전쟁을 벌인 나라도 아니고, 또 세계에서 가장 큰 군대를 가지고 있는 나라도 아니건만, 어떻게 된 연유로 세계에서 가장 큰 전쟁기념관을 짓게 되었을까? 아담하게 짓고 남산과 어울리는 자연공원을 만드는 게 훨씬 좋지 않았을까?

국방부와 전쟁기념관 부지를 포함해서 이 일대는 무려 700년 전에 군사기지, 그것도 외국군의 군사기지로 이용되었다. 처음에 이곳을 차지한 것은 몽골군이었다. 이곳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뀐 것은 100년 전에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집어삼키려 할 때부터다. 일제는 한강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요충지인 이곳의 땅 300만평을 빼앗아 군사기지를 만들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크기가 100만 평으로 줄어들고 주인이 미군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삼각지 부근에 한국의 육군본부와 국방부가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육군본부가 1980년대 말에 대전으로 옮겨가면서 그 부지에 전쟁기념관을 짓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곳이 지금처럼 군사적 공간으로 특화된 것은 결국 일제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곳에서 강력한 군사력으로 고종을 위협하고 끝내 조선을 집어삼킨 일본 제국주의를 떠올려야 하는 것이다.

전쟁기념관의 겉모습은 다소 특이하다. 성채처럼 보이는 본관의 양쪽으로 회랑이 뻗어나오게 만들었는데, 회랑 둘레로는 연못을 파 놓았고 중앙의 큰 계단을 통해 본관으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연못 위에 건물을 세워놓은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때문에 커다란 건물의 위압감과 딱딱함이 다소 누그러들게 되었다. 그러나 기계로 잘라낸 돌들을 한치의 빈틈도 없이 차곡차곡 쌓아올린 커다란 건물이 주는 위압감과 딱딱함은 어쩔 수가 없다. 전혀 유쾌한 건물이 아닌 것이다.

전쟁기념관의 이러한 겉모습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곳에 들어서면 자세를 엄숙하게 가다듬고 감사할 마음의 채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무슨 전쟁을 했느냐에 대한 질문은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그저 엄숙하게 옷깃을 여미고 고개 숙여 감사드리는 것만이 관람객이 할 일이다. 결코 유쾌할 수가 없는 건물이다. 군사독재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본관 문 위에는 ‘튼튼한 안보만이 평화를 보장한다’고 쓰인 큰 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의 품격을 뚝 떨어뜨리는 조잡한 간판이 아닐 수 없다. 이것도 ‘안보’를 강요하고, 따라서 군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간판이다. 그렇게까지 강조하지 않아도 이곳은 전쟁기념관이고, 안의 전시물은 모조리 이런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도 입구에 이런 간판을 걸어놓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렇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안보를 강요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안보 불감증’에 빠져서 군의 필요성을 무시하게 될까 걱정해서일까?

안으로 들어가니 군인들의 흉상이 수북히 놓인 곳을 지나 천장이 반원형으로 된 방에 이르게 된다. 방의 가운데는 반으로 잘라놓은 커다란 검은 돌공이 있다. 그 반원형 돌공은 물이 흘러 넘치도록 장치를 해 놓은 일종의 분수인데, 그 가운데는 다시 작은 전기등을 앉혀 놓았다. 분명히 엄숙하고 절절한 심정을 상징하기 위해 마련된 방이건만, 어쩐지 이런 소품들로 꾸며진 카페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이 방을 지나가는 것은 이를테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만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이 방으로 들어서는 복도의 양쪽에 전시해 놓은 길다란 그림은 조금도 눈길을 끌지 못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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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의 전체 구조는 보는 이에게 위압감을 준다. 사진 윤정은

이 방을 들르지 않고도 전시물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볼 가치가 없는 것을 억지로 보도록 하지 않는다는 차원을 넘어서 관람방식의 민주화라는 점에서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 전쟁기념관은 국방부가 주관하는 시설이라 그런지 일사불란하게 관람하도록 되어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우선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하고, 올라가는 길에서 군인들의 흉상을 만나게 되고, 그런 다음에 천장이 반원형으로 된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방을 돌아서 다시 아래로 내려가서 옛날 전쟁에 관한 자료를 모아놓은 전시실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관람을 시작하게 된다.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화살표가 너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단 한번도 길을 잃거나 방향조차 잃지 않고 완벽하게 관람을 마칠 수 있다.

옛날 전쟁에 관한 자료들을 보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현대사였다. 이곳에서 박정희(다카키 마사오, 오카모토 미노루)가 일제의 관동군에 배속되어 독립군을 토벌하던 시절의 이야기는 결코 들을 수 없다. 그가 중위였을 때, 정일권은 대위로 맹활약을 했다는 이야기도 물론 들을 수 없다. 박정희는 청와대에서도 자주 그 시절의 군복을 입고 놀았었다는데, 그런 자료는 학생들의 역사공부에 큰 도움이 되련만 이곳에서는 전혀 볼 수가 없다. 이렇게 전시해야 할 것을 전시하지 않는 것은 특정한 시각에 따라 역사를 생산하는 한 방식이다. 이를테면 ‘말하지 않고 말하기’이다.

이곳에서는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에 관한 자료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런 자료만을 보는 사람들은 그가 일제의 군사학교를 두 군데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자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리고 그의 군사독재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가 없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역사와 민족을 위한 전쟁기념관이 아니라 차라리 박정희와 군사독재를 위한 전쟁기념관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이곳이 교육시설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을 때, 이런 문제는 빠른 시간 안에 바로잡혀야 할 것이다.

비단 박정희와 관련된 문제만이 전쟁기념관에서 볼 수 있는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나는 ‘제주도 4·3사건’에 관한 이곳의 설명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내용은 이렇다.

북한은 남한의 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하여 남로당에게 파업과 폭동을 일으키게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제주도 4·3사건이다. 남로당은 소위 제주인민해방군을 선동하여 경찰서를 습격, 방화하고 살인까지 자행하는 등 제주도를 치안부재의 상태로 몰아갔다. 이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군경토벌대와 공산폭도들 간의 전투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으며, 10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이 설명에 따르면, 제주도 4·3사건은 제주인민해방군이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극악한 짓을 저질렀고, 나중에는 토벌대에 맞서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 사건이다.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전쟁기념관의 설명과 제주 도의회의 설명은 크게 다르다. 거두절미하고 양민학살에 관해 제주도의회는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양민학살은 군·경 토벌대의 물리력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정규전이 아닌 상황에서 설사 무장대와 내통하였다 하더라도 재판절차 없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집단 학살한 것은 비인간적인 만행이었다. 4·3 진상 규명의 열쇠는 바로 이러한 양민 대학살이라는 점에 있는 것이다.

제주도의회의 설명은 중앙정부와 국회 차원에서도 인정된 것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전쟁기념관은 이런 ‘공식적 설명’과 다른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전쟁기념관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닌가?  

전쟁기념관에서 제일 재미있는 곳은 ‘6·25전쟁실’ 중의 ‘피란생활’을 재현한 제3실이다. 이 방의 목적은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켜서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 듯하다. 실감나게 잘 만들어 놓았다. 특히 당시에 사용했던 선전포스터들을 벽에 붙여 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 방에서 내가 진정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전쟁이 일어나면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졸지에 이렇게 비참한 신세가 되리라는 것이다.

전쟁은 결코 사후에 기념해야 할 대상이 아니며, 언제나 사전에 막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교훈을 ‘피란생활’을 보여주는 방에서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이런 교훈을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국방부는 외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일종의 ‘국위선양’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 만든 조직을 전쟁을 없애기 위한 조직으로 바꿀 수는 없을 것일까?

전쟁기념관의 성격을 요약하자면, ‘잊지말자 6·25’를 중심으로 전쟁과 군대의 중요성을 국민들의 머릿속 깊이 심어 놓기 위한 국가시설이다. 그런데 이곳은 분명히 군사시설이 아니라 ‘문화시설’이다. 그러나 이곳의 전시내용이나 운영방식은 어쩐지 군사시설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이곳은 그냥 문화시설이 아니라 역사문화시설, 다시 말해서 역사를 생산하고 가르치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어떤 것을 어떻게 전시할 것인가는 아주 중요한 국가적 사안이다. 그러나 박정희나 4·3에 관한 설명에서 볼 수 있듯이, 이곳의 설명은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박정희가 만든 유명한 조직사건인 ‘동백림사건’에 관한 설명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시민단체들은 이곳의 전시방식과 내용을 꼼꼼히 검토해서 평가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전쟁기념관은 들어가는 곳과 나가는 곳이 다르다. 화살표를 따라서 계단을 오르내리며 전시실들을 한바퀴 돌게 되면, 마지막으로 한국군의 발전상을 장황하게 보여주는 전시실들을 지나서 나가는 곳에 이르게 된다. 문을 나서니 전경들이 문 앞에 모여 족구들을 한창 즐기고 있다. 전쟁에 동원될 수 있는 전경들이 전쟁기념관 본관의 나가는 문 앞에서 전쟁은 잊어버리고 족구를 즐기고 있다니! 그러나 그 모습이야말로 전쟁기념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미래의 어느 날인가, 이곳이 평화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이렇게 뒷문 쪽에 숨어서 족구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정문 앞에서 당당히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꼭 올 것이다.

한 마디만 덧붙이자. 6·25전쟁실의 설명을 보면, ‘역사상 그 비극을 찾아볼 수 없는 동족상잔의 전쟁’이라고 되어 있다. 무슨 소리인가?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극적인’으로 고쳐야 옳을 것이다.

홍성태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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