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기타(pd) 2001-08-31   1500

이 만행, 이 비극을 한국인은 용서할지라도

안진걸 간사의 한일청년포럼 참가기 ③-일본에서의 가두시위, 특별한 강연, 마지막 교류회

(편집자주) ‘한국·재일·일본 청년포럼’은 재일동포들을 통해 양국의 젊은 시민사회 운동가들의 일상적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해 한일간의 발전적이며 건설적인 관계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행사다. 이 행사는 지난 97년 일본 동경과 오사카에서 개최된 이래로 매년 한국과 일본에서 번갈아 열린다.

지난 8월 2일부터 6일까지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한국·재일·일본 청년포럼 2001’은 역사교과서 왜곡을 비롯한 최근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에 대한 토론회 등 역사인식, 평화, 인권 등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다. 한국 측은 한국청년연합회(KYC), 청년정토회, 지구촌동포청년네트워크(KIN), 나와 우리 등 단체에서 50여명이 참가했다. 참여연대에서는 한국청년연합회의 특별 배려로 올해 처음 안진걸(시민권리국 간사), 장유식(변호사, 공익법 센터), 하원상(자원활동가)씨가 포럼에 참석했다. 사이버 참여연대는 세 번에 걸쳐 안진걸 간사의 포럼 참가기를 싣는다.

참가기 ① -지구상에서 가장 슬픈 땅, 히로시마에서

참가기 ② -한국·재일동포·일본 청년 300인이 벌인 3시간의 대토론

8월 5일 오후, 장장 3시간의 대토론회를 마치고 우리는 오사카 공원에서 역사왜곡을 규탄하고 평화를 요구하는 각종 행사를 진행했다. “반전반핵반제국주의”, 나는 참가자들이 바램을 직접 쓰는 흰색 프래카드에 한자 한자 정성을 들여 적었다.

땀이 비오듯하고(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나는 내내 목에 수건을 두르고 다녔다) 분수대의 물마저 미지근한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사를 계속 진행했다. 이날 주로 교포 대학생들로 구성된 재일한국학생동맹 공연단은 정성껏 준비한 소고춤을 선보였다. 이들의 소고춤은 80-90년대 대학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물 또는 집단표현극과 비슷했다. 최근 한국의 대학가에는 집체극이나 풍물 등이 점점 사라지고 국적불명의 서양문화만 활개치고 있는데, 교포 3세 청년들이 우리 문화를 꿋꿋이, 그것도 아름답게 지키고 있다니…

일본 거리에서 가두시위를!

나는 일본에 가면서 거기에서까지 가두시위를 하게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앞에 방송차량이 선두에 서고, 연사가 행진의 의의를 방송을 통해 알리고 마지막에 구호를 외치면 시위에 참가한 이들이 뒷부분만 3번 반복해 제창하는, 일본의 시위도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본측에서 일본말로만 방송을 하면 한국 참가자들은 못 알아들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이 왔다는 것도 시민들에게 알릴 겸 한국어로 방송도 하고 구호도 외쳤으면 한다고 얘기했다. 사람들의 강권(?)으로 내가 방송차에 타게 됐다. 더운 날씨에 행진하기 힘들었는데 차를 탈 수 있어 내심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일본열도에서 구호를 외치려니 설레임에 목이 메어왔다.

참고로 300여명이 참가하는 시위에 일본 경찰은 단 3명이 나왔다. 한국에서는 집회 참가자들보다 더 많은 경찰들이 나와 행진할 때 집회대열을 거의 포위하는데, 이곳은 정말 평화행진에 평화경찰이었다.

전 한국특파원 햄미요 선생의 아주 특별한 강연

오사카 시내에서 가두행진을 마치고 돌아와 우리는 전직 기자(한국특파원)이자 소설가인 햄미요 선생의 특강을 들었다. 햄미요씨는 주로 일본의 종군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자세히 알리는데 시간을 할애했다. 그가 “이 만행, 이 비극을 한국인은 용서할지라도 나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고 말하는 순간 청중들은 모두 숙연해 졌다.

햄미요씨가 정신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한국 특파원 시절. 그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서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들이 절규하며 시위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때부터 햄미요씨는 정신대 할머니 세분을 밀착 취재했다. 처음엔 취재였지만 나중에는 거의 친구로 할머니들의 얘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단지 일본의 종군위안부 만행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일본의 전쟁범죄가 얼마나 추악했는지, 일본의 역사왜곡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드러낼 수 있었다.

양국의 교류와 평화 염원의 밤

오후 6시경, 4박 5일간 일정의 마지막으로 교류회(뒤풀이)가 열렸다. 부락해방동맹 해방숙에서 열린 이날 밤 교류회는 정말 정겹고 흥겨운 행사였다. 부락해방동맹 해방숙은 일본에서 가장 오랫동안 차별받고 있는 부락민들의 자주적 단결체인 부락해방동맹의 ‘해방구’였다. 이 곳 해방숙은 수백명이 한꺼번에 잘 수 있는 그야말로 거대한 ‘숙(塾)’이다.

해방숙 운동장에서 열린 교류회는 바비큐 파티로 시작했다. 운동장 곳곳에 숯불을 설치하고 돼지고기, 닭고기, 각종 야채를 구워먹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김치가 잔뜩 준비되어 있다는 것. 아, 얼마나 그리운 김치였던가!

식사와 맥주파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계속된 평가자리에서는 각 필드워크 팀별 발표가 있었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방문했던 우리 평화필드워크팀의 발표는 참여연대 장유식 변호사가 맡았다. 발표가 끝날 즈음 재일한국청년연합, 재일한국학생동맹 회원들은 한국참가자들과 함께 반전반핵가를 불렀다. 재일교포청년단체들은 한국 운동가요를 정말 많이 알고 있었다.

필드워크별 발표를 마치고 한국 가수 손병휘씨의 공연이 있었다. 한 재일교포 학생은 그가 교포청년사회에서 안치환 만큼 유명하다며 거의 쓰러질 지경의 열광을 보내기도 했다. 참가자들은 교포청년들이 준비한 풍물에 맞춰 큰 원을 그린 채 노래를 부르며 다같이 한일 화해, 동북아 평화 등을 기원했다.

행사를 마친 참가자들은 못내 작별이 아쉬워 숙소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도 불렀다. 밤늦은 시간, 결국 인근 주택가의 항의를 받고 참가자들은 숙소로 향해야만 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이번 포럼에 참가하면서 나는 일본 활동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재일교포 2-4대 청년들로 구성된 재일한국청년연합에는 현재 4명의 상근자가 일하고 있다. 특히 공동대표 중 1명이 상근하고 있는데 그는 다른 상근자들과 똑같이 한달에 12만엔(약 130만원)씩 받고 있다고 한다. 결혼한 상근자는 1만엔을 더 받는다고 한다. 단순 비교해 보면 한국보다 처우가 좋은 것 같기도 하지만 일본의 살인적인 물가를 감당하기엔 이들이 받는 돈은 그다지 넉넉하지 않다.

이번 포럼에서 참가하면서 살펴본 일본 활동가들은 시간을 절대 어기지 않으며, 매우 정확하고 일사불란하게 일했다. 그리고 매우 헌신적으로 행사에 임했다. 이런 점은 꼭 배워야겠다.

글로는 다 하기 힘든 수많은 느낌과 배움을 뒤로 하고 나는 8월 6일 3시에 한국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참여연대 사무실로 향하면서 평화, 인권, 역사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양국 청년들간에 더 많은 교류와 대화, 만남과 실천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지금부터는 무엇을 할 것인지 곰곰히 따져보며 몇 가지를 다짐했다. 당장 내년 한국에서 열리는 한국·재일·일본 청년포럼에 참여연대가 결합해 준비해야 할 것이다. 참여연대에는 대학생 모임 ‘참깨’, 청소년 모임 ‘와’, 청년모임 ‘청년마을’도 있고, 간사들도 있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일본 갈 때 잠시 미뤄뒀던, 참여연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아, 머리야!

안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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