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핵없는 세상 2007-06-21   1320

BDA 문제의 해결인가? 봉합인가? (서재정, 프레시안, 2007. 6. 20)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묶여 있던 북한자금이 풀리면서 북핵 2.13 합의의 초기이행조치도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북한의 자금은 미 연방준비은행을 거쳐 러시아 중앙은행으로 이체된 후 최종적으로 러시아 극동상업은행의 북한계좌로 입금됐다고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가 19일 확인했다. 이에 대한 상응조치로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실무단을 초청해 영변 핵시설 가동중지에 대한 검증·감시 절차를 토의할 과정을 밟고 있다. 지난 2월 합의 이후 진전 없이 ‘뇌사상태’에 빠져 있던 6자회담 프로세스가 비로소 재생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번 해결과정에서 그동안 주변부에서만 맴돌던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총대’를 매고 나서서 자국의 은행을 통한 송금을 주선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 정부도 즉각적으로 중유 제공 등의 상응조치 이행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중국도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시동을 걸었다. 이러한 상황발전은 매우 고무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무적인 상황이 2.13합의 초기조치의 완전한 이행과 6자회담에서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 및 북미관계 정상화로 계속 이어질 것인지는 조심스럽게 지켜보며 북-미의 행동을 계속 추동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기술적 접근’   

BDA 문제’를 둘러싼 논의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북한과 미국의 인식차이다. 미국은 BDA에 북한자금이 동결되어 있으므로 이 자금을 북한이 찾아갈 수 있도록 하기만 하면 된다는 ‘기술적 접근’을 취했다.    

사실 BDA의 자금을 동결한 것은 마카오 금융당국이었다. 마카오 당국은 2005년 미 재무부가 BDA를 ‘돈세탁 우려 대상’이라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수사를 시작하자 BDA에 대한 동결조치를 취했다. 일단은 수사의 편의를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였고, 또 미 재무부의 조치가 언론을 타자마자 입금주들이 줄줄이 출금을 요구하는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국은 2.13합의 한 달 후 수사종료를 선언하며 BDA를 돈세탁우려 금융기관으로 공식 지명하고 미국 금융기관과의 거래를 중단시키는 ‘기술적’ 해결을 취했다. 그같은 조치에는 수사가 종결되었으니 마카오 당국은 동결을 해제해도 좋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렇게 해서 BDA 문제를 ‘기술적’으로 해결했다고 생각했던 미국은 그러나 BDA에 묶여 있는 북한자금을 다른 은행으로 이체하는 데서 또 다른 ‘기술적’ 문제에 직면했다. 북한자금을 취급했다는 이유로 BDA가 미 애국법 311조의 철퇴를 맞았다면 거기에 있는 북한자금을 받는 다른 어떤 은행도 같은 제재를 받을 수 있다는 ‘기술적’ 문제를 금융기관들이 제기한 것이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결국 어느 은행도 그 자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미국은 이 문제를 또 ‘기술적’으로 돌파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했다. 중국은행(BOC) 또는 미국 와코비아은행 등으로 송금하는 방안도 추구했으나, 그 역시 애국법 311조가 가로막고 있었다. 결국 미국이 찾아낸 ‘기술적’ 해결방안은 미 연방준비은행을 이용해 BDA의 북한자금을 ‘세탁’하는 것. 연방준비은행은 금융기관이면서도 미 정부기관이기 때문에 애국법 311조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기술적’ 법률해석이 이러한 해결을 가능하게 했다.    

미 연방준비은행과 러시아 중앙은행을 거쳐서 이중세탁을 했음에도 러시아 극동상업은행의 조선무역은행 계좌로 이체되는 마지막 과정에서도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기술적’으로 풀었는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어쨌든 미국은 초지일관 BDA문제를 기술적 문제로 보고 이를 기술적으로 해결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북한의 ‘정치적 접근’   

그런데 미국의 이런 ‘기술적’ 접근은 북한의 ‘정치적’ 접근과 근본적으로 충돌되는 것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애당초 BDA 문제의 발단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조지 부시 미 행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북한에 대한 총체적 압박을 구상했고, 이는 핵태세평가(NPR)에서 북한을 겨냥한 핵공격 구상,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에서 북한을 드나드는 선박과 비행기에 대한 봉쇄, 불법행위방지구상(IAI)에서 금융봉쇄라는 모습으로 구체화되었다. 북한은 BDA 문제를 이러한 부시 행정부의 총체적 적대정책의 일환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중에서도 BDA와 직접 관련있는 불법행위방지구상(IAI)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북의 이러한 접근을 이해할 수 있다.   

 IAI는 북한이 마약이나 위조지폐 거래 등 다양한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있고, 이러한 행위를 통해 벌어들이는 외화가 북한 정권을 지탱하는 주요한 버팀목이라는 부시 행정부의 인식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불법행위를 차단해서 외화 유입원을 원천봉쇄하면 북한 정권에 대한 압박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2002년 초 국무부의 리처드 아미티지 부장관과 제임스 켈리 차관보는 북한의 불법행위를 조사·분석·차단하기 위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데이비드 애셔 당시 북한실무단 조정관이자 국무부 아시아 태평양 문제 자문에게 그 책임을 맡겼다.    

이 구상은 불법행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북한 정권의 불법적 받침목을 제거하며, 불법자금이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이전에 사용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 등을 목적으로 했다. 국무부의 조치로 시작된 이 구상은 14개 미 정부 부처에서 200여 명의 관리가 참여하는 범정부적 조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15개의 외국 정부 및 국제기구와 공조하는 국제적 대응조치로 확대됐다.   

 이 IAI는 결국 애국법 311조를 적용해서 2005년 9월 BDA를 ‘돈세탁 우려 금융기관’으로 지정하고, 2007년 미국 은행들이 BDA와 거래를 금지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른다. 적어도 2002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범정부적 작업이 5년 만에 북한이 불법행위에 연루된 자금을 BDA를 통해 세탁한다는 혐의로 귀결됐고, 이 혐의에 기초해 BDA에 대한 제재조치로 결실을 본 것이다.    

BDA에 대한 제재를 집행하는 데는 가짜 담배 등을 유통시키는 국제범죄망을 일망타진한 미 사법 당국의 비밀작전이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방수사국(FBI), 법무부, 이민국 등이 동원된 이 작전은 FBI 비밀요원이 조직범죄단의 일원으로 위장해 국제범죄망에 침투하는 데 성공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에 미국은 2005년 8월 미국은 물론 중국 등에서 암약하던 80여 명을 기소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아틀랜틱시티와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구속된 59명은 위조담배 및 위조약품의 유통, 마약거래, 위조지폐 유통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고, 이중 일부는 2006년 대공미사일 등 무기를 해외에서 불법반입하려 했다는 혐의가 추가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미 사법 당국은 이 국제범죄망의 일부가 마카오의 BDA와 중국은행 등을 이용했다는 혐의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데이비드 애셔 등 전직 관리들에 따르면 불법자금의 유통 규모만 보면 중국은행을 통한 거래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중국은행에 대한 제재조치를 취할 경우 파급효과가 엄청날 것을 우려해 규모가 훨씬 작은 BDA를 일차적으로 제재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북한이 관련됐다고 미 사법 당국이 보고 있는 부분은 ‘슈퍼노트’라고 하는 위조지폐다. 그러나 법무부는 87명을 기소하면서도 위조지폐의 출처는 기소장에 명시하지 않았고, 정부 관리들도 공식적으로는 출처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미 정부 관리들 중 일부만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익명을 전제로 북한을 지명하고 있다. 위조담배도 중국산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북한에서 제조된 후 중국에 반입되어 중국산으로 재위장됐다고 의심하고 있다. 호주 등지에서 적발된 마약도 미얀마에서 생산되는 것과 성분이 같지만, 미얀마와 북한 사이에 무기와 마약을 교환하는 프로그램이 있고 이렇게 확보한 마약을 북이 재수출하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이러한 의혹 어느 한 가지도 기소할 만한 증거는 없지만 모든 범죄행위가 북한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의혹만 계속 제기하고 있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DA에 대한 제재는 북한이 저질렀다는 범죄행위가 핵심적 이유로 명시됐다는 데에 ‘정치적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외국 금융기관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범죄행위가 입증되거나 기소되지 않아도 미국은 애국법 311조를 휘두르며 금융기관이 미국의 은행과 거래를 하지 못하도록 제재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는 구체적인 불법행위를 했다는 증거도 없이 BDA를 제재할 수 있다면 북한과 거래하는 어떤 금융기관도 제재할 수 있으므로 결국 북한을 세계 금융망에서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북한이 BDA 문제를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적대정책의 ‘집중적인 표현’이라며, 이를 미국의 적대정책의 전환 의지를 확인하고 대미 핵협상의 실효성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삼아 온 것은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기술적 접근’과 ‘정치적 접근’의 근접?  

결과적으로 미국은 미 중앙은행을 거쳐 북한자금이 송금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임시적으로 BDA 문제를 우회하는 ‘기술적 해결’을 선택했다. 그러나 BDA에 대한 제재조치 자체는 취소하지 않음으로써 북에 대한 금융봉쇄는 철회하지 않고 있다. ‘정치적 적대관계’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대응은 미국 조치의 본질을 어떻게 판단할 것이냐로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또 6자회담 프로세스의 진전은 부시 행정부의 궁극적 ‘정치적’ 의도가 어디에 있느냐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북한은 미국이 ‘기술적’ 행동을 취해 BDA 문제를 일정하게 해결했으므로 이에 상응하는 ‘기술적’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조치가 적대관계를 넘어서려는 ‘정치적’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려는 작업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러시아 극동은행에 입금된 자금이 자유롭게 국제금융체제에서 사용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최근 북한은 미국의 금융제재를 “제재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것”이라며, 북한과 거래하는 외국 기업이 북한에 송금하는 것은 물론 북한 기업이 외국의 거래 기업에 송금하는 것조차 막힌 데 대한 불만을 표시해 왔다. BDA 문제의 해결은 ‘종전과 같이 자유롭게 송금할 수 있는’ 국제금융체제로의 복귀를 의미한다는 것이 북한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2.13합의 초기조치의 완전한 이행은 아직도 BDA에 남아 있는 일부 자금 및 극동은행에 입금된 자금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지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자유는 미국의 ‘정치적’ 결단을 전제로 함은 물론이다.    

기본적으로 ‘북핵문제’가 미국과 북한 사이의 적대관계에서 발생한 것이고, 이의 해결방안으로 6개국이 합의한 문서는 정치적 관계의 정상화와 비핵화를 궁극적 ‘출구’로 상정하고 있다. 이번 BDA 문제로 부각된 것은 미국과 북한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이고, 정치적 적대관계와 불신의 청산은 멀고도 험난한 길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또 남북 간의 적대관계 완화와 불신 청산이 북미관계를 강제하는 힘으로 작용해야 할 긴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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