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로 제공을 둘러싼) 북·미의 속셈과 착오 (임원혁, 2005. 9. 23)

2년여 동안의 협상 끝에 한반도 비핵화와 동북아 냉전구도 해체에 관한 기본원칙을 도출한 6자회담이 경수로 제공 문제로 다시 한번 난관에 봉착했다.

1994년 제네바 합의 때와 마찬가지로 핵 폐기와 관계 정상화 및 에너지 지원과 관련하여 각자 취해야 할 행동의 순서를 설정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번에는 경수로 제공 그 자체에 대한 미국과 북한의 기세싸움도 치열하다.

북한이 경수로에 집착하는 이유는 상징적인 측면과 실질적인 측면으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경수로는 북한이 주권국가로서 당연히 가지고 있는 평화적 핵 이용 권리를 상징하는 수단이다. 더 나아가 경수로는 ‘북·미간 신뢰조성의 물리적 담보’도 된다고 한다. 실질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북한은 경수로를 에너지 자립의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다. 일단 경수로가 완공되면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북한에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천연우라늄을 활용하여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북한의 논리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 권리를 상징하고 북·미간 신뢰조성을 담보하는 수단이 왜 굳이 경수로가 되어야 하는지 불분명하다. 또, 북한이 농축 및 재처리 시설의 보유를 금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준수하기로 한다면 경수로를 통해 에너지 자립을 이룬다는 구상에도 차질이 생긴다. 천연우라늄을 저농축우라늄으로 만드는 농축시설을 확보할 수 없다면 경수로의 핵연료는 외부에서 도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경수로 제공을 거부하는 이유 역시 상징적인 측면과 실질적인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부시 행정부는 경수로를 클린턴식 굴욕외교의 상징으로 규정해 왔다. 만약 부시가 대북 경수로 제공에 동의한다면 이는 지금까지 그가 비판해온 굴욕외교를 스스로 답습하는 셈이 된다. 겨우 제네바 합의의 증보판이나 다름없는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동결되었던 북한의 플루토늄 프로그램이 재가동되는 것을 방치하고 동북아시아의 외교적 주도권을 중국에 넘겨줬느냐는 공격에도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인 고려와 더불어 북한이 경수로에서 추출되는 폐연료를 재처리하여 핵무기의 원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흑연감속로나 중수로가 아니라 경수로에서 추출되는 폐연료를 재처리하여 핵무기화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로 알려져 있다. 사실 1994년 당시 미국이 북한의 흑연감속로를 경수로로 대체하기로 한 것도 경수로가 군수용으로 활용되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6자회담에서 북한이 제안한 바와 같이 경수로를 국제적으로 공동관리하게 된다면 경수로의 악용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로서는 경수로 제공 문제로 북·미 간 대치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경수로 공동 관리안조차도 부시행정부가 수용할 수 없다면 경수로 제공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부시 행정부 이후로 미루도록 북한을 설득해야 한다. 동시에 대북 전력지원에 관한 남북공동연구 및 건설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신뢰를 증진시킬 필요가 있다. 특히 전기를 전량 남한에서 북한으로 송전하는 방식보다는 북한내 주요지역에 화력발전소를 짓고 북한의 송·배전망을 새로 건설하는 방안 등을 대안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임원혁/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출처: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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