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군축센터 칼럼(pd) 2012-11-21   3772

[평화에 투표하자⑭ ] 권리는 멸시를 뚫고 싹튼다

총선과 대선에서는 평화와 외교ㆍ안보 문제도 중요한 쟁점입니다. 선거를 앞두고 외교ㆍ안보 현안이 갑자기 떠오를 때의 표심은 예측하기 어렵지만, 긴장을 고조시켜 표를 얻으려는 시도는 이제 어림도 없다는 사실은 분명해 졌습니다. 그러나 갈등 조장에 대한 유혹을 느끼는 듯한 움직임은 여전히 있습니다.

프레시안과 참여연대는 올해 총선과 대선 국면에서 벌어지는 긴장 고조 행위를 감시하고, 올바른 대외전략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평화에 투표하자’ 시리즈를 공동 기획했습니다. 여러 전문가들이 필자로 나서는 이 연재에서는 현안에 대한 대응은 물론 평화를 바라는 이들이 외교ㆍ안보 쟁점에서 가져야 할 기준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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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주민이 말하는 평화권

권리는 멸시를 뚫고 싹튼다

이대훈 성공회대 교수,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실행위원


만약 사람들이 전쟁과 국가폭력에 휩싸이지 않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 열망을 불가침의 인권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런 권리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국제인권법 전문가들이 잘 만들어서 인류에게 선물로 주게 될까, 아니면 선진적인 국가가 먼저 자국민에게 선물로 만들어주고 다른 국가들이 따라가는 모습이 될까?


노동자의 인권도 여성의 인권도 청소년의 인권도 그저 쉽게 주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점을 상기하면 평화롭게 살 권리가 어떻게 태동할 지도 조금은 예측할 수 있다. 노동자 인권이라는 생각이 조금씩 퍼져 많은 사람의 삶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노동자들이 가장 비인간적으로 대우받고 억눌렸던 박정희 독재시기였다. 여성의 인권, 청소년의 인권 역시 그 인권이 가장 적나라하게 박탈당하고 멸시받던 현장에서 싹이 텄다. 아마도 평화롭게 살 권리로서의 평화권 역시 그럴 것이다. 이미 그렇게 태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군과 안보의 이름으로 주민의 생존권이 박탈당하는 곳곳이 아마 그런 현장일 것이다.


지난 10월 4일, 생명평화대행진 전야제를 마친 직후에 강정마을에서는 해군기지건설 저지투쟁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온 강동균 마을회장을 비롯한 마을 주민 약 20여명이 참석하는 “공감 토크(Talk)” 간담회가 열렸다. 이 날 간담회는 단순하지만 깊은 주제로 열렸다. 먼저 지금까지 해군기지 건설 강행에 직면해서 강정 주민들이 가장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찬찬히 듣고 기록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은 그래서 ‘우리가 평화롭게 살려면 필요한 권리가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간담회 말미에는 각자 ‘강정 주민의 평화의 권리’ 하나씩을 종이에 적어서 칠판에 붙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주민 스스로 만든 평화의 권리 선언이 탄생했다.


강정 주민들은국가의 일방적인 사업강행을 5년간의 수모로 기억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종이에 이렇게 적으면서 평화롭게 살 권리를 표현했다.


– 후손들에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는 것이 강정마을의 권리이다.

– 원래 강정의 모습을 지켜내고, 자연환경과 사람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환경과 어우러져 사는 것이 우리의 권리이다.

– 국민을 탄압하지 말고 협상문화가 있는 것이 우리의 권리이다.

– (국책사업이라도) 주민들의 동의를 받는 것이 인권이다.

– 주민 동의 없이 무리한 국책사업을 공권력으로 해결하려는 게 문제다.

– 법과 원칙이 바로 서야 인권이 보장된다.

– 우리 마을에 검은 경찰들 안 보이는 것이 우리의 인권이다.

– 옛 친구들과 같이 모임도 하고 즐겁게 노후를 맞았으면 좋겠다.

– 그냥 마을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주고 받고 즐거웠음 더 좋겠다.

– 해군기지 공사 중단이 인권이다.

– 우리 마을에 공동체가 열두 개나 있다. 사람이 사는 것은 이웃 간 서로 협력하고 서로 도와가면서 즐겁게 함께 사는 것이 인권이다.

– 자연과 인간은 하나 되는 것이 인권이다.

–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 인권이다.

– 국가에서 추진하는 모든 일은 모든 국민이 다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반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 우리의 작은 외침을 외면하지 말라.

– 법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을 종북좌파로 몰지 않는 것이 인권이다.

– 미래 후손과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 강정마을의 무궁무진한 생명을 지키는 것이 인권이다.

– 구럼비 바위에 앉아 노래할 수 있는 것이 인권이다.

– 국가가 절차를 안 지키면서 공사를 강행하는 것이 잘못이다.


 

           ⓒ이대훈


이를 우리는 한국 최초의 평화권 선언이라고 불러주어야 한다. 법률 용어보다 표현이 더 생생한 것 외에는 손색이 없는 주민들의 이 선언에는 평화와 인권의 가치와 원리가 녹녹히 배어 있다.


선언에 있는 표현을 기존 인권 언어로 살짝 바꾸어 보자. 살던 대로 평화롭게 살 권리, 전쟁에 휩쓸리지 않을 권리, 기본적 존엄성과 권리를 인정받고 보호받을 권리,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하는 바에 따라 살 권리,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와 피해를 구제받을 권리, 부당한 공권력 행사를 통제하고 저항할 권리, 국가안보의 명분과 정책이 인권의 기준에서 조절되고 제약되어야 할 필요, 공동체의 문화와 전통을 유지할 권리, 공동체 주변 환경을 보존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살 권리, 경제활동과 권리를 침해받지 않을 권리, 의사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결사집회의 자유, 행복추구의 자유, 공동체의 발전을 공동체원 스스로 결정하는 발전권, 비슷한 처지에 처한 사람들과 연대할 근거로서의 인권.


이 모두 현대 인권규범의 핵심적인 내용들이다.


▲ 지난 10일 오후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마을 해군 제주기지사업단(민군복합형 관광미항 제주사업단) 앞에서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강정마을회 등이 제16차 `제주해군기지백지화 전국시민행동의 날’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해군기지와 같은 국가안보 시책에 대해 당사자 시민들이 갖는, 불가침의 보편적 인권이 무엇인지 드러내자는 발상은 지금으로는 비현실적인 것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인권이 그랬듯이 새로운 인권을 비현실적으로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인권은 그 멸시를 뚫고 싹트고 자라고 결국은 지위를 얻는다.


결국 인권의 지위까지 도달하게 만드는 그 힘은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양심과 행동에서 나온다. 국가가 시민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스스로 멈춘 적이 별로 없다. 박탈당한 사람들의 힘은 삶의 정당성에서 나온다. 함께 사는 공동체의 윤리성에서 나온다. 이 힘은 단지 새로운 인권을 만드는 힘이 아니라, 유사한 국가폭력과 생존권 박탈이 재발하는 것을 예방하는 힘이기도 하다.


평화의 권리를 써 나가면서 한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저 이제 육십이 넘었는데요. 살면서 그냥 좌파다 우파다 이런 거를 뭐 들은 적도 없고 그것을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었습니다. 마을에 해군기지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제 저희들 아무 생각 없는 오직 이제 강정 구럼비를 지키겠다고 이렇게 마음 먹는 우리 시민 사람들까지들 다 좌파경향으로 이제 정치적으로 몰고 가거든요 그것이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막 좌파로 몰아가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진짜. 아 이제 우리가 이제 산 것이 헛살았는가 하는 그런 진짜 그 생각을 하는 마음이 굉장히 괴롭습니다…그래서 아 진짜 이건 너무 진짜 그때서부터 진짜 이 국가를 조금 막 원망도 해보고…아 그런 진짜 이렇게까지 몰고 가는데 진짜 우리가 이제 산 것이 헛 살았는가 또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잽힐란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이 말을 옆에서 듣던 다른 주민은 평생 ‘이런 수모를 겪은 적이 없다’고 했다.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은 국가의 군사기지 강행 때문에 생활의 터전도 빼앗기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마을 공동체도 빼앗기고 신체와 정신의 안전도 빼앗기고, 추억과 문화의 근거도 빼앗겼다. 거대한 공권력 앞에 두려움에 떨면서 빼앗겼다. 강정 주민의 평화권 선언은 이 빼앗김과 두려움에 대한 회복의 비전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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