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파병 2003-10-23   519

<파병반대의 논리> 부시와 다른 미국

각계전문가와 세계지성이 말하는 이라크 파병반대의 논리

멕시코의 손꼽히는 휴양지 칸쿤은 또 다른 의미로 세계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됐다. 가난한 나라들이 똘똘 뭉쳐 ‘부자 나라들의 횡포를 참지 않겠다’고 일어서는 바람에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이 결렬되는 사건이 이달 중순 여기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22개 개발도상국 모임인 G22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자국 농민들에게 엄청난 수출 보조금을 주어 제3세계 농업을 피폐하게 하면서, 다른 나라들을 향해 시장을 열라고 압박하는 것은 몰염치한 일”이라고 성토했다. 이 협상의 결렬로 세계 통상의 앞날이 더 불투명해지긴 했지만, 그동안 거의 미국의 일방적 의도에 좌우됐던 국제무역의 ‘새 판 짜기’가 매운 역풍을 만난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이라크전 실상 깨달은 미국인들

조지프 나이는 ‘제국의 패러독스’에서 “미국이 군사력과 경제력이라는 ‘하드 파워’를 믿고 일방적이고 오만한 대외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가치의 정당성으로 다른 나라를 설득하는 힘, 즉 ‘소프트 파워’를 잃고 있다”고 개탄했다. 칸쿤 사태는 ‘정당성을 잃은 권력에 맹종하지 않겠다’는 약소국가들의 항명이라고 볼 수 있다.

칸쿤 사태가 경제적 의미에서 미국의 이기주의에 제동을 건 사건이라면, 이라크 파병문제는 군사·외교적 의미에서 미국의 정당성을 다시 도마에 올린 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지금 유엔과 전세계 우방국들을 대상으로 ‘수렁에 빠진 미군’을 건져달라는 SOS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엊그제 부시 대통령이 유엔 연설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 자세는 여전히 일방적이고 오만하다. “우리의 이라크 정책은 정당하다. 그러니 그 영광에 참여하라”는 식이다. 터키와 한국처럼 돈이나 안보를 볼모잡힌 나라들에게는 당근과 채찍을 슬쩍 내보인다. 세계의 반응은 ‘냉담’ 아니면 ‘곤혹’이다.

‘소프트 파워를 잃고 있는 제국’ 미국은 사실 지금 상당히 초조하다. 부시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를 내세우며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이런 명분은 근거가 없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미군이 들어가기만 하면 이라크가 금방 ‘해방’될 것이라고 장담했던 것과 달리, 주요 전투의 종전이 선언된 5월 이후에도 이라크군의 매복공격에 미군이 매일 희생되고 있다. 천문학적인 전비 규모가 드러나자 미국인들은 ‘공립학교의 예산을 깎으면서 왜 이라크에 돈을 쏟아붓고 있나’라고 묻기 시작했다.

이런 전쟁을 과연 왜 했나 하는 의문에 부분적인 답을 암시하는 뉴스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MSNBC의 보도를 보면, 이라크전을 통해 돈방석에 앉게 된 기업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에너지 및 병참업체 핼리버튼과 건설 및 감리기업 벡텔이다. 핼리버튼은 체니 부통령이 수년간 최고경영자로 있었던 기업이고, 벡텔의 회장은 ‘중동 자유무역지대 구상’에 관여하고 있는 부시 정부의 수출자문회의 의장이다. 병사들의 시신 뒤에서 돈을 세는 석유기업과 군수업체들이 이밖에도 수두룩하다.

에드워드 케네디 민주당 의원은 “이라크 전쟁은 (부시의 출신지인) 텍사스에서 기획된 사기극”이라고까지 독설을 퍼부었다. 심지어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실명으로 “이런 전쟁에 내가 왜 희생되어야 하나”라고 고뇌하는 글을 언론에 보낼 정도다.

‘정당성잃은 권력’ 비판 높아져

부시 정부의 강경파들은 이라크전과 관련한 정보 조작과 정경유착 혐의, 정책조정 실패 등으로 요즘 구석에 몰리고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실시되고 있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부시 대통령의 지지도는 9.11테러 이후 최저로 떨어졌고, 민주당 후보에게 질 수도 있다는 결과가 나오고 있다. 미국인들은 바야흐로 9.11 이후의 집단최면에서 깨어나 이라크 전쟁의 실상에 주목하고 있다.

이라크에 전투병을 보내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고, 또 다시 거센 파병 찬반 논란에 휘말린 한국이 주목해야 할 진실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파병을 거부하면 보복할 듯한 부시 정부가 미국의 전부는 아니며, 그 정권이 영원한 것도 아니다. 이라크전의 실상에 분노하고 미국의 양심 회복을 외치는, ‘부시와 다른 미국’도 있다. 정당성을 잃은 권력에 항명하는 목소리가 미국 밖에서는 물론 미국 안에서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워싱턴에서

이 기사는 경향신문 2003년 9월 26일자 기사입니다. (원문보기)

Copyright (c)1996 – 2003 media KHAN, All rights reserved.

제정임 (칼럼니스트)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