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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군축센터    한반도 평화를 위해 비핵군축운동을 합니다

  • 평화나누기
  • 2003.10.13
  • 1031
  • 첨부 1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는 일은 적어도 당분간은 없겠군.’ 지난 10일 노무현 대통령이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해 ‘재신임을 묻겠다’고 밝혔을 때, 머리를 스치듯 지나간 생각이다. 대통령의 긴급 기자회견으로 촉발된 ‘재신임 정국’은, 블랙홀마냥 모든 현안들을 빨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며칠째 그 얘기말고는 신문과 방송에서 비중있게 다루는 뉴스도, 독자나 시청자가 관심을 갖는 뉴스도 없는 것 같다.

단정할 순 없지만, ‘재신임’ 문제가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나기 전까지 한국 정부가 파병 여부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무슨 근거로? ‘재신임’을 둘러싼 논란은 대통령 선거 이후 흩어져있던 ‘전선’을 명료화하는 쪽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미 이런 경향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다소간의 얽힘이 있겠지만, 전선은 친노 대 반노, 개혁 대 반개혁을 축으로 형성될 것 같다. 이 경우 ‘친노+개혁’ 대 ‘반노+반개혁’ 연합전선적 대립구도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이 상황에서 노 대통령(또는 한국 정부)이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다? 가능성이 낮은 가정이다. 국내 상황만을 놓고 볼 때, 파병 결정은 ‘친노+개혁’ 세력의 결집보다는 분열과 이반으로 귀결될 ‘정치적 자살골’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 ‘재신임 정국’이 마무리된 뒤에는? 여러 추정이 가능하지만, 지금 그 얘기를 할 급박한 필요가 있을까? 다만 현시점에서 확실한 것은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다. 파병 반대를 외쳐온 이들로서는, 뜻밖에 찾아온 이 ‘시간’에 최선의 대응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파병 논란에는 한 사회의 운영원리와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관련한 근원적인 쟁점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사회, 그리고 그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은 어떤 삶의 관계를 바라는가. 그 선택엔 한국사회가 딛고 있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뿐만 아니라, 현실을 바꿔가는 ‘꿈’이 중대 변수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대는 어떤 세상을 꿈꾸시는가?

각설하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전투병 파병’은 막아야 한다. 지난 4월 서희-제마부대의 이라크 파병과 이번에 논란이 일고 있는 ‘전투병 파병’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 물론 공병-의료지원단을 보낸 1차 파병도 아메리카합중국의 불법부당한 침략 행위에 대한 ‘정치-외교적 지원’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공병-의료 지원단 파견은 하기에 따라선 한국의 민주주의와 한국-이라크 관계에 심각한 상처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성심성의껏 이라크 민중을 도움으로써 ‘아메리카합중국의 힘에 밀려 이곳에 왔지만 우리는 당신들과 원수를 지고 싶지 않다’는 호소를 할 수도 있고, 힘이 지배하는 냉정한 국제사회의 질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이라크 민중들이 ‘한국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투병 파병은 다르다. 미군의 점령에 맞선 이라크 저항세력과의 ‘교전’을 늘 피해다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서로 죽고 죽이는’ 사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쯤 되면 한국은 아메리카합중국의 ‘지원세력’이 아니라, 불법침략의 당사자가 되고 만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극단적 대치는, 역사가 증명하듯, 증오와 분노의 악무한적 나선 순환을 일으킨다. 정치적 견해가 참으로 보수적인 한 베트남전 참전 장성은 말했다. “처음엔 잠깐 갔다오면 되는줄 알았다. 그러나 베트남의 정글에서 우리는 8년을 헤맸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지금껏 그때 일로 시달리고 있다. 이라크가 베트남과 다르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나?”

사실 미국이 한국정부에 전투병 파병을 요청했을 때, 청와대 비서실의 반응은 두 갈래로 갈렸다. 파병 찬성과 반대로. 민정-정무 수석실은 ‘파병 반대’를, 국방-외교-안보 라인과 경제 라인은 ‘파병 찬성’쪽 목소리를 낸 것으로 전해졌다. 정치상황 등 국내 지지기반 문제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민정-정무 라인은 파병 결정이 현 정권의 명운이 달린 내년 4월 총선 결과에 치명적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유인태 정무 수석이 언론과 인터뷰, 얼마 전 시민사회의 여론 수렴 과정에서 밝힌 소회는 이런 ‘정치적 판단’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현 정부의 주요지지 세력의 극심한 분열과 약화를 초래할 ‘전투병 파병’을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더군다나 전투병 파병은 단발성 논란이 아니라 장기지속형 악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라크 현지에 파견된 한국군이 죽거나 다칠 때마다 여론은 요동칠 것이고, 그 화살은 노 대통령과 정부로 향할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전 파병 당시와 결코 같지 않다.

반면 미국 자본과 다름없는 초국적 자본의 움직임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경제 라인과, ‘북핵문제’로 표상하고 있는 북한-미국간 갈등을 원만히 안착시켜야 할 외교안보 라인은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파병 결정쪽으로 여론을 몰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듯 하다. 이들에게는 ‘조폭’ 미국의 힘이 무엇보다도 버겁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물론 개별 자본의 이해관계는 서로 다를 수 있다).

청와대 안의 서로 다른 두 판단 가운데 어느 쪽이 힘을 얻을지 지금으로선 단정적으로 예측하기 어렵다. 현실적으로 파병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선 워낙 많은 변수들을 고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국내 여론, 파병 논란을 둘러싼 국내 사회세력간의 역관계가 핵심 변수의 하나가 되리라는 점이다.

이점에서 토요일이었던 지난 11일 오후 서울 대학로의 풍경은 희망이자 절망이다. 351개 시민사회단체들로 이뤄진 ‘이라크 파병반대 국민행동’이 ‘이라크 전투병 파병 반대 범국민행동의 날’로 정한 11일 서울에선 5천여명이 대학로에 모여 ‘파병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1200만여명이 살고 있는 거대 도시 서울에서 ‘전투병 파병’에 반대하는 이가 고작(!) 5천여명이란 말인가. 물론 아닐 것이다. ‘파병 반대’ 세력이 결코 소수가 아님은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꿈꾸는 것만으론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자명하다. 서로의 꿈과 양심에 다리를 놓기 위해선 몸을 움직여야 한다. 이라크 민중에게도, 한국민중에게도 비극일 수밖에 없는 ‘전투병 파병’을 막기 위해선 ‘마음의 정치’를 넘어서는, ‘몸의 정치’가 절실하다. 의견 표명 이상이 필요하다. 용기와 지혜가 연대하는 ‘몸의 정치’말이다.

<첨언> 선택지. ①전투병 파병 ②금전적 지원과 비전투병 파병의 결합 ③병력 파견없는 금전적 지원 ④병력 파견도 금전적 지원도 거부.

그대는 한국정부가 어떤 선택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이제훈 한겨레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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