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기타(pd) 2008-05-13   2534

[일본 헌법 9조 세계대회 참가기 ②] 간바레 큐조! (힘내라 9조)



이상이냐 현실이냐의 기로에 선 일본 헌법 9조

올해 5월은 일본 평화운동에 있어서 매우 뜻깊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일본 나고야 고등재판소에서 일본의 항공자위대 이라크 파견이 헌법 9조에 대한 위헌이라고 판결을 내림으로써, 일본 헌법 9조의 역사적 의의를 다시금 일깨워 준 일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이 흥겨운 소식에 화답하듯 일본에서의 헌법 9조를 지키려는 시민운동 역시 올해 제법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매년 펼쳐지는 일본 헌법 제정 기념일인 5.3 집회에서는 많은 참가자들이 몰려들어 규모있는 거리행진이 진행되었고, 뿐만 아니라 치바현 마쿠하리 메세에서 열린 ‘전쟁 폐지를 위한 헌법 9조 세계대회(Global Artical Nine To Abolish War)’에서는 일본 전국과 세계 각지에서 2만 2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성황리에 행사를 치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본의 우경화와 ‘보통국가화’가 가속화되면서 일본인들 스스로 이에 대한 위기의식이 심화됨에 따라, 헌법 9조를 지켜 나가겠다는 풀뿌리 양심세력이 광범위하게 확대되고 있고 국제사회 역시 일본 헌법 개정을 지지하는 움직임들이 증대되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 5.3 헌법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행진을 하기 위해 대열을 짓고 있다.  

 일본 헌법 제정 국경일이었던 5월 3일, 평화기행 참가자들은 히비야 공원에서 열리는 ‘5. 3 헌법 집회’에 직접 참석했다. 헌법 9조 개헌을 반대하는 각계각층이 몰려든 큰 행사였다. 집회순서가 거의 막바지에 이를 무렵에 도착한 우리는 긴자(Ginza) 거리 행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우리의 최종목표는 집회에 참가한 일본인들에게 한국에서도 헌법 9조를 지지하는 평화운동 진영이 존재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연대할 것이라는 의지를 피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집회 대열에 섞이기 보다는 길가 인도쪽으로 나와 우리 앞을 지나는 행진 대열을 향해 큰소리로 “간바레 큐조 (힘내라 9조), 스끼데스 큐조 (좋아해요 9조), 마모루 큐조 ( 지키자 9조)”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리를 발견한 일본인들은 우리의 열띤 응원에 맞춰 큰 박수를 보내주었고, 집회 방송차량은 마이크로 한국인들도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리기도 했다. 어떤 일본인은 우리가 외치는 한국어를 직접 따라 하기도 했고, 또 어떤 분은 우리의 손을 부여잡으며 기꺼이 반가워하기도 했다. 우리 역시 길거리에서 그렇게 온 힘을 다해 구호를 크게 외치다보니 목이 다 쉴 지경이었지만 어느 새 한일 연대의 소중한 경험 속으로 흠뻑 빠져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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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러한 헌법 9조 지지 운동의 흐름은 곧장 다음 날부터 이틀 간 치바(Zieba) 지역에서 개최된 약칭 ‘헌법 9조 세계대회’로 이어졌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행사에 그렇게 많은 인파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룰지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기에, 모두들 적잖이 놀라워하면서도 서로 기쁜 표정을 감추질 못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메인 행사가 열리는 국제회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정원이 7천명으로 한정되어 있어서, 나머지 수천 명의 사람들이 결국 입장조차 못하고 되돌아가야 하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 생기기도 했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사람들 중에는 크나큰 아쉬움에 눈물까지 흘리는 노인도 있었다고 하니 이번 행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짐작케 한다.


 헌법 9조 세계대회가 개최된 첫 날, 마쿠하리멧세 이벤트홀에서 열린 전체회의에서는 역대 노벨 평화상 수상자, 저명한 국제 평화운동가들을 포함한 인사들이 축하 메시지를 전하고 이번 대회의 기조를 알리는 연설들이 이어졌다. 특히 미국의 헤이그 평화선언을 주도한 코라 와이스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평화에 대한 감동적인 표현 등의 유려한 말솜씨로 인해 연설 도중 관중석으로부터 수차례 큰 갈채를 받기도 했다.


 연사들 중 한 명이었던 코스타리카에서 온 카를로스 바르가스 국제반핵법률가협회 부회장은 코스타리카가 군대 보유를 금지하는 헌법 제12조를 통해 어떻게 그동안 평화를 유지해 왔는지를 설명했다. 미국은 코스타리카에게 니카라과 침략 시 영토 사용을 요구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미군의 항구적 군사기지를 건설하려고까지 시도한 적도 있다. 그러나 코스타리카는 이에 전혀 흔들림없이 미국의 군사적 압력을 거부해왔고, 1984년 중립 선언을 이끌기도 했다. 그는 다른 나라들도 코스타리카와 일본처럼 헌법에 평화조문을 제정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이로써 국제사회에서의 군사적 영향력을 축소시켜 나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 헌법 9조 세계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마쿠하리 메세 국제회의장 안을  잔여석 하나 없을 정도로 가득 채웠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연설자는 베아테 시로타 고든 씨였는데, 그녀는 일본의 패전 뒤 미일 연합총사령부 소속으로 일본의 헌법초안 작성에 참여했으며, 제24조 남녀평등 조항을 직접 만든 인물이었다.


 그녀가 강조한 연설의 주된 내용은 자국인 미국이야말로 세계 안전보장을 위협하며 또한 일본이 9조 정신을 버리도록 계속해서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위험한 국가라며 이를 강력히 비판했다. 또한 미국이 세계에서 주요 무기 수출국인 반면, 일본은 9조 덕분에 무기 수출을 금지하고 있다며 이를 꼭 지켜 나가야 할 것이라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저희(미국인)들은 군수산업체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평화로 돈을 버는 산업을 만들고 싶다… 일본의 9조 정신을 지켜나가는 것이 세계를 평화로 이끄는 것이다”라는 인상적인 메시지로 끝을 맺었다.


 한국의 이석태 변호사의 역시 아시아에서의 일본 헌법 9조의 의의를 강조하면서도 현재 전개되고 있는 미일 동맹이야말로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를 저해하는 크나큰 요소임을 분명히 비판하는 연설을 통해, 오늘날 일본의 군사화에 대한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 개막식에서 한국의 이석태 변호사가 대표 연설을 하고 있다.  

                             ▲ 베토벤 9조 교향곡 합창 공연 모습

 당일 행사의 절정은 아마 엄청난 규모의 시민과 변호사로 이루어진 합창단의 베토벤  ‘9조 교향곡’ 공연이었을 것이다. 대회장 안에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그 합창의 하모니는 과연 베토벤의 인류애에 대한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9번 교향곡 작품의 위상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전 세계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희구하는 깊은 감동을 울려왔다.


 헌법 9조 세계대회 마지막 날인 5일에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워크숍과 공연, 전시회, 분과회의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되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열화우라늄 무기 금지’와 ‘군대가 없는 세계로’ 라는 주제의 기획토론회에 참석해 보았다.


 첫 번째 토론회에서는 세계 최초로 폭탄의 사용, 보유 및 거래 등을 전면 금지하고 있는 벨기에가 마침내 열화우라늄 무기 금지까지 법제화 할 수 있었던 엔지오와 국회의원들의 전략적 협력 활동 등에 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열화우라늄 무기는 코소보에서는 나토군이, 이라크에서는 미군이 실제로 사용한 사실이 알려져 한 때 국제사회를 경악케 한 적이 있다. 특히 우라늄 무기 사용은 반핵운동에 있어서도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평화운동의 지속적 관심과 국제연대는 반드시 필요하다.


▲ 분과회의 중 무력분쟁 예방을 위한 글로벌파트너십 (GPPAC) 아시아태평양 포럼 개최 사진  

 ‘군대없는 세계로’ 기획토론회에 들어갔던 이유는 사실 제목 자체가 너무나 파격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전쟁도 아닌 군대가 없는 세계라는 말은 매우 낯선 표현이기 때문에 토론회 제목 자체가 나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해 왔다. 이 토론회에는 한국에서 온 임재성 병역거부자가 패널로 참가했다. 그는 한국의 병역거부 운동의 역사를 설명하고 병역거부자로서의 고통과 역경, 한일 평화운동의 연대 등을 호소력있게 전달해 많은 이들로부터 깊은 공감을 얻어냈다.  

 이틀 간 진행되었던 헌법 9조 세계대회는 점점 움츠러드는 추세였던 헌법 9조 호헌 세력들의 재결집을 극대화하고 더불어 평화운동에 대한 상상력을 마음껏 발산했던 축제의 장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5. 3 집회에서 노인들이 참가자들의 주를 이루었던 풍경과는 달리 여기 세계대회에서는 ‘피스보트’를 주도해온 젊은이들이 활발히 자원활동을 펼치고 있고 동시에 여러 프로그램 속에서 자신들의 끼와 열기를 거침없이 보여주기도 해서, 회의장은 연신 활기가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본의 헌법 9조가 아시아에서 가지는 상징성과 중요한 역사적 맥락, 국제사회 공동의 과제 및 의의 등에 접근하기 보다는 ‘일본의 헌법 9조’를 예찬하고 그 내용을 포장하는 데 매몰되는 모습이 너무나 짙어 보였다. 더구나 숫자 9를 활용한 온갖 상품들을 보며 한편으로는 9조를 물신화하는 느낌도 들어 약간의 거부감이나 경계심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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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지금으로서는 헌법 9조에 대한 내용적 지지를 넘어서는 과감한 운동이 더욱 절실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은 평화헌법 국가라고 하면서도 막상 그 이면으로는 어떤 국가보다도 국내 전력을 강화해 온 모순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PKO 특별법>, <테러특조법>, <주변사태법> 등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앞장서서 미일동맹을 강화해 오며 헌법 9조의 테두리를 함부로 넘어서 왔다. 그럼에도 이번 대회에서는 이러한 움직임들을 저지시키기 위해 중지를 모으기 위한 토론이나 국제연대를 모색하고자 하는 모습들이 현저히 부족했던 것은 이번 대회의 한계점라고 지적할 수 있다. 
 
 일본 헌법 9조를 놓고 개헌/호헌이라는 이분법적 틀은 일본 자국 내의 한정된 관점으로 이것이 국제 평화운동에 있어서 적절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주지하다시피 그 어느 대륙에서보다 동아시아에서의 군비확장이 집중적으로 과열되고 있는 마당에, 급기야 일본의 헌법 9조까지 개정된다면 이는 무한대의 군비 경쟁 촉발을 야기할 것은 자명한 결과이다.


또한 일본 우익세력들은 헌법 9조를 존속시키는 것은 국제정치 현실에서는 이상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우리 역시 립서비스로만 안보 딜레마를 지적할 것이 아니라 충분히 실현가능한 현실적 조건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즉 헌법 9조 수호는 일국가의 개별적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평화를 지켜내는 과제가 될 수밖에 없으며, 이를 위해 동아시아 시민사회 협력과 연대의 강화는 당연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헌법 9조 세계대회는 동아시아 평화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대한 기로 속에서 개최된 행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헌법 9조의 상징적 의미를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한 한일 시민사회 연대의 노력들은 지금부터 본격화되어야 한다.


글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지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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