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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2003.12.09
  • 665

대선 자금 사건의 다른 의미



아무리 면역이 됐다 하더라도, 큰 사건은 큰 사건이다. 매일 배달되는 신문은 1면 기사를 제호보다 더 크게 내세우고, 그 기사는 우리에게 기쁨이나 희망보다는 대체로 충격을 가져다 준다. 서정우 변호사 체포 기사도, 모든 신문이 1면에서 다루는 것만 보더라도 그 충격과 파장의 크기를 쉽게 가늠할 수 있다.

끊임없이 반복하는 정치 자금 사건의 한토막으로 보면 무심하게 구경거리의 하나로 치부할 수도 있다. 어쩌면 꽤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정치는 으레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 왔고, 정치가는 은연중 그렇게 국민을 세뇌해 왔는지 모른다. 그래서 거의 매일 신문 1면에 정치 기사가 충격으로 다가와도, 우리의 어리석은 호기심은 그에 맞물려 지나치지 않은 면역 체계를 유지하며 그날 그날의 현대사를 넘겨 간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 사건은 큰 사건 중에서도 큰 장면이다. 이회창 씨의 가장 가까운 측근, 유능한 변호사, 그의 손을 거쳐간 불법 자금은 수백 억대, 한나라당 불법 대선 자금 전체 규모가 현재 스코어보드 기록만으로도 700억 원. 대강의 사건 프로필만으로도 무뎌진 우리 감각을 자극할 정도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는 좀 다른 차원에서 우리를 숙고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서 변호사는 지난 대선 기간중 대통령 후보 이회창의 법률 고문이었다. 당시를 회상하면, 거의 당선을 확신하던 후보가 가장 신뢰한 법률가였다. 개인의 이력도 대단하다. 가장 성적이 우수한 사람이 거치는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했고, 법관이 되어 마지막 관문인 고등법원 부장판사까지 거쳤다. 개업 변호사가 된 뒤에도, 능력을 인정받고 명망을 얻었다.

그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이회창 씨는 더 설명이 필요없다. 대법관으로서 이회창은 가장 능력있고 모범적인 법관상의 하나였다. 우리 정치사에선 이례적으로, 대법관 출신으로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하고, 경쟁력 있는 대통령 후보로 두 번의 선거에 나섰다.

아울러서 보자면, 불법 정치 자금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는 노무현 대통령이나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에게도 부분적으로 유사한 점이 있다. 노 대통령도 법관과 변호사 생활을 한 법률가다. 최 대표는 법률가는 아니지만 서울 법대를 졸업했다.

이런 인물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그들의 화려한 경력은 우리 사회의 최상위 계층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객관적 진실과는 관계없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거친 성공인들의 표본이다. 하나같이 사회 지도층 인사이면서, 무엇보다도 법률에 능통한 전문가들이다.

이때 떠오르는 생각은 이것이다. 대법관을 지낸 최고의 법률 전문가가 유능한 변호사와 숙의하면서, 그들에게 전해지는 정치 자금의 불법성을 몰랐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당시 그들의 심리 상태는 도대체 어떤 유형이었을까. 법률을 잘 알고, 법률적 의견을 주고 받는 일을 업무로 삼고, 법의 집행까지 맡아 하던 사람들이 위법한 행위를 결행하는 순간의 의미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물론 이런 현상은 이번 사건이 처음이 아니다. 다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근본적인 생각을, 아니면 처절한 성찰을 해 보는 척하는 것이다. 큰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란 말로 넘어갈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회의 지도층에 속해 있으면서 법률을 다루는 사람들이 불법을 자행하는 데는 많은 이유와 사연이 있겠지만, 그 중 가장 고질적인 것은 특정 계급의 치외법권성이 아닐까 싶다. 특권층에 속한 인간들은 스스로 어느 정도 면책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날 국민들은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그 헌법 밖의 치외법권성을 조금은 묵인하고 용서했다. 하지만 이젠 시절이 변했다. 사회의 사정이 완연히 바뀌었다. 평범한 시민들의 민주적 의식과 법치주의적 감수성은 과거와 다르다. 불법을 바라보지만도 않고, 용서를 남발하지도 않는다.

국가 권력 기관과 사회 지도층 인물의 위법 행위는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다. 반사회적 불법성의 문제다. 이것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국가와 사회 전체 법치주의의 위기로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국가는 개인에게 준법을 명령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탈세를 하지 말라고 강요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불법 집회를 금지하라고 설득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외국인 근로자들을 추방하기 위해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겠는가. 무슨 면목으로 과속이나 주차 위반 따위로 필부필부를 귀찮게 할 수 있겠는가.

서로의 반성과 이해를 위한 짧은 명상의 화두로, 귀치아르디니의 한마디를 떠올려 본다. 「악을 배우는 자는 항상 그 모범을 능가하고, 선을 배우는 자는 모범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차병직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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