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기타(pd) 2003-03-15   5442

[분쟁지역현황] 코소보 리포트 : 배타적 민족주의가 빚은 참극 : 코소보

다음 글은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있는 최상구씨가 정리한 글을 기초로 해서 재작성한 것이다.

발칸반도 제국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 : 유고슬라비아의 붕괴와 연쇄분쟁의 발발

구(舊) 유고연방은 1980년 티토의 사망과 동유럽국가들의 민주화 물결 속에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선두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등 4개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1991년 슬로베니아가 무력충돌 끝에 독립한 이후, 크로아티아지역에서도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간의 분쟁이 발생하였고, 유럽의 경제제재 압력으로 1992년 크로아티아도 독립하였습니다. 크로아티아는 유럽의 게르만 계통 인종이고 종교도 카톨릭이며, 구(舊) 유고연방 이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지역입니다.

한편 이러한 독립에 자극 받은 보스니아공화국도 1992년 독립투표를 통하여 독립선언을 하였습니다. 4백만여 명의 공화국인구는 회교도(44%), 크로아티아계(17%), 세르비아계(33%)로 구성되어 있는 보스니아의 독립에 대하여 세르비아계가 강력히 반발하고,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가 자민족 보호를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면서부터 분쟁이 심화되었습니다. 세르비아 민병대의 ‘인종청소’가 극에 달하자 무역봉쇄, 해외자산 동결조치에 이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공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엄청난 폭격 이후 수많은 평화협상의 진행으로 회교-크로아티아 연방이 51%의 영토를 갖고 49%를 세르비아계 공화국이 갖는 영토분할을 통해 20만명의 사망자를 내고 3백만여 명의 난민을 양산한 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이 1995년 독립하였습니다.

배타적 민족주의에 의한 탄압과 저항의 폭발 :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들의 분쟁

코소보지역은 현재 알바니아인의 조상인 일리리아인(Illyrians)들이 살았으며, 오스만 투르크의 침입이전에는 세르비아인들이 이주하여 세르비아 왕국을 건설하고 그리스정교의 문화를 꽃피운 세르비아인들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였습니다. 1300년대 오스만 투르크의 진출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알바니아인들이 코소보지역으로 이주하였고 19세기에 알바니아인들의 독립투쟁에도 불구하고 1912년 1차 발칸전쟁의 결과로 코소보지역은 세르비아 세력에게 넘어갑니다. 이로 인하여 1940년대까지 약 50만의 알바니아인들이 터키 등지로 쫓겨났고, 약 1만8천 세대의 세르비아인들이 이주하였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연방의 탄생으로 코소보지역은 구(舊) 유고연방의 세르비아공화국에 편입되게 됩니다.

티토의 민족융화정책에 힘입어 1974년 자치를 인정받아 알바니아어의 사용과 대학설립 등이 가능해졌습니다. 정치적 권리의 신장에도 불구하고, 코소보지역의 비옥한 토지와 금, 은, 석탄 등 풍부한 자원은 이 지역을 마치 식민지로 인식하게 되는 배경이 되어 연방정부에 대한 알바니아인들의 반감은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1981년에는 완전한 공화국지위를 요구하는 알바니아인들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여 수 천 명의 대학생들이 체포되었고 수 만 명이 감옥에 갇히는 등, 코소보지역과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탄압은 갈등의 씨앗을 심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알바니아계 학생시위와 1988년 대규모 시위와 1989년의 광부노동자들의 파업 등에 참가했던 78만5천여 명이 수 백 킬로미터를 맨발로 걸어 감옥에 끌려가는 등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는 가운데, 1989년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대 세르비아 건설’이라는 민족주의적 기치아래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였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1993)에 따르면 그 결과는 이렇습니다. 알바니아어의 사용을 금지하였고, 판사들은 전부 세르비아인들로 교체되었으며, 모든 알바니아인들의 일간지와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이 금지되었고, 알바니아인들에게는 대학과 도서관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2만3천 명의 알바니아 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습니다. 15만2천 명의 알바니아인들이 직장에서 쫓겨났고 3만6천 명의 세르비아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주립 아파트에 거주하던 알바니아인들은 그들의 권리를 상실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알바니아인들이 서유럽으로 건너가 난민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수가 1990-1995년 사이에 40만 명(코소보 전체인구는 약 2백만이며 90%가 알바니아인입니다)에 달했습니다.

한편 세르비아계 난민들을 코소보지역에 정착시키면서 탄압과 갈등이 더해갔습니다. 코소보는 인구밀도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인들이 이미 15,810명이 정착(1995년)하는 등 밀로셰비치는 적어도 10만 명의 세르비아인들을 이주시켰습니다. 밀로셰비치의 코소보 ‘식민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문화적·역사적 유산들의 청산까지 포함되었습니다. 유네스코의 보호아래 있는 유물들이 박물관에서 철거되었고, 대신 세르비이아계의 정통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와 같은 세르비아인들의 횡포에 맞서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1991년 독립헌법 채택에 이어 1992년 마침내 코소보공화국을 선포하였고,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계 간의 빈번한 무력충돌이 발생하였습니다. 1995년 보스니아 분쟁의 평화협정에도 코소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등 국제사회로부터도 소외되자 1993년에 창설된 코소보해방군(Kosovo Liberation Army: KLA)을 통하여 1996년부터 무장투쟁을 본격화하였으며, 이에 대해 세르비아도 코소보 해방군에 대한 전면적인 소탕작전을 감행하였습니다. 충돌이 계속되던 중 1998년 2월말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공화국 경찰이 살해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분쟁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나토의 공습과 억지 평화의 한계 : 또 다시 고조되는 긴장

사태가 확대되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군사개입 및 경제제재의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대화를 촉구하였지만, 신(新) 유고연방은 국제사회의 개입 및 코소보의 분리독립을 거부하면서 공세를 강화하고, 대대적인 ‘인종청소’를 하였습니다. 1백만여 명의 알바니아인들이 실향민이 되거나 난민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유엔은 무기금수 조치를 취하고, 유럽연합 등과 함께 평화협상을 진행하였지만 1999년 프랑스 랑부예에서 열린 코소보평화협상이 결렬된 이후 미국특사의 협상도 실패하였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은 유엔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함을 강조하면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의한 군사개입을 반대하였지만, 미국 등 서방국가들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의 표결이 무산될 것을 우려하여 유엔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나토를 통하여 공습을 개시하였습니다. 공습과 함께 계속된 협상을 통해 즉각적인 군사행동중단, 군, 경찰을 포함한 준군사조직의 철수, 유엔 평화유지군파견 및 임시정부 수립 등을 내용으로 한 협상안을 결국 유고가 받아들여 사태는 일단락되었습니다.

이른바 인도적 개입(humanitarian intervention)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미봉책에 불과하였습니다. 나토의 무차별 공습과 오폭으로 인하여 엄청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였고, 정치적으로도 뚜렷한 해결을 보지 못한 채 유엔의 관리 감독하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차후 코소보의 지위를 논의한다는 선에서 그쳐 갈등의 핵심부분은 그대로 남겨진 상태였습니다. 현재 코소보는 2001년 총선을 실시한 이후 2002년 이브라힘 루고바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상당한 자치권이 부여되었지만, 유엔 행정기구가 사법, 국방, 외교부문을 여전히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003년 2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라는 국가연합이 출범한 가운데, 유엔 코소보행정기구의 대표는 아직 코소보의 최종 지위를 협의하기에는 이르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독립을 원하는 많은 코소보내 알바니아인들의 반발이 거세 코소보문제는 새롭게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유엔 행정기구는 ‘최종 지위’를 말하기에 앞서 지켜야할 원칙들을 제시하였는데, 세르비아 난민들의 귀환, 소수자를 위한 운동의 자유, 베오그라드(세르비아 수도)와의 대화, 민주적 기구들의 형성과 사법체계의 확립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세르비아 난민의 경우 약 20만 명의 난민 중 단지 6천 명이 떠났을 뿐이며, ‘인종청소’를 벌였던 베오그라드와 대화를 시작한다는 것 역시 어려운 문제입니다. 또한 코소보 지역의 세르비아인들은 알바니아인들의 독립논의에 맞서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연방에 귀속되어야 하며, 자신들도 알바니아인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나서 갈등이 급속히 표면화되고 있습니다.

오래 지속되는 재앙

유엔 전쟁범죄조사단이 2천여 구의 유해를 발굴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나토의 공습이후 자행된 세르비아인들의 ‘인종청소’가 유럽 안보 협력기구(OSCE)가 발표한 보고서에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1999년에 발간된 이 보고서에 의하면, 마을 주민들에게 공포감 조성을 위해 어린이를 의도적으로 살해하는가 하면, 경찰관을 포함한 4명이 임산부를 성폭행을 가하여 태아가 유산되거나 유방이 절단당하고, 심지어 열차 내에서 부모가 보는 앞에서 어린이들이 사지가 절단되는 사건들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유엔아동기금(UNICEF)과 유엔난민청, 유럽안보협력기구(OSCE)가 2002년에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보스니아와 코소보, 마케도니아 주둔 평화유지군이 매춘 여성들의 가장 큰 고객이며 매춘을 목적으로 한 인신매매가 기승을 부려 1997년 17만5천여 명의 여성이 중동부 유럽과 러시아에서 매매됐으며 이중 3분의 1이 18세 미만 소녀였습니다.

유엔환경계획(UNEP)조사단이 2001년에 밝힌 바에 따르면, 나토의 공습을 받은 코소보 8개 지역에서 방사능 오염 징후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미국이 공습당시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열화우라늄탄은 원자력발전소나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원료를 위해 천연 우라늄을 농축하는 과정에서 생긴 우라늄찌꺼기로 만든 무기입니다. 우라늄 파편이 사람 몸 속에 들어가는 경우 납처럼 체내에 축적되어 각종 암을 발생시키고, 유전자를 변형시켜 기형아를 출산하거나 불임 내지 조산하게 하는 등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더욱이 우라늄 파편은 수 킬로미터까지 날아가 주변 지역을 방사능으로 오염시키고, 토양은 물론 지표수와 지하수까지 오염시키게 되어 그 피해가 심각합니다.

지난 걸프전의 참상보고에서 열화우라늄탄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어린이의 사진이 공개되기도 하였는데, 이와 같은 열화우라늄탄의 사용은 지난 걸프전에도 사용되어 이른바 걸프전 증후군을 일으켰는데, 코소보 공습도 마찬가지로 미군이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한 보스니아나 코소보에서 복무했던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체코의 병사 18명이 백혈병을 비롯한 암으로 사망했으며, 프랑스 병사 4명과 벨기에 병사 4명은 백혈병에 걸리는 등 ‘발칸증후군’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번 이라크 침공에도 이와 같은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걸프전과 코소보 공습에서 충분한 실험으로 더욱 ‘명중률’이 높아진 미사일과 함께. 오래 지속되는 재앙,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전쟁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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