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기타(pd) 2003-03-15   1537

[분쟁지역현황] 팔레스타인리포트 : ‘약속의 땅’ :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독립국가를!

다음 글은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있는 최상구씨가 정리한 글을 기초로 해서 재작성한 것이다.

분쟁의 시작

1차 대전 발발 후 영국은 승리를 위해 아랍민족에게는 독립을 약속하는 한편, 유럽과 미국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유태인들에게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가건설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영국은 약속과 달리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라크 및 요르단과 함께 자신의 위임통치 하에 편입시키면서, 이주해오는 유태인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취하였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19세기 말 시오니즘의 부흥과 더불어 러시아와 폴란드에서의 반 유태인 운동, 나치의 유태인 박해 등으로 유태인의 이주가 더욱 가속화됨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태인과 아랍인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태인들은 이미 준군사적 조직인 이르건(Irgun)과 하가나(Haganah)를 조직하여 반영국 테러를 전개하면서 민족국가 건설을 추구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몰락한 ‘대영제국’은 골치 아픈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으로 떠넘겼고, 유엔은 이에 따라 11개 국가로 구성된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 UNSCOP)를 설치하였습니다. 이 위원회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과 유태인의 지구로 분할한다는 다수안과 아랍인과 유태인을 포괄하여 연방국가를 창설한다는 소수안 두 가지를 건의하였고, 1947년 11월 29일 제2차 유엔총회에서 표결을 통해 다수안을 채택함으로써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탄생하였습니다.


전쟁과 폭력의 역사

이스라엘의 국가수립 이후 네 차례의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이 네 차례의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점령지역을 넓혔고, 점령지역에 대한 처리문제가 오늘까지 갈등의 불씨로 남아있습니다. 이른바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불리는 제1차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80%를 차지하였고, 팔레스타인인 90만명이 난민으로 전락했습니다. 그 후 1956년 10월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으로 불림)의 발발로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의 요충지를 점령하였고, 1967년 6월 ‘6일 전쟁’을 통해 시나이반도, 골란고원,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 등 본토의 5배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중동전쟁을 통하여 얻어진 점령지인 동예루살렘과 가자지구 및 골란고원에 대하여 이스라엘은 자신의 영토로 합병시키고, 이주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1967년 이후 점령지역 1/3 가량의 땅을 팔레스타인 지주로부터 몰수하여 15만명 이상의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주민에게는 이 새 주택 중 한 동도 배정하지 않았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기존 주택에 대해서는 개축과 신축을 금지함으로서 자연적으로 이들이 이곳을 떠나도록 유도하였습니다(이로 인하여 1999년 전체 동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인구가 208,300명인데 반해, 유대인 인구는 180,000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특히 유대인이나 아랍인 모두에게 종교적으로 큰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동예루살렘의 점령과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정책은 주변국들의 반발은 물론, 점령지역 팔레스타인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이스라엘 국회는 1980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정하고, 주요 정부기관(대통령, 크네세트(국회), 행정부, 대법원)이 상주하는 곳으로서 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처럼 동예루살렘의 점령과 함께 예루살렘 전체를 이스라엘의 영토로 못박아 버렸으며, 중동평화협상 때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회피하는 자세로 일관하였습니다.

요원한 평화 : 팔레스타인지역은 희망의 땅이 될 수 있나?

팔레스타인 지역분쟁 해결은 유엔에게는 큰 과제였습니다. 유엔은 1967년 ‘6일전쟁’ 이후 242결의안를 채택하였는데, 242결의는 △ 1967년 분쟁시 이스라엘이 점령한 영토로부터 이스라엘 군대의 철수, △ 모든 적대적 요구 및 성명의 중지, 지역 내 모든 국가의 주권, 영토보전, 정치적 독립과 평화롭게 살 권리에 대한 존중과 인정을 핵심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이 결의는 팔레스타인의 권리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난민 문제에 대한 아주 모호한 언급만 있을 뿐입니다). 이후 유엔은 1974년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인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민족자결, 독립과 주권)를 재확인하였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 PLO)를 유엔 옵서버로 참가시켰습니다.

1983년 유엔은 예루살렘과 골란고원의 점령지역에 자신의 법과 행정권을 강요하려는 이스라엘의 결정은 무효라고 결정하였습니다. 또한 안전보장이사회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팔레스타인인에게도 국가주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새로운 결의안에 대해서 논의하였고, 이스라엘이 철수할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울 수 있다는 조항을 첨가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유엔 결의 242에 대하여 1971년, 철수란 “미국과 이스라엘이 결정한 범위 내에서의 철수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였습니다. 미국 주도의 중동평화협상은 팔레스타인 지역분쟁에 대해 유엔이 결정한 사항들이 배제되는 과정이었습니다.

마드리드 협상 : 1991년 10월 미국과 구소련의 공동주최로 이스라엘과 주변의 여러 아랍국가들이 협상당사자로, 이집트, 걸프협력회의(GCC), 마그레브 3국, 국제연합, EC 등이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하였습니다. 이 협상은 1992년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점령지 요르단강 서안지구(웨스트 뱅크)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에 대해서 제1단계로 5년의 잠정기간을 세워 자치를 하고 최종적인 지위는 잠정기간 동안 교섭하기로 의견이 모아졌고, 이 안은 ‘오슬로협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오슬로 협정 : 1993년 9월 공식 서명된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이 강점한 가자지구 및 요르단강 서안 예리코시에 이후 5년간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실시하되, 팔레스타인은 보건, 교육, 복지, 관광 및 문화 등 5개 행정분야에서만 자치권을 가지며 지역 내 치안을 담당하고, 외교 및 포괄적인 국방권은 계속 이스라엘이 행사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또한 첨예한 의견대립을 보여온 예루살렘문제와 시리아·요르단 등 인접국가들과의 협상문제는 95년 12월 이후로 연기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1994년 5월 13일 가자지구 내 군사기지를 팔레스타인 경찰에 이양하였고, 1994년 7월 아라파트 의장과 각료들이 예리코 자치지역에서 취임식을 거행하고 자치정부의 수립을 공식 선언하였습니다. 그 후 1995년 9월 28일 양측간에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995년 11월 2일에는 이스라엘이 점령지 철수계획에 따라 요르단강 서안 내 예닌 경찰서를 팔레스타인 측에 양도하였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1998년 10월 25일 ‘와이 협정'(Wye River Memorandum)을 체결함으로써 이스라엘은 1967년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을 단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이양하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폭력의 악순환은 이제 그만!

그러나 2000년 9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순례자간의 투석으로 촉발된 충돌에서 이스라엘 경찰이 발포하여 팔레스타인 7명이 사망하고 220명이 부상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에서 1987년 발생한 민중봉기(인티파다)이래로 최대 규모의 민중봉기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하여 2001년 1월 미국-이집트-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4자회담이 성과없이 끝났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샤론 이스라엘 총리가 1000여명의 군사를 대동하고 예루살렘 방문하여 이 지역의 주권을 양보할 수 없으며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영토에 병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반발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팔레스타인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폭탄테러 공격이 재개되었고,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공격과 철수를 약속한 점령지역 내 군대주둔 지속이라는 악순환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샤론총리의 예루살렘방문으로 촉발된 알-아크 봉기때 팔레스타인들은 미국이 제공한 공격용 헬리콥터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야만적 행위는 철저히 미국의 지원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에게 중동지역의 석유자원은 자국내 경제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유럽과 일본을 견제하는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중동지역에서 미국은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하여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축으로 중동국가들을 견제해 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이해(아랍 민족주의에 대한 견제와 중동권의 단결 분쇄)를 충실히 이행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해 미국은 1999년 해외 원조총액의 약 40%를 지원하고(이는 대 중동 총 원조액의 54%에 달합니다), 오슬로 협정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이스라엘의 이주정책과 폭탄테러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차별적 보복공격에 대한 묵과 속에서 공정한 중재자로서 행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테러만 일방적으로 과장되는 가운데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원조는 오히려 증가되었습니다(2001년 2월 19일, 미 국방부는 이스라엘과 미국이 막 5억 달러에 달하는 최신형 아파치 공격용 헬리콥터를 제공에 관한 협상을 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에 핵심쟁점, 즉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양도하는 영토의 범위와 시기, 이를 바탕으로 한 팔레스타인의 독립국가 선포 시기 및 예루살렘 문제에 대해 타결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더욱이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있어 미국의 일방주의는 거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중동문제는 매우 어두운 전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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