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한국 시민사회의 제언(2002. 11. 13)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한국 시민사회의 제언

1. 최근 한반도 정세와 북한 핵문제의 대두

1.1 최근 한반도에서는 북한의 경제개혁 개방 조치, 남북관계의 확대 심화, 북일간 정상회담 수교협상 등으로 평화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한반도 정세는 2001년 초 미국의 부시행정부 등장 이후 고조되었던 북미간의 긴장에도 불구하고 추진되었던 남한의 대북포용정책과 북한의 대외관계개선 노력의 결과라고 판단된다. 특히 북한은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일본인 납치사건을 인정하고 생존해 있는 피랍자를 일본으로 귀국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1.2 그러나 미국이 2002년 10월 17일 북한이 평양에서 있었던 미국 특사와의 접촉에서 북한이 핵개발 계획을 시인하였다고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한반도에 긴장이 다시금 고조되고 있다. 미국의 발표 이후 북한 핵개발 계획과 관련한 보다 구체적인 사실이 추가적으로 확인되고 있지 않은 가운데, 북한의 선 핵포기를 주장하고 있는 미국 부시행정부는 최근 중간선거 승리 직후 중유 및 남북경협 중단까지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한 사회 일각에서는 대북화해협력정책의 기조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성급한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1.3 이러한 상황은 자칫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을 야기하고 2003년도 한반도 위기설을 현실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깊은 우려를 낳고 있다. 우리는 현 상황이 향후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남북관계의 발전에 매우 중대한 고비임을 깊이 인식하고,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북한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본원칙을 분명히 함과 아울러 이를 실현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들을 제안하고자 한다.

2. 북한의 핵개발 계획에 대하여

2.1 북한의 핵개발 의혹과 관련하여 보다 구체적인 사실이 추가적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북한이 실질적으로 핵무기 개발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가지고 있다면 어느 정도 추진되었는가 하는 점은 현재 확인되고 있지 않다. 또한 북한이 미국과의 접촉과정에서 어떠한 의도로, 또한 어떠한 수준에서 핵개발 계획을 시인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2-2 이러한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북한이 핵개발 계획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추진한다면 이는 핵무기비확산조약(NPT)과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 그리고 북미 제네바 합의(1994)등의 기본 합의틀을 무너뜨리고 한반도와 동북아는 물론, 전세계에 걸친 핵무기 확산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

미국이 이미 북한의 핵무기 등 이른바 대량살상무기를 ‘테러와의 전쟁’의 관점에서 다루겠다며 선제공격을 공식화한 국가안보전략을 채택한 상황에서, 북한의 핵무기개발 시도는 한반도에서의 군사 행동의 빌미를 줄 수 있다.

2.3 그러나 한편, 우리는 북한이 핵개발 계획을 다시 추진하고자 한 배경에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제네바 합의 자체를 불신하면서 합의에 명시되어 있는 북한과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의 완전한 정상화를 추진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2003년까지 완공하기로 한 경수로 사업 역시 이제 겨우 20%대의 공정율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또한 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을 하지 않겠다는 소극적 안전보장 약속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는 비핵국가에게 핵무기 개발 포기를 요구함에 있어 미국이 보장해야 할 가장 중요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이다.

무엇보다도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선제 공격 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오히려 북한의 핵개발 의지를 부추기고 있다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미국의 대북 강경책을 이유로 북한의 핵개발 계획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이러한 미국의 일방주의적 정책이 북한이 핵개발에 관심을 갖게 하고 나아가 한반도 정세불안을 가져오는 주요한 요인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3. 북한의 핵개발 계획 시인과 관련한 논란에 대하여

3.1 북한의 핵개발계획 시인과 관련한 논란에서 미국은 정확한 정보를 밝히지 않고 있어 국제사회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태도는 우리로 하여금 미국이 대북적대정책의 명분을 쌓기 위해 북한 핵 문제의 위험성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계획과 관련한 구체적인 근거와 북미간의 접촉을 통해 확인한 사항을 보다 정확히 밝혀야 한다.

3.2 북한의 핵개발 계획 시인과 관련하여 남한의 일부 언론과 정치권이 보여준 태도는 북한의 핵문제가 갖는 중대성에 비하여 매우 경솔하였다. 미국의 발표에 대한 정확한 분석도 없이, ‘북한의 핵개발 계획 시인’을 ‘북한의 핵무기개발 추진 혹은 보유’로 단정하거나, 논란과 관련된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않은 채 대북화해협력정책의 실패를 단정하고 대북강경정책의 추진을 강요하는 것은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생존을 진지하게 걱정하는 언론과 정당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3.3 미국이나 남한 내 일부 세력이 주장하는 북한에 대한 강경정책은 북한의 핵개발 계획을 막아낼 효과적인 처방이라고 할 수 없다. 대북강경정책은 북한 지도부를 불안에 빠뜨림으로써 오히려 북한의 핵개발을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북한 핵문제와 관련한 북미간의 공방과정에서 북한은 미국이 체제를 보장해준다면 안보상의 우려를 해소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북한의 의도와 목표를 보다 면밀하게 파악하려는 유연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4. 북한핵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원칙: 평화, 비핵, 화해협력

4.1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적 해결

무엇보다 한반도 주민들의 안전이 우선되어야 하며 어떠한 명분과 이유로도 무력사용이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미국은 지난 94년 북한 핵위기 당시 영변의 핵 관련 시설에 대한 폭격과 함께 미군 수 십만명을 동원하는 전쟁 계획을 수립했었다’는 페리 전 국방장관의 발언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한반도 7천만 겨레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전쟁계획이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결정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다시 반복되는 것을 우리는 결코 용납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혀둔다.

4.2 한반도 비핵화와 제네바 합의의 존중

어떤 일이 있어도 한반도에서 핵무기가 사용되거나 핵무기가 개발되어서는 안된다. 한반도 및 동북아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그 동안 체결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NPT, 제네바 합의는 존중되고 준수되어야 한다. 우리는 북한 핵개발을 반대함은 물론 같은 맥락에서 미국의 핵선제공격 구상 역시 반대함을 분명히 한다.

4.3 화해, 교류협력 지속

이번 핵파문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및 관련 당사국이 평화적인 해결 원칙에 합의한 만큼, 남북한은 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평화로운 남북관계를 조성해야 한다. 북한 핵문제가 한반도 생존권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인 만큼 한국 정부는 이 문제에 있어 당사자임을 분명히 하고 북미간 재협상을 이끌어내기 위한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해야 한다.

5.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제안

5.1 제네바 합의 준수 의지 재천명

제네바 합의의 파기는 곧 한반도의 위기이다. 비록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북미 쌍방간에 체결되었던 제네바 합의를 부정하는 것은 한반도 핵위기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합의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이와 관련, 일부에서 제네바합의의 폐기를 주장하는 것은 합의부재의 심각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할만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 합의 준수 이행을 재천명하고, 제네바 합의 틀 내에서 북한의 새로운 핵개발 의혹을 해소하는 것과 동시에 미국이 북한에 대해 이른바 소극적 안전보장(NSA)을 확약하는 일부 조항을 수정/보완하는 방안을 권고하고자 한다.

5.2 전제조건 없는 조속한 대화

‘대화와 협상’없이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는 것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핵개발 포기와 불가침조약은 선후의 문제일 수 없다. 우리는 북-미 양국 정부에 조속한 시일 내에 아무 전제조건 없이 만나 북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보장을 위한 대화에 착수할 것을 촉구한다. 이와 관련 우리는 북한이 최근 ‘불가침 보장 없이 핵 포기 없다’는 주장에서 한 발 물러나 대화에 착수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에 주목한다. 이런 점에서 미국은 핵 불사용 약속을 비롯한 대북한 체제안전보장 없이 강경일변도의 정책으로 북한 핵문제를 풀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5.3 ‘평화, 비핵, 화해협력’ 결의안 채택

우리는 지난 94년 핵위기 당시 정치권이 대책없는 강경론만 내세우다 실질적인 협상에는 소외되었던 뼈아픈 경험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여야를 떠나 모든 정치권이 이제라도 핵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초당적으로 협력할 것을 요구하며, 국회 차원의 ‘평화, 비핵, 화해협력’결의안 채택을 제안한다.

5.4 일본 등 주변국들의 협력

지금까지 남한의 대북화해협력정책을 지지해 온 일본 등 주변국들과 KEDO 관련국들에게 미국의 일방적인 대북한 고립·압박 정책에 동참하기보다는 북한과의 관계개선과 인도적 지원 및 교류협력을 지속함으로써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지렛대 역할을 해 줄 것을 정중히 요청한다.

5.5 북한 중유지원은 차질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KEDO 중유선적 선박의 회항을 요구하는 미국의 주장에 반대한다. 북핵 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도 중유공급 등 합의된 지원계획은 차질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 우리는 특히 KEDO 분담금의 70%를 지원하고 있는 한국 정부가 중유공급 중단 등 미국의 대북제재조치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고, 북한에 대한 전력지원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주변국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을 촉구한다.

2002.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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