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기타(pd) 2008-07-12   2829

[2008 평화학교⑥]분쟁개입에 대한 국제사회의 이중잣대와 우리의 무관심을 돌아본다


No Man’s Land – “살인 앞에 중립이란 없다. 방관하는 것은 이미 편을 든 것이다.”


아직도 영화의 여운이 남아 있다.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이 떠나간 자리, 그 곳에 홀로 남겨진 세라의 마지막 모습과 함께 흐르는 노래가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누가 그를 외면하였는가?

영화 ‘No Man’s Land’는 3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25만명의 희생자를 낸 보스니아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원한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 그와 반대로 유고슬라비아와의 강력한 통합을 내세우는 ‘세르비아계’. 이로 인해 발발한 내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다. “살인 앞에 중립이란 없다. 방관하는 것은 이미 편을 든 것이다.” 이 말은 과연 누구를 향한 말이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Peace keeping’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국제사회에 대한 비판이었을까? 조직 속에서 한없이 작아지기만 하는 개인과 그 구조에 대한 조소였을까? 자본의 논리에 빠져 인간문제보다는 기사거리 찾기에 급급한 언론의 진정성에 대한 일침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무관심에 대한 감독의 꾸짖음이었을까?




 ‘살인 앞의 방관자 역시 살인자다’라는 말을 통해 사랑하는 이의 사진 한 장을 손에 꼭 쥔 세라를 ‘No Man’s Land’에 홀로 남겨둔 방관자가 누군지 고민해 보자.

그 첫 번째 방관자는 바로 UN의 PKO로 대표되는 국제사회가 될 것이다. 국제사회는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하나의 기준을 세워 평화유지 활동을 벌인다. 하지만 그들은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개입 여부와 속도, 정도에 서로 다른 ‘이중 잣대’를 써왔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보스니아 내전에서 국제 사회는 오랜 시간 침묵으로 일관했다. 석유 자본이 걸린 ‘걸프전쟁’에서 미국이 그토록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PKO의 임무는 크게 평화조성, 인도적 구원, 평화유지, 평화 강제, 평화 건설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보이는 PKO의 활동은 무엇이었는가? 늑장 대응,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 결여, 군 활동의 무력함, 그리고 현지 사정에 대한 이해 부족. 일차적으로 평화를 조성하고 분쟁을 막아야 할 PKO는 사후 처리에만 급급했을 뿐 아니라 분쟁을 종식시키려는 적극적 노력 없이 구호물자 배송을 그들의 주된 임무로 삼았다.


그러면서 그저 여론의 눈치 보기에만 급급해 하던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이들이 ‘peace keeping’을 원하는 것인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PKO의 활동이 중립성이라는 기치를 내건다고 하지만 진정한 중립이란 약자의 편이 되어 힘의 균형을 맞추어 주는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수십만 명이 죽어가는 분쟁지역에서 고고한(?) 중립을 지킨다며 방관하는 그들의 행동 자체가 이미 살인을 범하는 행위라고 생각된다.




두 번째 방관자는 무기력하고 비인간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 분쟁 상황 자체의 환경일 것이다. 분쟁 상황에서 총을 들고 서로를 죽이고 죽는 개인은 어찌 보면 모두 전쟁의 희생양일 지도 모른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이런 제로섬의 전쟁을 개인의 도덕성, 인간의 양심에만 맡겨서는 전쟁이라는 큰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 상명하복 체제의 조직 속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행동을 할 수 없는 프랑스군 장교라든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눈 채 해결되지 않을 불신 속에서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세르비아계, 보스니아계 병사를 보면서 전쟁이라는 큰 구조 속에서 개인의 존엄성이 얼마나 침해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또한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인간성을 상실해버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을 극한으로 밀어 붙이는 구조적 상황을 없애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게 되었다.


세 번째 방관자는 바로 언론이다.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취재하는 언론이 무슨 방관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언론에게는 25만 명의 사상자를 낸 전쟁도, 죽어가는 개인의 생명가치도 자본 논리 속 특종잡기 앞에서는 그저 기사거리가 될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오랜 기다림 끝에 구출된 세르비아계 병사에게 기자는 묻는다. “기분이 어떤가요? 당신이 그 사람 밑에 지뢰를 묻었나요?”. 영국의 한 방송국으로 대표되는 세계 언론은 그녀에게 좀 더 자극적인 장면을 요구하기까지 한다. 그런 언론을 향해 보스니아계 병사 치키는 말한다. “우리의 슬픔을 팔지 말라”.

그 시간, 많은 사람들은 잠에서 깨 식사를 하며 티비를 돌리다가 우연히 생생한 전쟁 장면에 채널을 고정시킬 것이다. 그들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양 무심하게 이야기 할 것이다. “큰일이군.” 그렇게 사람들은 그저 이런 전쟁을 먼 세상의 슬픈 현실로 인정해가며 무뎌진 감각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언론에겐 잠시나마 그 사람들의 작은 동정심에 호소하여 채널을 잡아두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을 위해 죽어가는 이의 슬픈 얼굴에 카메라를 바짝 갖다 대고, 부모 잃은 고아의 눈망울에 초점을 맞추며, 구호물자를 좀 더 받으려고 아우성치는 이들의 가난한 모습을 영상에 담는다.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한 언론에게서 진정성 있는 역할을 찾아보기란 이미 어려워 졌다. 이런 언론 역시도 방관자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도, 관심도 없었던 ‘나’, 그리고 그런 ‘나’들이 모인 우리 모두가 이 비극의 방관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딘가에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지나가는 화젯거리 정도로서만 다가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일상적인 것인양 우리와는 선 긋기를 한 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있다.


사실 감독은 영화를 통하여 누가 잘못했는지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한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영화를 통해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이라고 한다.
 
아! 이거라면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전쟁에는 승자란 없다. 그러나 승자는 없을지라도 처절히 고통 받는 피해자는 있다. 그 피해자의 아픔을 공감하는 마음을 통해 일관성 있는 UN의 태도를 요구하고,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고, 언론에게는 진정성 있는 보도를 요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달린 일이다.


전쟁은 지뢰를 깔고 누워 꼼짝 할 수 없는 세라의 모습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항시적인 공포, 긴장 속에 인간을 팽개 쳐둔다. 영화는 방관자들로 인해 죽음을 기다리는 것밖에 다른 선택이 없는 세라를 통해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보스니아의 아픈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슬람의 씨를 말리겠다’는 목표 아래 세르비아가 저지른 집단 강간, 3년 동안 25만명을 죽음으로 몰아놓은 인종 학살 정책, 1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깨끗이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가진 세계의 화약고, 보스니아. 우리는 도움의 손길에 대한 그들의 끝없는 기다림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언제까지 세라를 혼자 남겨 두고만 있을 것인가?


 
이 글은 평화학교 참가자인 장가영씨가 7강「노 맨스 랜드」영화를 보고 쓴 감상문입니다.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는 7월2일부터 15일까지 개최되는 ‘국제분쟁의 이해와 한국의 역할’ 평화학교에 참여한 분들의 후기를 통해 더 많은 분들과 평화학교에서 진행된 내용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지속적인 관심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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