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기타(pd) 2003-03-15   2434

[분쟁지역현황] 르완다 리포트 : 빈곤과 독재가 부른 비극 : 르완다(Rwanda)

다음 글은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에서 자원활동을 하고 있는 최상구씨가 정리한 글을 기초로 해서 재작성한 것이다.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

아프리카 중앙 키부호수 옆에 위치한 조그마한 나라 르완다. 국토의 대부분이 고산지대여서 경작지는 국토의 40%정도이고 경제는 낙후되어 있어 90%이상이 농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르완다는 인구의 10%가 투치(Tutsi)족이며 후투(Hutu)족이 90%정도를 차지하고 있고, 소수민족으로 트와족이 있습니다.

15세기경 유목민족이던 투치족이 남하하여 후투족을 지배하는 왕국을 세웠습니다. 이후 19세기말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르완다 부룬디(르완다와 부룬디의 통합) 식민지로 편입되었다가 1차 세계대전 이후 1919년부터 르완다 지역은 벨기에가 위임통치를 하게됩니다. 1925년 통치기본법이 시행됨에 따라 국왕 및 추장에 의한 전통적 지배체제가 근대화되었지만, 독일이나 벨기에는 모두 르완다의 군주제도와 지배계층인 소수 민족 투치족의 지배를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효과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투치족과 후투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투치족을 우대하고, 그들을 교육시켜 식민 통치의 말단 관료 집단으로 삼은 것입니다. 투치족은 1959년 후투족의 폭동 전까지는 농업에 필요한 관개지역의 대부분을 소유했으며, 추장의 95퍼센트, 관료의 88퍼센트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르완다는 제2차 세계대전 후 1946년에는 벨기에의 신탁통치령으로 바뀌었다가 1959년 국왕의 사망 이후 후투족의 폭동으로 투치족 약 8만 명이 국외로 빠져나갔으며, 마지막 군주인 키게리 1세도 망명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961년 6월, 유엔신탁통치이사회의 감시로 실시된 주민투표와 총선거에서 후투족의 정당인 공화민주운동당(MDR: Movement Democratic Republic)이 승리하여 자치정부를 수립하였고 1962년 유엔의 신탁통치가 종결되어 르완다공화국으로 독립하게되었습니다. 이후 1973년 후투족 출신의 주베날 하비야리마나(J. Habyarimana)의 쿠데타로 국가개발혁명운동이 단일정당이 되어 1당 지배를 1980년대말까지 하게됩니다.

한편, 1959년 국왕의 사망이후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경쟁은 계속되어 1963년에는 강제추방된 부룬디의 투치족이 르완다를 기습공격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르완다 내부의 투치족 1만 명을 살해하고, 1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우간다 및 르완다 북부지역에 분포하였던 투치족은 르완다 애국전선(Rwandese Patriotic Front : RPF)을 결성하였고, 1990년부터 분쟁은 본격화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유엔이 개입하여 1993년 아루샤 평화협정을 성사시켜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과도정부를 구성하기로 하는 등 사태의 진정기미가 보였지만, 하비야리마나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후투족 강경파들이 1994년 대통령이 탑승한 비행기를 로켓포로 공격하여 사망하자 걷잡을 수 없는 대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자이레로 피신하였고, 아루샤협정이행을 감시하기 위한 유엔 르완다 지원단을 포함하여 정부인사들이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르완다 애국전선은 이 혼란을 계기로 다시 르완다 진입을 시작하였습니다. 정부군, 대통령 경호대 및 정부측 민병대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대량학살이 자행되었으며, 르완다 애국전선이 점차 점령지역을 확대하자 투치족의 보복을 두려워한 후투족이 1994년 4월 8일 하루동안 28만명의 난민들을 탄자니아로 피난시켰습니다. 르완다 애국전선은 수도 키갈리를 포함하여 르완다 지역을 점령하고 민족단결정부(Government of National Unity)를 선포하였습니다.

분쟁의 원인 : 빈곤과 환경파괴가 주범이었다

1959년 설립된 후투족의 혁명정부는 사회주의정책을 실시하면서 부모의 땅을 자식들이 동등하게 분배받는 토지보유제를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북부의 부유한 후투족들은 이를 이용하여 토지소유를 더욱 넓혔고, 농민들은 더 보잘 것 없는 땅, 가파르고 산성화가 진행된 땅으로 내몰렸습니다. 작물들은 잘 자라지 못하는 데다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토지의 분배가 더욱 작은 지분으로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부족한 경지를 늘리기 위해 야산을 계단식 농경지로 개발하였고, 이로 인하여 홍수가 났을 때 산이 담당해야할 조절기능이 전혀 발휘되지 못하고, 오히려 거대한 양의 토사가 흘러내려 피해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습니다. 1989년에 르완다에서 경작가능한 땅의 50%는 경사가 10도 이상이었는데, 1990년까지 침식으로 인해 해마다 8천헥타르의 땅이 씻겨 나갔고(이 면적에서는 4만명의 식량이 생산됩니다), 계속되는 경작으로 토지는 더욱 황폐해지면서 작물생산은 격감하였습니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농촌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고 특히 대부분의 가난한 농부들이 살고 있던 남부에서는 후투족 정권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후투족의 분열을 활용하고자 했던 투치족의 공세와 더불어 1980년대 세계 커피시장의 붕괴로 르완다의 커피 수출단가가 1970년대에 일인당 60달러이던 것이 1991년에는 13달러로 추락하는 등, 1990년대 르완다의 농민들은 빈곤과 전쟁으로부터 협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속되는 정치불안과 더불어 책임과 장기적 정책이 없는 환경·토지정책은 고질적인 빈곤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사회불안의 골은 깊어져만 갔던 것입니다(환경연합 발행 “함께 사는길” 1월호 참조). 즉 지속가능하지 못한 환경보전이 빈곤을 가중시켰으며, 이로 인한 사회불안을 각 정치세력이 이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엔,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대량학살의 광기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유엔의 조사에 따르면 대량학살이 있었던 1994년 9월, 인구 790만명이 500만명으로 감소되었고, 80∼100만명이 희생당했으며, 200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우리가 작년 월드컵때 광화문에 모인 인원이 몇 달만에 사망한 것입니다!). 유엔은 대량학살 이후 대규모 긴급구호와 기금모금을 통해 난민들의 귀향사업과 난민촌지원사업을 실시하였는데, 1994년 당시 7억 6,200만불이 인도적 지원에 사용되었습니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에 따르면 2003년 3월 현재 탄자니아에는 1000여명 정도의 르완다 난민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들은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과 탄자니아 정부의 협의아래 르완다 이외의 지역을 포함하여 재정착할 수 있을때까지 난민촌에 남을 수 있다고 밝혔고, 유엔 세계식량기구(World Food Programme: WFP)는 지난달부터 두달간 갱생프로그램(rehabilitation programme)에 들어간 사람들에 대하여 1,493톤의 식량을 지원키로 르완다 화해와 통합을 위한 위원회(the national commission for unity and reconciliation in Rwanda)와 합의하였습니다.

한편,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1995년 르완다 대량학살에 대한 국제형사특별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Rwanda: ICTR)를 만들어 책임자 기소와 처벌을 시작하여 50명이 넘는 관련자를 체포하여, 현재 13건이 종료되었고 62건이 아직 재판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대량학살관련 행위자는 4백여명으로 추정되었지만, 군 고위인사 등 해외로 빠져나간 사람들이 있는 등 활동의 한계로 인하여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 ICC)의 창설논의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분쟁의 후유증은 물과 식량의 부족, 생활시설들의 결여 등 보건/의료 분야의 어려움과 더불어 말라리아, 에이즈, HIV등 질병도 르완다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유엔이 추정 집계한 전 세계의 에이즈 환자는 2000년말 현재 3,610만명인데, 전체 환자 중 70%가 아프리카 사하라이남 지역에 살고있습니다. 르완다의 경우 아홉명중 한명꼴로 HIV (AIDS : Acquired Immunodeficiency Syndrome를 유발하는 바이러스) 감염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서구 제국주의 역사는 유죄 : 피 흘리는 인류의 고향 아프리카

서구의 노예무역과 식민지배로 피흘렸던 아프리카는 여전히 그 후유증으로 고통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를 분할 통치했던 서구는 식민지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 종족간의 경쟁, 적대감 등을 이용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과정에서 서구 열강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그어놓은 국경선은 다양한 종족이 분포하고 있는 아프리카에서 통합된 발전을 꾀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식민모국과의 관계 속에서 여전히 불균형적인 산업구조가 지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냉전 하에서 미국과 소련은 영향력 확장을 위해 종족간의 경쟁을 이용하여 아프리카 대륙은 사분오열되어 장기적인 개발전망이 불투명하게 된 것입니다.

1993년 아루샤 휴전협정이후 유엔은 2,500명의 평화유지군을 르완다로 파견하였는데, 평화유지군은 대량학살이 발생하기 3개월 전부터 대량학살의 조짐에 대한 경고와 실질적인 지원요청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했었으나 서구와 미국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991년 소말리아에서 발생한 무력분쟁에 대해 미국은 1992년 12월 다국적군을 구성하여 안정적 식량보급을 비롯한 구호 및 내전 종식을 위한 소말리아 내 평화유지활동에 들어갔는데, 소말리아에는 미국계 석유회사가 네 곳을 석유 시추 중이었습니다. 탈냉전이후 철저한 이해관계에 따른 선·택·적·인·도·적·개입의 한 예입니다.

식민지 정책으로 인하여 산업발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까닭에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들은 많은 외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자국민의 보건/ 의료/ 교육 등에 써야될 예산이 외채 이자의 연체료를 물기도 벅찰 지경입니다(이 분야의 예산보다 연체료 등에 대한 지불이 평균 3배에 이르고 있습니다). 르완다 역시 1995년 현재 1인당 소득 310달러(미국의 1.5%)에 1인당 외채가 122달러에 이르고 있습니다. G8, 다보스 포럼 등에서는 개발원조를 강조하지만 정작 말 잔치에 불과하고 2002년에 열린 유엔 개발원조재원회의에서도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에서 합의한 바 있는 선진국 GNP의 0.7% 지원은 미국 등의 반대로 삭제되었습니다(한국의 개발원조 규모도 GDP의 0.1%에 못 미치고 있습니다).

빈곤타파, 지속가능한 개발, 질병극복 등 유엔이 설정한 밀레니엄 목표는 새로운 세기에 지구촌이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이것은 전쟁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쟁은 이를 재생산할 뿐입니다. 서구 선진국들은 최빈국들에 대하여 책임있는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자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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