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의 평화바이러스> 박정희기념관과 친일인명사전

[삽화 하나] 박정희 기념관

박정희기념관은 지금 건립 중단 상태다. 행정자치부가 709억원이 들어가는 기념관 건립 및 운영 사업비 가운데 건립비 214억의 절반쯤인 100억원을 국민모금으로 확보하는 조건으로 국고보조금 200억원 지원을 약속했으나, 기부금 모금이 늦어져 국고지원을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공사중단엔 시민사회의 줄기찬 공사중단 촉구도 크게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기념관 건립을 주도해온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회장 신현확)는 2003년 3월 중순 ‘기념관 건립을 지지하는 국민들로부터 모두 100억원을 모금했다’고 밝혔는데, 그 내역을 들여다보면 ‘국민모금’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전경련 50억, 무역협회 10억원, 대한상공회의소 10억원, 엘지 10억원 등 대부분 특정시기에 집중 ‘모금’(!?)된 뭉칫돈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자율적 국민모금’이라는 기본원칙에 어긋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부분은 재일동포 출신 금융인 이아무개씨의 5억원을 포함한 12억원 정도이다.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둘러싼 사회-역사적 논란에 하잘 것 없는 내 의견을 덧붙이려는 게 아니다. 이글에서 내 관심사는 ‘자율적 국민모금’이라는 대목이다. 신문과 방송을 보다보면 ‘대통령 박정희’ ‘민족지도자 박정희’를 추앙하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기득권 세력으로 일컬어지는 돈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그렇다.

그런데 왜 박정희 기념관 건립 모금에 많든 적든 추렴을 하는 사람은 적은 것일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박정희 전기를 집필해온 조갑제 월간조선 대표이사 겸 편집장님은 얼마나 냈을까?

[삽화 둘] 친일인명사전

지난 1월1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는 공동기자회견을 열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국민성금 모금 캠페인을 벌인 결과 열흘 만에 2만5천여명의 국민과 네티즌이 참여해 목표액 5억원을 넘겼다는 사실을 공표하기 위한 자리였다. 애초 이들은 3ㆍ1절까지 1억원을 넘기고, 8월15일 광복절까지 5억원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고 한다.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 열기가 모금 기획 주체들의 판단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 16대 국회의원들이 제밥그릇 챙기기에 여념이 없어 관련 예산 항목을 삭제하는 바람에 중단될 뻔 했던 친일인명사전 편찬 사업은 말의 바른 뜻에서 ‘국민의 힘’으로 이어지게 됐다.

두 삽화를 대하는 느낌이 어떠신가. 메아리없는 국민모금과 폭포수 쏟아지듯 열화와 같은 참여가 이뤄진 국민모금. 다카키 마사오란 또 다른 이름을 지녔던 만주군관학교 출신 박정희 대통령의 거대한 기념관 건립 사업과, 겨우 5억원의 사업진행비조차 국회가 예산을 배정하지 않는 바람에 중단될 뻔했던 친일인명사전 편찬 사업.

이 둘 사이에서 한국사회가 지금껏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겪을 수밖에 없는 혼란과 갈등의 뿌리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인가? 이 두개의 서로 다른 삽화가 미래의 한국 역사가 어떤 사람들에 의해 기획되고 실천될지 시사점을 제공해준다고 말한다면, 예단이 될까? 삶이란, 역사란, 잔머리와 세치 혀가 아니라 그저 몸으로 우직하게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굳이 성자와 대학자의 가르침을 빌려야만 알 수 있는 것일까.

[삽화 셋] 이라크 평화봉사단

2월13일 저녁 경기도 수원 한국방송연수원에선 한국사회포럼2004 첫날 행사의 하나로 ‘파병반대운동의 평가와 과제’(참여연대 주관)라는 테마토론이 이뤄졌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평화활동가 임영신씨는 그 귀추가 주목되는 ‘활동계획’을 밝혔다. “…이라크 추가파병안에 찬성한 국회의원 155명의 아들, 딸 명단을 파악해, 이들에게 이라크 평화봉사단에 참가해달라는 초청장을 보낼 계획….”

아, 정말 궁금하다. 임씨의 제안에 얼마나 많은 국회의원 2세들이 응할지.

난 정말 확인하고 싶다. 이땅에도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프랑스어로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뜻함)라는 것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부모의 업을 짊어지고, 코뿔소의 외뿔처럼 묵묵히 제 갈 길을 걸어가는 어떤 이들을 보고 싶다.

이제훈(한겨레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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