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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군축센터    한반도 평화를 위해 비핵군축운동을 합니다

  • 평화나누기
  • 2003.12.09
  • 971
이달 중순께 열릴 듯하던 2차 6자회담이 아무래도 해를 넘겨 열릴 듯하다. 남한과 중국 등의 적극적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미국의 견해차가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은 ‘동시행동’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미국은 ‘북한 먼저’라는 기존 태도에서 물러서려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미일은 북쪽의 ‘동시행동’ 요구에 ‘조화된 조처’라는 합의 문구를 만들어냈는데, 문제는 미국이 얼마나 의지를 보이느냐이다. 미국은 “핵 폐기가 실질적으로 이행돼야 서면 안전보장을 제공할 수 있다”고 하는 반면, 북한은 “(북핵의)실질적인 해체는 (대북)안전보장뿐 아니라, 경수로든 화력발전이든 (핵발전에) 상응하는 대체전력을 보장할 때에만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라고 맞받아 쳤다.

‘페리 프로세스’라는 게 있었다. 1998년 8월31일 북한의 ‘대포동’ 1호 발사와 그 즈음 미국 강경파들의 ‘공작’으로 불거진 이른바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 등으로 한반도 위기가 높아지자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조정관에 임명했다.

한국 정부는 긴장했다. 페리 조정관은 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미 국방장관으로 북폭을 고려했던 장본인이었다. 김대중 정부 당시 외교안보정책의 핵심 고위 인사는 그때 “‘큰일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실제 페리 조정관은 초기엔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해결을 강조한 한국정부의 태도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인식과 해법에 긍정적 반응을 보였던 셔먼 대사 등 미국 내부의 전문가들과 임동원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의 적극적 노력과 설득 등으로 결국 ‘페리 프로세스’로 이름 붙여진, 페리 보고서가 나왔다. 실사단의 방북 조사 결과 ‘지하 핵시설’로 의심받았던 금창리 지하 시설은 텅 빈 동굴로 밝혀졌고, 미국과 남한 정부는 페리 보고서의 ‘포괄적이고 통합된 접근’에 따라 대북 접근에 속도를 냈다.

알다시피 2000년 6월 역사상 최고인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고, 그해 10월엔 조명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의 워싱턴, 평양 교차방문 등으로 ‘조-미 공동성명’이 발표됐고, 김정일-클린턴 정상회담도 성사 직전 단계까지 나아갔다. 지난 일에 가정이라는 게 무의미한 일이긴 하지만,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 이뤄졌다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개표 논란 끝에 부시가 아닌 고어가 당선됐다면, 지금 한반도의 풍경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 한 켠이 아리다.

‘김대중 프로세스’라고도 불리는 ‘페리 프로세스’는 어떻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아메리카합중국 정부의 오랜 불신의 골에 대화의 다리를 놓을 수 있었을까. 언젠가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분신이자 동업자로 평가받는 임동원 전 청와대 외교안보통일 특보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페리 보고서의 핵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냐’고.

그의 답은 즉각적이고 단순했다. “상호위협감소”(mutually reducing threat). 그러니까 페리 보고서에 담겨 있는 5가지 주요 정책 권고 사항 가운데 그 첫 번째에 해당하는 “…북한의 핵무기 및 미사일 개발에 대하여 포괄적이고 통합된 접근을 채택할 것. 구체적으로, 상호위협감소에 기초를 두고 북한과의 협상을 개시할 것.…”이 핵심에 속한다는 지적이다.

윌리엄 페리 전 미 국방장관은 99년 9월17일 PBS 뉴스 아워의 앵커 짐 레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북한이 미사일(‘핵’으로 단어를 바꿔도 상관없다-인용자) 프로그램을 원하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첫 번째가 억지력 확보, 즉 안보이다. 북한이 누구를 억지한다는 것인가? 그건 바로 미국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북한에게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북한은 우리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상호위협감소’라는 정책개념어에는 분단 이후 ‘북한의 군사적 위협’만을 주장하던 미국 정부의 근본적으로 달라진 대북인식이 담겨 있다. (주한미군 등을 포함한) 미국(의 존재)가 북한의 체제 안전에 위협이 된다는 북한의 주장을 인정하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서로가 위협이라고 말해온 것들을 줄여나가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자는 것이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사물과 상황을 이해하려는 인식의 전환, 바로 이게 부시 대통령 집권 이전 몇 년간 남-북한, 북-미간 해빙을 가능케 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 부시 미국 행정부의 대북 인식에선 ‘상호위협감소’라는 개념어를 눈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대신 ‘악의 축’ 발언 등이 이어졌다. 이해는 없고 응징을 위한 선언만이 난무했다.

최근 정부의 핵심 관계자는 사석에서 “핵문제를 풀려면 잃어버린 ‘엠’(상호위협감소 접근 방식)을 찾아야 한다. 클린턴 행정부 때 있다가 부시 행정부 들어와서 사라진 엠을 찾지 못하면 핵문제 해결은 어렵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부시의 사전엔 ‘엠’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 겨울이 더욱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이제훈 한겨레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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